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페미니스트)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해, 여성노동자들은 ‘임금하락 없는 주 35시간 노동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쉬는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35시간 노동이 실현된다고 해도, 성역할이라는 인공물이 해체되지 않는 한 함께 쉬는 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면, 철저히 자본주의적으로 살게 되듯, 성차별이 디폴트 값인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살면 성차별을 실천하며 살게 된다. 자연스러움을 의심할 때 우리는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최근 젠더 이슈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된 통계 중 하나. ‘한국 여성은 남성보다 36% 적은 임금을 받고, 5배 많은 무급노동(가사, 돌봄노동)을 한다!’ 사실 여성이 더 적은 임금을 받고, 더 많은 무급노동을 하는 건 한국이 좀 더 심각할 뿐 세계적 현상이다. OECD 평균 성별임금격차는 15%이고, 무급노동은 여성이 3배 더 많이 한다. 세계 어느 나라도 여성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더 적은 무급노동을 한다는 통계를 본적 없다. 세계적으로 여성이 더 많이 일하고 더 가난한 건,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도 되는 것일까?
세계적으로 정도가 다를 뿐, 여성의 퇴근이 곧 집으로의 출근인 현실은 흔하고, 여성은 더 적은 임금을 받아도 되며, 더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져도 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믿음을 지탱하는 건, 다음과 같은 태도들이다. 여성에게 집안일은 자연스러운 것(남자는 집안일을 도와주면 된다!), 여성의 적은 임금은 자연스러운 것(여성은 자아실현을 위해 일하는 보조생계자다!), 남편 월급이 더 많은 건 자연스러운 것(아내 월급이 더 많으면 남편이 기죽는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건 자연스러운 것(여성이 돌봄을 더 잘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건강하다!) 등등.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자연스럽다’는 건, ‘순리에 맞고 당연한 것’이라고 한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백인귀족과 흑인노예는 자연스러운 형태였다. 시오니스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이 외출 할 때마다 남성에게 허락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일련의 행위는 누구의 위치에서 정의 된, ‘순리에 맞고 당연한 것’ 일까?
‘여성의 평균 키가 남성보다 작은 건 자연스럽다’라는 말은 또 어떤가? 현대에 들어 성인의 성별 키 차이는 점점 줄고 있는데, 이는 인류 역사에서 남아선호를 실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남아에게 더 좋은 음식을 풍부하게 제공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즉 현대에 이르러 식량이 풍부해지고, 남아 선호에 대한 태도가 변하면서 성별 키 차이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현실에 젠더가 스며있는 전형적 사례다. 문화적 신념에 의해 생물학적 구성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몰론 문화적 신념에 의해 생물학이 구성되는 것 뿐 아니라, 생물학이 문화적 신념의 근거로 활용되는 일도 빈번하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여성의 월경이다. 18-19세기 의사들은 여성이 월경 때문에 몸이 허약하므로, 교육 받는 것 같은 심한 일은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19세기 미국 의사들은 ‘난소에 필요한 정력을 다른 데 쏟으면 안 된다’고 경고했고, 지배계급 여성들에게는 몇 달이나 몇 년씩 침대에만 누워 사는 병약한 모습이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로 찬미되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20세기 들어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남성들이 전쟁터로 나가자 공장을 메꾸기 위해 여성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그러자 여성의 월경이 사회생활에 불리한 조건이 아님을 주장하는 연구가 쏟아졌다. 곧 여성의 사회생활은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다시 남성들에게 일자리가 필요해졌고, 여성은 월경을 하는 존재로서 집에 머물며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게 자연스럽고 여성적이라는 문화 규범이 강화됐다.
이처럼 자연스럽다는 느낌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게 아니고, 사회, 문화적 요소가 개입해서 형성되는 매우 정치적인 결과물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고 본성적이라는 그 정점에 성별이분법에 근거한 성역할이 있다. 상냥한, 헌신적, 섬세한, 의존적, 감정적, 돌보는, 보조적, 인내하는, 나서지 않는, 관계 지향적인 본성이 자연스러운 여성, 아내, 어머니…. 퇴근 후 피곤하지만 사랑을 담아 남편과 아이의 건강과 일상을 보살피고, 아무리 바빠도 남편과 아이의 아침밥을 챙겨주며, 남편보다 빠른 승진을 미안해하고, 그럼에도 더 좋은 엄마 더 좋은 아내가 되어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해야 하는 상태. 그게 바로 여성의 역할, 윤리, 매력이 복잡하게 작동하도록 만든 결과의 일부일 것이다.
성역할은 사회를 작동시킬 때 개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가사노동이 사회화되지 않고 가족 안에 묶여 있는 현실, 노동의 재생산 비용이 무급인 현실은 여성의 성역할이 강력하게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성역할은 사회구조나 제도의 변화가 아닌,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사회를 유지시킨다. 현실의 부조리를 성역할로 봉합한다. 당연히 개인의 착취가 심화된다. 마치 자기계발서들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메시지를 유포함으로써 개인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사회 구조의 문제를 누락하는 것과 일정정도 유사하다.
만약, 흑인은 피부가 짙어서 호르몬의 화학구조가 다르다는 전제를 만들어 흑인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힘쓰는 일을 즐기고, 순종적이며, 독립을 싫어하고, 타인을 돌보는 행위에 적합한 모습이라고 사회적으로 정의했다면. 그리고 그로인해 흑인의 노동을 노동이 아닌 흑인의 역할, 윤리, 매력으로 평가했다면. 무엇보다 흑인 본연의 역할, 윤리에 충실한 매력적인 흑인과 그렇지 않은 흑인을 나누고 사회적으로 늘 평가가 이뤄지는 사회였다면. 만약 그랬다면, 흑인노예제 사회는 유지되기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자연스럽다의 또 다른 뜻은 ‘힘들이거나 애쓰지 않고 저절로 된 듯하다’라고 한다. 그 뜻에 의존해, 여성의 노동이 없으면 한시도 굴러 갈 수 없는, 여성이 더 많이 일하지만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게 필연적인 이 세계를 설명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성역할과 성별분업 덕분에, 여성 차별과 착취가 힘들이거나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된 듯하다![워커스 29호]
[참고문헌] 로빈 라일의 <젠더란 무엇인가>, 낸시 홈스트롬의 <페미니즘 왼쪽날개를 펴다>, 정희진 외 <남성성과 젠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