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본 재판을 지켜보며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상균 개인의 재판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억울한 해고로 목숨을 잃은 노동자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소외되고 끝내 억울한 죽음을 당한 열아홉 살 노동자.
산업 현장에서 이름도 없이 돌아가신 수많은 노동자들도 이 재판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막혀 버린 차벽 앞에서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 귀를 열어 달라고 외쳤던 시민들도 이 재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노동자의 권리가 명시된 우리 헌법이, 장식이 아닌 살아 있는 우리의 헌법임을 보여 주시리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6월 13일,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최후 진술 중
“배고픈 사람 밥상 빼앗아 재벌 밥상 차리는 정부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를 설득하지도 못했고, 우리가 입을 열면 찍소리도 못 하게 막았습니다. 광화문에 모여 민생 파탄 책임을 물었더니 경찰 수만 명이 폭력으로 진압했습니다. 경찰은 집회 시작 전 갑호 비상경계를 내렸습니다. 우리는 애당초 폭도로 규정됐던 것입니다. 이게 박근혜 정권이 공안 통치를 유지하는 본질입니다. 민중 총궐기에서 누가 가장 죽음에 가까웠습니까. 백남기 농민이 6개월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1월 14일 민중 총궐기는 국가 폭력을 보여준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6월 28일, 배태선 민주노총 조직실장 최후 진술 중
쉬운 해고와 평생 비정규직 추진. 노동자들의 삶이 벼랑 끝에 내몰리자 분노가 터져 나왔다. 정부의 노동 개악에 맞서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2015년 11월 14일.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 등 13만 명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웠다. 2008년 광우병 집회 이후 최대 인파였다. 경찰은 차벽을 쌓았고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발포했다. 거대한 차벽은 시위대의 행진을 막았고, 경찰의 폭력은 시위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은 농민 1명이 혼수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공권력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권은 민주노총을 향한 탄압을 시작했다.
11월 14일 민중 총궐기에 참가했던 민주노총 조합원 526명이 소환 조사를 받았고, 20명이 구속됐다. 2016년 7월 현재, 구속자는 총 6명.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4명의 민주노총 중앙 간부와 조성덕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이재식 화물연대 구미지회장이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워커스》는 현재 수감 중인 민주노총 중앙 간부 4인(한상균 위원장, 배태선 조직실장, 박준선 조직국장, 이현대 조직국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구치소를 찾았다.
서울구치소 수번 49번
박준선 민주노총 조직국장과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나는 나가려면 오래 걸릴 것 같아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법원은 지난 3월, 박준선 국장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법원이 밝힌 그의 죄목은 특수 공무 집행 방해와 범인 도피. 수배 중이었던 한상균 위원장의 도피를 도왔다는 혐의였다.
“선고는 1년 받았는데, 지금 집행 유예 기간이라 2년 6개월 정도 수감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박 국장은 지난 2008년에도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 활동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바 있다. 검찰과 법원은 사노련이 여러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고 개입했으며, 강령을 통해 국가 변란을 도모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씌웠다. 이 사건의 집행 유예 기간에 구속된 박 국장은, 징역 1년과 함께 1년 6개월을 추가로 복역해야 한다.
그는 지난해 한상균 지도부 임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민주노총에서 활동했다. 정부의 노동 개악 시도에 맞서 민주노총은 여러 투쟁을 벌였고, 노정 갈등은 증폭됐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14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범시민 사회가 노동 개악 저지 등을 내걸고 ‘민중 총궐기’ 투쟁에 나섰다.
이날 오전 수배 중인 한상균 위원장이 참석한 기자 회견장에서 경찰은 기습 체포를 시도했다. 이를 막으려던 조합원 및 노조 간부들은 줄줄이 소환 조사를 받거나 구속됐다. 박준선 국장 역시 당시 한 위원장의 체포 영장 집행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노동 개악 저지 투쟁을 벌인 위원장의 체포를 막아선 죗값은 너무도 컸다.
아픈 곳은 없느냐 물으니 “아픈 데도 없고 잘 지낸다”며 웃기만 했다. 불편한 것도 딱히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 부쩍 야위어 보여 “왜 이렇게 마른 것 같으냐”고 하니 “나 원래 말랐는데요”라고 농담을 한다. 오히려 “잡지(《워커스》)는 어떠냐. 감옥에서 구독료라도 내야 하느냐”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머니는 자주 면회 오시냐고 묻자 “아들 얼굴 보고 울음이 터지면 내가 속상해할 걸 아니까. 그냥 ‘잘 지내라’고만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도 학생 운동 때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머니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도 하셨어요. 강한 분이세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는 요즘 감옥에서 편지 쓰는 낙으로 살고 있다. 동지들에게 편지를 받을 때, 직접 편지로 답장할 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접견 내내 교도관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일일이 기록하고 있다. 그가 그나마 세상과 마음 편히 소통하는 길은 편지뿐일 게다.
서울구치소 수번 277번
28일 검찰이 배태선 조직실장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다. 1차 민중 총궐기 대회에서 폭력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법치 국가 근본을 무너뜨릴 수 있는 중대 범죄라며 엄벌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도 했다. 배태선 실장은 최후 변론에 나섰다. “배고픈 사람 밥상 빼앗아 재벌 밥상 차리는 정부에 저항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법정 안에 40분 넘게 울려 퍼졌다.
검찰 구형이 있기 전 지난 23일, 서울구치소에서 그를 만났다. 배 실장의 안경 너머로 충혈된 눈이 보였다. 눈병에 걸렸다고 했다. 구치소 생활을 묻자 “구치소는 원래 불편한 곳”이라며 괜찮다고 했다. 음식을 많이 가리는 편이지만 구치소 음식도 어느 정도 적응이 돼 간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면회를 오는 건 KEC 동료들이다. 배 실장에게 KEC는 아픈 손가락이다. “KEC 동지들과 싸웠던 지난 5년은 제 운동의 전 과정을 통틀어 특히 소중합니다. 정리 해고도 두 번이나 막아 냈고요. 노조 깨기 위한 손해 배상 걸리면서도 계속 투쟁해 나갔죠. 운동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던 계기가 됐습니다.”
박준선 국장의 접견을 다녀왔다 하니 눈이 커진다. “박 국장 소식이 가장 궁금했어요. 이번에 1년 6개월을 또 받았잖아요. 당연히 나갈 거로 생각했는데….” 검찰이 한상균 위원장에게 내린 8년 구형 역시 그녀를 착잡하게 했다. “위원장 구형량 듣고 사람들이 많이 놀란 모양이데? 왜, 한 20년 때리지 그랬냐고 말하고 싶어요. 본때를 보여 주겠다, 뭐 이런 생각인 거잖아요. 박근혜 정부에 대든 사람은 딱 집어내겠다는 분풀이지. 상식적이라고 보긴 힘들죠. 구형 권한을 사람들 찍어 내는 데 쓴다는 것도 문제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정말 기가 막히더라고. 말이 되냔 말이야. 집회 한 건이 8년 살 거리가 되냐고. 검사들한테 물어봐야 돼요. 니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거침없는 발언 때문일까. 뒤에 앉은 속기관은 종종 자리를 비우며 해당 내용에 대해 자문을 받고 오는 듯했다. 위원장의 구형량에 대해선 어이가 없지만 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우리 위원장은 유쾌한 사람이잖아. 되게 재밌는 사람이고.” 배 실장은 기자에게 안부를 대신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가서 (위원장과) 접견되면 저는 잘 지내고 있고, 누굴 걱정할 처지가 아니니 당신 걱정이나 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녀의 아들은 지난 14일에 입대했다. 남편은 지방에 있어서 화상 면회를 한다고 했다. 그녀의 낙천성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 배 실장이 구치소에 있는 것을 부모님이 알지만 크게 걱정을 안 한다고 했다. 자기 인생을 사느라 바쁘시다고.
배 실장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 조합원들이 노동 개악을 막아 낼 것을 믿습니다. 이미 정권은 절반 이상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좀 더 잘 싸웠으면 좋겠고, 그 어떤 권력도 노동자와 민중의 생명만큼 존엄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10분이 지나가고 마이크가 꺼졌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그녀는 다시 독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울구치소 수번 20번
“검찰이 너무 원망스러워요. 세금으로 월급 받으면 국민을 보호해야지 왜 죄를 덮어씌우냐고.” 이현대 민주노총 조직국장의 가족들은 재판이 끝난 뒤 내내 검찰을 원망했다. 지난달 1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이 끝난 뒤 서울구치소에서 이현대 국장을 접견했다. 그의 누나 2명도 함께 접견실로 들어섰다.
이 국장은 지난해 11월 민중 총궐기 대회 당시 밧줄과 사다리를 구입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그가 구입한 물품들이 경찰의 차벽을 훼손했다며 특수 공무 집행 방해와 특수 공용 물건 손상 등의 혐의를 적용했다. 밧줄과 사다리 때문에 경찰차 20대가 파손돼 총 2억 4480만 원의 피해를 보았다는 주장이었다. 이날 재판에서 검찰은 지난해 국회 연좌 농성 건과 노동 개악 저지 집회 당시 도로 점거 등의 건을 추가 기소했다고 밝혔다. 이현대 국장은 “검찰이 실적 채우기를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밧줄이랑 사다리로 현수막 건 것밖에는 없는데, 자기들이 위험한 데 쓰려고 했다는 등 용도를 갖다 맞추는 거죠. 증인으로 나선 경찰들도 실질적으로 (밧줄, 사다리로) 때리고 맞는 걸 본 적이 없다고 증언을 했는데도, 위원장한테 8년이라는 엄청난 구형을 했어요.”
이현대 국장은 오는 7월 5일 검찰 구형 후, 약 2주 뒤에 최종 선고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형이 나올지 집행 유예가 나올지 아직 알 수가 없다. 그의 죄는 괘씸죄였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괘씸죄가 따른다. “민중 총궐기 건으로 500명을 줄줄이 소환했으니 사실상 정권의 탄압인 거죠. 박근혜 정부 들어서 특히 더 심하고요.”
언제쯤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여기 나가기가 되게 어려운 곳”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최근 들어 엄청나게 구속자 수가 늘어 면회 시간도 줄인다는 공지가 있었다. “오늘도 법정에서 24명이 잡혀 들어왔어요. 엄청나게 구속이 되더라고.” 10~15분 정도의 짧은 면회 시간마저 줄어든다는 얘기에 구속자 가족들은 한숨을 쉰다.
과거 위궤양을 앓았던 그는 여전히 위가 아파 고생을 하고 있었다. 누나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위 안 아프게 밥 꼭꼭 씹어 먹어”라는 당부가 이어진다. 아버지는 아직도 그의 구속 사실을 알지 못한다. 또 다시 쓰러질까 봐 이야기를 드리지 못한 채 감옥으로 들어왔다. 이틀 뒤 아버지 생신을 앞두고 세 남매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접견이 끝난 뒤, 그의 누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예전에 구속됐을 때 아버지가 쓰러졌어요. 그래서 또 그러실까 봐 얘기를 못 드리고 있어요. 지금은 올케가 아버지한테 해외로 봉사 활동 나갔다고 얘기해 뒀지. 먼 곳으로 가서 전화도 안 된다고 그러고 있어요.” 약 한 달 뒤 선고를 기다리는 가족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서울구치소 수번 120번
2평 남짓한 접견실이 꽉 찼다. 지난 25일 있었던 한상균 위원장의 면회엔 그의 부인, 쌍용차 동료 2명, 《워커스》 기자 2명까지 총 5명이 들어갔다. 한 위원장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주말 특별 면회 15분이 시작됐다. 건강이 어떤지 물었다. “동지들이 걱정이네. 나는 그냥 쌩쌩한디….” 안에 있는 사람은 밖의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은 들어가 있는 사람이 걱정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그는 70만 조합원이 있는 민주노총의 위원장이다. 아프고 힘들어도 투정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다.
그에게 간밤에 있었던 유성 소식을 전했다. 한광호 열사 자결 100일을 맞아, 현대차 본사 앞에서 윤영호 아산지회장이 고공 농성을 감행했고, 경찰이 침탈해 지회장을 연행해 갔다는 소식이었다. 한 위원장은 다친 사람들이 있는지 물으며 유성 사태를 걱정했다. “재벌 문제는 유성기업, 비정규직 문제는 동양시멘트가 대표적이죠. 이 두 문제를 타고 넘어야만 다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위원장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SNS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하니 무심한 답변이 돌아온다. “그거 돌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조직이 잘 결단을 하고 나서는 게 중요하죠. 난 박근혜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 양반 없었으면 정신 못 차렸을 거예요. 바닥이 어딘지 몰랐을 겁니다. 우리가 잘해서 이기면 되는데 그 사람 탓만 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쓴소리와 반성이 이어진다. “1월 22일 (정부가 양대 지침을 발표한 날) 결단을 못 한 걸 정부가 다 파악을 한 거죠. 솔직히 말해 우리 실력을 꿰뚫어 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공공(운수노조) 밀고, 차근차근 밀겠다는 건데. 공공이 쉽게 물러서진 않을 거예요.”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는 특유의 화법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래도 항상 찌그러질 순 없잖아요. 반격도 하고 공격도 하고 할 수 있죠.”
검찰의 8년 구형, 당사자의 심정은 어떨까. 이미 쌍용차 투쟁을 하며 3년 징역을 살고 나왔던 그다. “민주노총 중앙 지도부들에 대한 겁박이죠. 한상균을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네 까불래? 숙일래? 이렇게 말한 물음표죠.”
접견 온 쌍용차 동료가 최근 일을 시작했다고 하니 걱정을 한가득 쏟아 낸다. “지역도 중요한데 어쨌든 공장 안에 민주 노조 하나 세워야 하는 거 아니니. 지난하게 노력을 안 하면 어려운 거야. 그냥 그 틀에 굳어져 버린다고. (노조 조직에) 집중을 했으면 좋겠어. 바람이야. 나도 뭐라도 좀 해 보려고 하는데 너희들이 해야지 좀 힘이 되지 않겠니?” 밖에 있는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솔직한 얘기를 하기는 적절한 공간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소금을 넣어야 짭니다. 소금을 안 넣고 맛있는 국이 나오길 바라면 안 되는 거죠”라며 갈무리를 했다. 6월 22일,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선포했다. 아무리 갇혀 있고 탄압을 당해도 한상균은 여전히 위원장이고 민주노총은 다시 투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