[이슈1]
박다솔, 윤지연 기자/사진 김용욱
2006년 형틀 목수 최초의 파업, 공안은 불안했다
2006년 6월 1일, 대구 경북 지역 형틀 목수 2,000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대구 본리어린이공원을 거점으로 잡고 천막을 세웠다. 파업 참여 인원은 지구별로 흩어져 현장을 봉쇄했다. 새벽이면 현장으로 달려가 대체 인력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당시 파업에 참여한 최 모 씨가 그 파업을 떠올리며 말했다. “노가다가 파업을 한다는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필이 안 됐죠. 그래서 우릴 무시하고 작업하는 현장이 있었어요. 그런 연락을 받으면 2,000명이 몰려가서 〈파업가〉 부르고, 방송하고, 공사 못 하게 막았죠.”
총파업 기세는 날로 커졌다. 대구 경북 지역 건설 현장이 거의 멈췄다. 원청 소장들도 파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현장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노조에서 인력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협조가 가능했다. 하루하루가 돈인 건설사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경찰은 총파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건설사 측에 건설 노동자들이 들이닥치면 112에 신고하라고 당부까지 해 뒀다. 그들은 건설 노동자들을 옥죄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최 씨는 아직도 경찰이라면 이를 간다고 했다. 6월 12일, 최 씨를 비롯한 파업 참가자들은 공안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수성경찰서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10일 저녁 대구 지역 노조 전 간부 2명에 대한 사전 구속 영장 발부와 가택 연행이 발단이 됐다. 건설사에 공갈 협박, 금품 갈취를 했다는 혐의로 9개월 전 이미 조사를 끝낸 사안이었다. 갑자기 재수사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명백한 공안 탄압의 징조였다. 전날 건설노조 사무실 압수 수색도 있었던지라 집회 분위기는 뜨거웠다. 수성경찰서에 2,0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이 타고 왔던 차량은 편도 5차선 도로를 메웠다. 경찰과 노조는 대치했다. 맨 앞에 있는 경찰이 소화기를 분사하면서 충돌이 시작됐다. 별안간 봉변을 당한 노조원들은 흥분했고 경찰과 몸싸움을 했다. 경찰은 곤봉과 방패로, 노조원은 주변 공사장에서 쇠 파이프를 가져와 싸웠다. “경찰이 야비하게 카메라로는 찍히지 않는 발등을 공격했어요. 1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사람 키만 한 방패로 위에서 아래로 찍더라고요. 발등에서 피가 솟았고, 조합원들도 분노했어요.”
노동자들의 분노는 수성경찰서로 향했다. 이들은 문을 걸어 잠은 경찰서로 몰려가 철제 셔터 사이로 쇠 파이프를 찔러 넣었다. 민원실 유리창이 깨져 아수라장이 됐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지도부를 포함한 7명에 대해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 그날 이후 100여 군데 현장 집회가 금지됐다.
탄압이 거세지자 지도부는 주춤했다. 이 틈을 타 교섭을 하던 전문 건설 회사들도 배 째라 안을 내왔다. 고공 농성과 교차로 점거, 현장 봉쇄, 촛불 문화제 등이 이어졌다. 파업이 길어지자 전문 건설 회사들의 부도설이 돌았다. 긴장한 대구시는 본격적인 중재에 나섰고 전문 업체들의 교섭도 한층 적극적으로 변했다. 32일간의 파업 끝에 노조는 사용자성을 전면 부정하고 있었던 원청과 전문 업체를 상대로 단체 협약과 임금 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8시간 노동을 관철하고 체불 임금의 원인이 됐던 유보 임금 제도도 없앴다.
형틀 목수는 콘크리트를 붓는 거푸집 틀을 만들거나 조립하는 사람들이다. ‘유로폼’이라는 거푸집이 생산되면서 나무로 직접 틀을 짤 필요는 없게 됐지만 폼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당시 형틀 목수는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 시달렸다. 《표준 품셈(공공 기관 발주 공사비의 정부 고시 가격)》이란 책엔 건설 노동자들의 표준 작업량, 일당 등이 적혀 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국가가 정한 기준치를 몇 배나 웃도는 살인적인 노동을 했다.
상시적인 체불 위험 역시 이들을 괴롭혔다. 임금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선 사용자와 교섭을 해야 했다. 하지만 도급과 재하청으로 이뤄진 다단계 구조에서 진짜 사장을 찾아 교섭하기란 불가능했다. 당시 계약상으론 임금을 주는 십장(오야지, 팀장)이 사장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전문 건설 회사에서 일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문 건설 회사는 원청 회사에서 공사를 따온다. 원청에서 일용직 노동자까지 보통 5~6단계의 다단계 하도급을 거쳤다. 현장 노동자들은 임금이 체불되면 십장들을 찾아 따졌지만 이들에겐 실질적인 자금력이 없었다. 전문 건설 업체가 부도라도 나면 그 책임을 묻기가 어려웠다. 임금을 가로채 튄 십장들도 부지기수였다.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 전문 건설 업체는 ‘시공 참여 계약서’를 십장과 체결하며 모든 책임에서 벗어났다. 임금, 식대, 갑근세, 퇴직금, 시간 외 수당, 건강 보험, 국민 연금, 고용 보험 등 사용자가 부담해야 할 모든 비용을 일개 책임자 역할을 하는 십장에게 전가했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는 비용 절감을 위한 방편이었다. 비용 절감에 온 신경을 쓰니, 안전도 보장받기 어려웠다. 하루에 건설 노동자가 2명씩 죽는다는 통계는 좀처럼 바뀌질 않는다. 임금은 IMF 이후 오히려 줄었다.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솟는 시기였지만 건설 노동자의 임금은 자꾸 떨어져 발등을 찍었다. 한 형틀 목수의 아내는 파업이 있기 전까지 남편의 일이 도깨비와 같다고 생각했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는데 남편의 임금은 늘 제자리걸음이었지요. 아파트 평당 가격은 몇백씩 올랐다고 하는데 왜 남편의 월급은 그대로인지, 그 도깨비 같은 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불만이 쌓이던 와중 2004년 철근 목수들의 파업을 목격했다. 형틀 목수들도 건설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먹고살기 위한 파업이었다. 이들은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불법 다단계 하도급 철폐, 시공 참여자 제도 폐지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들을 공갈 협박범으로 몰았다. 파업 기간 중 32명에 달하는 조합원이 구속됐다. 검찰은 노조 지도부에 금품 갈취와 공갈죄를 적용했다. 물품 손괴와 업무 방해, 불법 집회 등의 혐의도 추가됐다. 위원장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인간답게 살자고 외쳤다가 너무 많이 얻어맞았습니다. 먼저 범죄를 도발한 건 경찰이었는데요.” 검경의 조치는 2003년부터 시작된 건설노조 공안 탄압과 맞닿아 있었다. 이듬해 법원은 노조 지도부의 공갈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됐다. 2016년, 검경은 또 다시 건설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공갈죄’라는 혐의를 덧씌웠다. 일명 ‘노가다’라고 불리던 이들은 또 한 번 ‘공갈 협박범’으로 공안의 표적이 됐다.
(워커스17호 2016.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