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페미니스트)
모두 슬펐다. 많은 이들은 술잔을 들고 떠난 이에 대한 추억과 변하지 않는 사회를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리운 눈물을 잠시 미룬 채, 쟁반을 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은 새로운 활동과 연대에 대해 한껏 논하다가 취해서 비틀거릴까봐 조심했고, 몇 시간째 쟁반을 나르는 이들은 전이 흐트러지거나 국이 쏟아질까봐 걸음을 조심했다.
최근 연달아 가게 된 장례식장에서 본 모습이다. 두 곳의 조문객 상당수가 활동가들이었다. 활동가들은 혈연을 떠나 두터운 관계가 많고, 부지런한 일꾼들이니 당연히 음식 나르기, 조의금 받기, 운구 등의 역할을 나서서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기존 성별분업은 그대로 재연됐다. 음식 쟁반을 나르는 이들 절대다수는 ‘여성’이었다. 정말 궁금하지 않나, 여성으로 호명되는 것과 그들이 쟁반을 나르는 것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필연성이 있는 걸까?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몇몇 ‘남성’들에게 음식 쟁반을 함께 나르자는 제안을 하고, 손에 쟁반을 쥐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곤, 마치 자석에 끌려가듯 어느새 테이블에 앉아 다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지만, 한 번씩 생경하게 다가온다. 한숨조차 안 나오고, 청자를 잃은 말은 마음에 고였다. “인간의 차별, 착취를 옹호할 리 없는 당신들인데! 누구보다 정의와 평등에 민감한 당신들이, 젠더체계에 이토록 안주하며 타인의 노동 위에 앉아 있다니!”
# 성별분업은 합리적 역할분담?
술을 꽤나 마신 듯한 누군가 말했다. 남성들이 발인 날 운구를 하니까, 여성들이 음식을 나르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클래식한 화법에 웃음이 났다. 아직도 성별분업, 성역할을 합리적 역할분담이나 교환이라고 여기는 저 지독한 착시현상을 끌어안고 있는 사상적 게으름. 새삼 묻고 싶다. 유사 이래, 시민은 세금을 내고 정부는 치안을 보장하는 평등한 합리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건, 도대체 누가 원하는 믿음인지?
좌우를 떠나 여성이 임금/무임금 영역에서 모두 더 많이 노동하고, 더 가난하다는 현실을 모르는 이도 부정하는 이도 없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그런 현실을 만드는 한 축은 성별분업, 성역할의 작동이다. 결국 성별분업, 성역할은 차별・착취의 다른 말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태어나면서 지정 받는 성별에 따른 성역할은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성별분업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치를 위반하고 있다. 사실 성별분업, 성역할 해체는 너무나 오래된 주제인데, 그들은 ‘듣지 않는 3년, 보지 않는 3년, 며느리 생활’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 불편함이 말하는 특권
늦은 밤, 쪽잠을 자며 장례식장을 지키는 이들만 남은 시간. 페미니스트 때문에 불편하다고 잠꼬대처럼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열기 가득하던 마음 한구석에 갑자기 여백이 생겼다. 그래, 나도 그랬었지! 오래전 중증장애가 있는 동료와 함께 일할 때, 뒷풀이를 하고 싶은데 경사로 있는 술집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당연히 그 불편함은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를 향한 것이었지만, 때로는 동료가 휠체어를 이용한다는 현실로 잘못 향하기도 했다.
나는 그게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살아본 적 없기 때문에 느끼는 불편함이라는 것, 즉 불편함이 잘못 향하는 것 자체가 나의 특권을 의미한다는 걸 되새기곤 했다. 나는 그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 동료는 베지테리언인 내가 불편해서 식당갈 때 빼놓고 가고 싶은 적 있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모두 사회의 기성품이고, 오염되고 부족한 존재들 이다. 계속 거슬러 움직이지 않으면 기존 구조가 짜놓은 물결에 함께 흘러가면서, 그 물결에 더욱 힘을 실어 준다. 페미니스트, 휠체어이용 장애인, 베지테리언이 있어서 불편한 게 아니다. 그들과 동일한 자리에 서있어야 하는 순간, 자신이 공기처럼 누리던 특권을 누릴 수 없어서 불편하다고 느낀다.
운동은 존재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혁의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에서 빠져나와 그 모든 게 교차하는 존재로 자신을 설정하고, 그 역사의 흐름 속에 놓여 있는 실체로 자신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 물살에 휩쓸리고 거스르며 생생히 살아 움직일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을 만난다.[워커스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