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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운동의 전통은 어디로 갔을까

2018년 1월 18일Leave a comment38호, 반다의 질문By 반다

사계

“제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이력서에 쓸 수는 없잖아요?”

스펙은 뛰어나지만, 채용은 곤란하다는 면접관. 이유는 20대 여성 채용불가라는 내부방침 때문이란다. 취준생 백선이 그 말을 듣자마자, 면접관에게 저렇게 답한다. 자신은 레즈비언이므로 결혼, 출산과는 멀다는 의미다. 면접관은 흔쾌히 채용을 결정하고, 백선은 몰래 휴대폰 잠금화면 속 남성아이돌 사진을 지운다. 잠시 거짓말을 자책하지만, 취업은 전쟁인데 자신이 피흘리며 퇴각하면, 부모님은 그만큼 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을 상기한다.

웹소설 <온 리얼 미디어>의 한 장면이다. 이 상황은 온전히 비현실적인 과장일까. 동성애자 차별이 명백한 사회에서, 20대 여성이라서 취업에서 배제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동성애자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 같은 상황. 저출산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출산 불가를 이유로 더욱 공격을 받지만, 기업은 출산 계획이 있는 이성애자 여성보다 레즈비언 여성을 더 선호한다는 전개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만 하는 건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 백선은 대략 27살이니까 92년생, 남아선호로 인한 성감별 낙태가 정점을 찍은 직후 태어났다. 그리고 여기 백선의 친구 김선이라는 인물이 소설 밖에 있다. 백선보다 가난한 집 출신인 그는 스펙이 별로 없고, 대학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하향지원 했으나 겨우 한군데 붙었었다.

# 27살, 김선

나, 김선. 2년 전 대학을 졸업할 쯤, 중앙대 재단이사장이 대입전형과정에서 분칠하는 여학생 말고, 졸업 후 기부금을 내는 남학생 위주의 선발을 지시했다는 보도를 봤다. 그리고 실제 평가 교수들이 남학생들에게 점수를 후하게 줬다는 기사도 이어졌다. 나도 수시지원 했다가 떨어졌던 대학인데, 설마 내가 가난한 집 여학생이라 떨어진 건 아니었겠지 자조했었다.

한국의 정규교육 12년은 대학입시를 향해 달리고, 부모들은 자식 인생을 대학입시에 건다. 그래서 대학입시의 공정성은 더없이 예민하다. 애초 촛불의 도화선이 됐던 이화시위도 정유라 특혜와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가 동력이 돼, 최순실과 박근혜의 관계까지 밝혔었다. 그런데 부모가 최순실도 아닌데, 중앙대 재단이사장은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특혜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졸업 후 취준생 시절, 몇 군데 공사 면접에서 낙방했을 때다.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이 채용 과정에 개입, 점수 조작으로 합격권에 들었던 여성 7명을 탈락시켰다는 기사를 봤다. 뒤이어 한국석탄공사에서도 비슷한 조작이 드러났다. 취업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특히 고용불안 속에서 공사는 취준생이 꼽는 꿈의 기업이다. 게다가 공사는 학력이나 스펙을 보지 않아서, 나처럼 알바 하느라 스펙을 쌓을 수 없던 이들도 도전해 볼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영역이다. 그런데 그곳조차 최소 남성이라는 스펙이 필요했다.

결국 취업 준비를 다시 해서 규모 있는 기업의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입사 첫날부터 외모평가와 성희롱 발언이, 화기애애한 웃음 속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 남자 상사 목록이 신입 사원 사이에서 조용히 공유됐다. 해당 목록은 이름과 직급은 물론 주된 행위까지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었는데, 퇴사한 여자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족보’라는 소문이다. 신문에 연일 보도됐던 한샘이나 현대카드에서와 같은 성폭력 사건을 떠올려 보니, 정말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회사는 침묵을 종용하는 모습. 우리 회사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여자 입사 동기 서너 명이 함께 쓰는 단톡방에 며칠 전에 본 기사를 링크했다. ‘LG생활건강의 여성노동자 53% 이상이 성희롱 피해 경험, 72%가 피해 상황에 순응. 성희롱에 대한 기업의 대응 시스템에 대해 절반 이상이 신뢰하지 않음, 불응 시 고용상 불이익을 겪음.’ 높은 실업률과 불평등한 취업난 속에서 직장을 잃는 게 두렵다.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 남자 상사가 지금 보다 더 많이 추근거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입사 동기들과 대응책을 고민하고 있다.

# 여성노동운동 전통은 어디에, 나는 어디서 누구와 단결 하나

대학 때 소모임에서 <한국 여성노동자 운동사>를 공부하며 가슴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1970년대 삼성제약에서는 남성 관리자가 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여성노동자를 통제하고, 성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만든 노조가 가해자 해고를 요구하며 파업을 했고,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직장에서 성/폭력은 거의 사라지게 됐다고 했다. 콘트롤데이터도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면서 결혼퇴직제 철폐, 산전후휴가 정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3개월에 한 번씩 눈치 보며 사용하던 생리 휴가도 매월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80년대에도 이어져 방일물산에서는 법적으로 25세까지만 인정하던 여성정년을 55세로 바꿔낸 투쟁도 있었다. 동일 방직이나 YH 같은 전설의 노조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보다 여성 인권이 훨씬 나빴던 시절인데, 투쟁의 성과는 말할 수 없이 놀랍다. 역시 노조가 있어야 사람 취급받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저런 여성노동운동의 전통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노조를 떠올리면, 민주노총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하지만 거긴 정규직 남성들만 모여 있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지하철에서 보던 민주노총 포스터엔, 머리띠 묶은 나이든 아재만 보였다. 취업준비를 한창 할 때 인터넷에서 봤던 것도 기억난다. ‘형광등 바꿀 땐 아빠, 컴퓨터 바꿀 때 오빠, 박근혜 바꿀 땐 민주노총!’ 뭐 저런 곳이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민주노총의 어떤 사무실들은 사무간사라는 이름으로 여성노동자를 고용해서 차 심부름, 청소, 복사, 회계 등의 일만 시키는 곳도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거기는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보다 퇴행한, 성역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일 것 같다.

“태어나면 출생신고, 취직하면 노조가입”이라는 말에 손뼉을 쳤지만, 저런 곳은 싫다. 가봤자 ‘어린’ 우리들한테, 아재개그나 날릴 것 같다. 엠티가도 ‘꽃 같다, 예쁘다, 춤춰보라’고 할까 봐 지레 싫다. 대학 입학 때 예비역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허구한 날 사무실에서 성희롱에 시달리는 걸 그 사람들은 이해 못할 거다. 외모 꾸미기 노동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나 알까. “단결한 노동자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을 좋아 한다. 그런데 나는 어디서 누구와 단결해야 안전하게 출근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결국은 일하다가 ‘사고’가 생기면 그때 네이트 판에 사연을 쓰고, 우리의 현실과 마음을 잘 아는 여성단체와 연대해서 재판을 하는 게, 지금 나의 최선일까?[워커스 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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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
workers101@jinbo.net

페미니스트. 자신을 재정의 할 수 있는 힘이 혁명을 부른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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