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페미니스트)
봄이 오고 벚꽃이 질 때면, 노브라(no bra)의 편안함도 차츰 사라진다. 가슴 쪽에 주머니가 달린 두께 있는 남방이나, 도드라지는 장식이 있는 티셔츠를 찾는다. 노브라임을 티 나지 않게 해줄 옷들이다. 날이 더워 옷을 얇게 입을수록, 젖꼭지와 가슴을 가리는 브레지어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얇은 옷으로 인해 브레지어가 너무 확연히 보이지 않게, 런닝 같은 속옷을 한 겹 더 입는다. 더워서 얇은 옷을 입는데, 얇은 옷 때문에 더 많이 입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요즘은 볼륨업이나 풍성한 가슴을 위해 브레지어를 하기도 하지만, 그런 바람이 전혀 없어도 브레지어를 하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닌 일이다. 노브라의 자유를 한 여름에도 누리고 싶지만, 옷 위로 젖꼭지가 티 나는 상태로 지하철을 타면 몰카에 찍힐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진은 ‘노브라녀’나 ‘젖꼭지녀’ 같은 이름을 달고 인터넷을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여성의 젖꼭지와 가슴이 뭘 어쨌다고, 누구를 위해 이렇게 가려야 하나?
브레지어를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불편한 계절이 다가오면, 10여 년 전, 여성의 히잡으로 이미지화 된 중동 지역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오른다. 온 몸을 가리는 차도르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내 또래 여성에게 불편하지 않은지 물은 적 있다. 그는 차도르 없이 거리를 나서는 건, 비키니 차림으로 길을 걷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거라고 했다. 차도르를 착용함으로써, 남성들의 희롱과 불쾌한 시선으로 부터 자신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얘기를 듣다 보니, 한국의 노브라 그리고 이슬람 여성의 히잡과 차도르는 지역적 거리만큼 굉장히 다른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전 지구적으로 강고한 젠더 차별 구조 안에서 나타나는 유사성도 짙다.
#이슬람에서 만난, 히잡을 통한 상징적 싸움
이란에서는 아침마다 머리카락은 히잡으로 가리고, 바디라인은 헐렁한 바바리로 가린 채 외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외국인이라도 종교경찰에게 연행될 각오를 해야 했다. 사실 과거 이란은 여성의 히잡 착용 여부가 비교적 자유로운 나라였다. 하지만 1979년 이슬람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종교 근본주의에 입각해 히잡 착용을 강제했다. 당연히 시민들은 반발했고, 혁명정부는 ‘히잡 미착용자는 공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자’라고 인식했다.
터키에서는 히잡을 쓸 필요가 없었다. 터키는 이란과 반대로 학교와 관공서 등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했다. 터키는 세속국가 정책에 따라, 1925년 여성에 교육권과 참정권 부여하고 동시에 히잡은 금지했다. 금지 처분에도 ‘히잡을 착용하는 것은, 정부의 세속주의 원칙에 반대하는 정치 행위’로 인식됐다. 이처럼 터키와 이란 정부의 히잡에 대한 정책은 상반됐지만, 두 사회 모두 여성의 히잡 착용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규정됐다.
팔레스타인은 히잡에 대한 법적 규정이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가 함께 한 국제연대운동(ISM)은 각국 여성활동가 들에게 문화 존중 의미에서 히잡을 권했다. 하루는 이스라엘 점령에 반대하는 직접행동 현장에서, 한 팔레스타인 여성을 만났는데, 그는 마을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 이는 자기뿐 이라며, 내가 히잡을 안 쓰는 게, ‘우리’의 연대일 수 있다고 했다. 또 혹시라도 자신이 히잡을 금지한 프랑스에 간다면, 반드시 ‘민족적 저항’의 의미에서 히잡을 착용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질문을 다르게 하면, 다른 현실이 보인다
“히잡을 착용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어느 쪽이 여성 권리를 보장하는 것인가?”라고 흔히들 질문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여성을 둘러싼 다층적 현실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그 전에 질문해야 하는 건, 왜 이슬람 국가들은 이슬람 정체성의 주요 상징을 남성 의복이 아니라, 여성 히잡으로 ‘선택’했을까이다. 또 왜 이슬람은 여성에게 히잡을 착용하도록 해 전통을 지키려 하고,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은 여성 히잡을 금지해 이슬람 정체성을 제한하려고 드는 걸까? 그러니까 왜 이슬람 내 외부 모든 권력이 히잡에 집착하고, 히잡 착용 여부로 여성의 몸 위에서 권력의 전선이 형성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또한 왜 여성 몸이 히잡을 통해 종교, 민족, 전통을 상징하게 됐을까? 이슬람 여성의 히잡 만이 아니다. 재일 조선인 학교에서 여학생들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국에서 대통령 취임식 때 영부인만 한복을 입고, 결혼식에서는 어머니만 한복을 입는다. 이런 ‘정숙한 여성’이 구성되고, 그 여성이 종교, 민족, 전통을 매개하는 상징 안에서 머물 때, 과연 여성이 시민권을 가진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여성이 그런 상징을 거부하고, 그 상징의 구조를 훤히 드러낸 이후에야, 히잡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히잡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의의 핵심은, 여성에게 히잡 착용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이다”라는 말도 한계적이다. 한국에서처럼 이슬람도 ‘보호’ 받을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이분화 하는데, 주요한 기준 하나가 여전히 히잡 착용 여부다. 히잡을 착용하지 않으면 보호받지 않아도 되는 여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현실이 이런데 ‘히잡 착용을 선택할 권리’라는 말은 마치, 여성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온전한 선택의 주체로 존재하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여성의 선택권을 말하기 위해선, 남성의 벗은 몸은 위협의 대상이 되는데(남성 철거깡패는 알몸을 철거민에게 보이는 것만으로 위협이 된다), 여성의 벗은 몸은 ‘눈요기’가 되는 질서를 먼저 해체해야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여성의 히잡이나 브레지어 착용에 ‘선택할 권리’라는 말이 연결될 수 있다.
#갈등은 여성 몫이 아니라, ‘그 시선’의 몫
한국의 노브라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조선시대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을 보면, 조선 여성들에게 노브라는 하나의 문화였다. 여성들이 한복 저고리와 치마 사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젖가슴을 내놓고 거리를 활보했다. 여러 추론이 있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당당함의 표시라거나, 짧은 저고리가 패션이었고 젖가슴은 종아리에 비해 그다지 성애적 신체 부위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젖가슴을 가리는 게 ‘예의’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문화적으로 구성되기 이전의 자연적 몸은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 질문. 거울 앞에서 히잡이나 브레지어를 착용할지 말지, 왜 여성들이 갈등해야 하는가? 어떤 선택을 해도 온전히 홀가분하기 어렵다. 문제는, 여성의 몸을 두려워하고, 가리고, 그래서 더욱 욕망하는 ‘그 시선’이다. 그 시선에 책임을 묻고, 그 시선을 해체시킬 때, 머리카락과 젖꼭지를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전한 자기 몸의 일부로 해방시킬 수 있다.[워커스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