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에 가서 뭐를 바꿀 수 있는데? 세브란스에서 한국노총은 58년이 됐는데 민주노총은 뿌리가 없어. 병원이 싫어한다는 거 아는데 왜 (민주노총에) 있어. 시급은 계속 올라가고 독재정권 시대가 아니잖아. 의사만큼 월급 달라고? 우리(환경미화 노동자)가 하는 일은 정해져 있거든. 다 받을 만큼 받고 있어. 그러니까 한국노총에 계시면 나름대로 편하게 일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한국노총) 가입서 한 장 써주세요. 원래 이렇게 받으면 안 돼요. (민주노총과) 페어플레이해야 하는 건데 이해하세요.”
한국노총 철도사회산업노동조합 (철산노) 산하 연세세브란스병원노조 지부장이 지난 8월 서숙자(가명) 씨에게 건넨 말이다. 면접 절차라던 체력 테스트에서 지부장은 한국노총 가입을 강요했다. 취업해야 하는 입장인 서 씨는 “네”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노총 철산노 가입서를 작성했다. 합격 통보가 나기도 전에 노조 가입을 한 셈이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서경지부)에 지난 1월 면접을 봤던 이미순(가명) 씨의 제보도 이어졌다. “면접 때 노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면서, 손가락, 발가락이 정상인지 반 농담 섞으면서 신체검사를 한다고 했어요. 자기네들끼리 통하는 은어 같더라고요. 그러더니 날 노조 사무실로 데려갔죠. 한국노총 지부장이 민주노총은 데모만 해서 연세대 측에서 다 자를 거라고, (한국노총에) 가입하면 우리가 유리하게 서준다고 했어요. 가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였어요.”
분명 신체검사라 했는데, 한국노총 철산노 지부장은 노조 얘기만 20분을 했다. 이 씨의 질문은 받지 않았다. 그는 결국 강요에 못 이겨 철산노에 가입했고, 지부장은 그를 다시 면접 장소로 데려갔다. 면접관인 용역업체 소장은 검은 바지 복장으로 출근을 통보했다. 합격이었다. 마치 한국노총에 가입하니 채용된 느낌이었다.
이 씨는 그렇게 입사하고 5일 만에 회사를 나왔다. 일하는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이 씨는 “동료들이 용역업체 반장들한테 자르지 말라고 애교를 부르는데 난 그런 걸 하지 못했다”며 “툭하면 자르는 용역회사였고, 반장(관리자)들은 그걸 이용해 여자들한테 작업을 걸었다. 그래서 반장이 보이면 일부러 복도를 피해 다녔다. 나는 이런 분위기에 융화하지 못해 잘렸다. 5분 만에 채용되고, 5일 만에 잘린 셈”이라고 말했다.
《워커스》가 확보한 녹취록에 따르면, 김희은(가명) 씨의 경우 면접관이 “성향이 이상하거나 신체장애가 있을 수 있으니 체력테스트를 하는데 반장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를 데려간 곳 역시 한국노총 철산노 사무실이었다. 철산노 지부장이 노조 얘기를 계속하자, 김 씨는 “노조에 가입 안 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지부장은 “정확하게 알 필요 없다”고 말을 잘랐다.
서경지부는 녹취, 제보를 바탕으로 이 같은 용역업체 태가비엠㈜의 부당노동행위, 지배·개입의 배경을 알아냈다. 전말은 이랬다. 2016년 6월 병원에 민주노총 서경지부가 출범하자 용역업체 태가비엠㈜은 민주노총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한국노총 철산노로 조합원을 몰기 위한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2017년 ‘신체검사’, ‘체력테스트’를 만들었다. 면접관인 태가비엠㈜ 소장은 신체검사를 철산노 지부장 혹은 조합원인 업체 반장에 맡겼고, 면접자를 철산노 사무실에 데려갔다. 이곳에서 철산노 가입을 사실상 강제했다. 면접관인 태가비엠㈜ 소장은 ‘신체검사’ 장소에 없었으니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었다. 부당노동행위를 은폐하는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물론 태가비엠㈜은 민주노총 서경지부에는 면접 사실조차 통보하지 않았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모두 한국노총 조합원이라는데 서경지부로서 달리 방도가 없었다.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는 14개월째 신입 조합원을 받지 못했다. 철산노는 홈페이지에 아예 서경지부 탈퇴서까지 버젓이 게시해놨다. 철산노는 “페어플레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신체검사’를 빙자한 ‘정신감정’을 지속했다. 그렇게 현재 한국노총 철산노 조합원은 약 160여 명, 민주노총 서경지부 조합원은 30여 명이다.
#1 원청의 민주노총 죽이기
민주노총 서경지부는 조합원이 130명이 넘었을 때가 있었다. 2016년 7월 세브란스병원 노동자 130여 명이 민주노총 문을 두드렸을 때다. 노동자들은 매년 최저임금에 시달렸고, 휴일은 한 달에 이틀 뿐이었다. 회사는 고급마스크를 지급해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마저 무시했다. 관리자에게 ‘님’자를 빼고 불렀다는 이유로 ‘시말서’를 쓰는 갑질도 견딜 수 없었다.
그렇게 민주노총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가 출범하고 노동 조건은 실제로 나아졌다. 올해 5월부터 시급도 7,800원으로 올랐다. 휴일도 한 달에 나흘로 늘었다. 회사의 갑질도 점차 사라졌고, 노동자들은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서경지부 투쟁의 성과였다.
서경지부 조합원 수가 늘어나며 노동조건이 개선되자 세브란스병원과 용역업체는 노조파괴 공작에 착수했다. 세브란스병원은 용역업체 태가비엠㈜에 ‘민주노총 죽이기’를 직접 지시했다. 서경지부 출범 두 달 뒤, “민주노총 서경지부 간부 소란 등은 철산노 위원장에게 실시간 전달해 ‘노노대응’ 유도 바란다”는 병원의 업무일지가 폭로됐다. 또 “민주노총 집회 예고, 철저 대응 바람”, “민주노총 불법 행위에 대한 (용역업체의) 조치 방안 보고바란다”는 내용도 담겼다.
병원은 2016년 10월 서경지부가 병원 로비에서 선전전을 했다는 이유로 노조 간부와 조합원 8명을 업무방해로 고소했다. 지난 4월에도 노조를 대상으로 업무방해, 집시법 등의 고소가 이어졌다. 서경지부가 선전전에 나설 때마다 법원에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내기도했다. 법원은 ‘확성기 등을 이용해 소음을 유발하는 행위’를 제외하고 병원의 모든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다.
원청이 서경지부 집단 탈퇴를 암묵적으로 도왔다는 의혹도 있다. 지난 7월 서경지부는 80명에 달하는 조합원의 집단 탈퇴서를 받았는데, 탈퇴서의 근원지는 원청 사무팀의 팩스였다. 서경지부로서는 원청과 철산노의 관련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철산노 가입을 유도하기 위한 ‘체력테스트’도 비슷한 시기에 생겼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양현 근로자위원도 세브란스병원 부당노동행위 건에서 이 문제를 두고 “하청 노동자가 원청 사무팀을 통해 노조 탈퇴서를 제출하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2하청의 민주노총 죽이기
하청업체도 민주노총 서경지부 조합원만 ‘골라’ 괴롭히기 시작했다. 현재 태가비엠㈜은 유동 인력으로 서경지부 조합원을 더 많이, 오래 배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유동’이라 부르는 인력은 일종의 수습제도이자 파견제다.
신입으로 입사하면 고정 업무를 받지 않고 ‘유동’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병동, 수술실, 응급실 등 필요한 업무가 생기기만 하면 그곳에 투입된다. 유동 인력은 자동으로 여러 업무를 도맡는다. 심지어 하루에 네 번씩 중환자실, 수술실 등을 오가기도 한다. 또한 다른 노동자가 휴가로 자리를 비우면 유동 인력으로 대체한다. 이곳 노동자들은 ‘유동’에서 벗어나 고정 업무를 받길 원한다. 유동 인력 배정은 주로 용역업체 소장과 반장이 주도한다.
서경지부 조합원들은 회사가 이들 조합원만 유동 인력에 배치해 민주노총 탈퇴를 압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백수민(가명) 씨는 “통상 유동은 한 두 달만 하고 고정업무를 받는데, 서경지부 조합원만 6개월째 유동 인력으로 갖은 고생을 다 하는 중”이라며 “반면, 새로 입사한 철산노 조합원은 단 며칠 만에 유동에서 빼고 고정 업무를 준다. 철산노에 업무상 특혜를 주고, 서경지부만 고생시키는 태가비엠의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서경지부에 따르면, 현재 유동 인력 약 10명 중 4명이 서경지부 조합원, 나머지는 철산노 조합원이다. 그런데 철산노 조합원은 서경지부보다 5배가 많다. 비율로 따지면 서경지부 조합원이 철산노보다 더 많은 유동 인력에 배치됐다.
부당 전보도 있었다. 서경지부에 따르면, 지난 5월 30일 태가비엠㈜은 직원들에게 회사의 인사, 조직, 재무 관리와 기타 영업에 관한 사항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는 ‘정보보호서’ 서명을 받았다. 같은 달 17일 박근혜 전 대통령 자문의였던 피부과 정기양 교수가 1심에서 징역 1년으로 법정 구속됐다. 일주일 뒤, 박생수 전 서대문경찰서장의 연세세브란스 뇌물수수 혐의가 알려졌다. 이 시기 철산노는 정기양 교수를 처벌하지 말라는 탄원 서명을 돌렸다. 사실상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비롯한 범죄에 연루된 병원 인사들의 정보를 누설하지 말라는 서명이었다.
서경지부는 이 사실을 알고, 조합원들에게 서명하지 말라고 선전했다. 곧바로 태가비엠㈜ 관계자는 업무 방해라며 이들을 촬영하는가 하면, 그날 바로 서경지부 일부 조합원의 담당 업무를 바꿔치기 했다.
‘수당’으로 민주노총 탈퇴를 직접 회유한 적도 있다. 수술실에서 일하는 김영례(가명) 씨는 “용역업체 반장이 수술실 위해수당을 2만4천 원에서 4만 원으로 올려주겠다며 서경지부 탈퇴를 압박했다”면서 “중환자실 역시 위해수당을 올려 중환자실 노동자 9명의 서경지부 탈퇴를 한 번에 이끌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한 노동자는 한국노총에서 탈퇴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 “동료 한 명이 철산노에 불만을 품고 탈퇴했는데,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철산노 조합원 2명이 말도 붙이지 않고 이상한 눈으로 흘겨보며 따돌렸다”며 “그는 노조에 대해 잘 알아 평소에 서경지부에 들어와 보탬이 되겠다던 사람이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서 일하고 밥 먹는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하고, ‘유동’으로 분류될 두려움에 서경지부에 가입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3 노동위원회의 민주노총 죽이기
“내가 봐도 이상한데, 결정적 한 방이 없네?” 세브란스병원 부당노동행위 사건을 두고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이 한 말이다.
부당노동행위가 담긴 녹취록만 열 개가 넘었다. 원청의 지배·개입이 드러난 업무일지까지 폭로됐다. 조합원은 물론, 퇴직자의 제보까지 이어졌다. 노동위원회는 차고 넘치는 증거 모두를 ‘결정적 한 방’으로 보지 않았다. 지노위는 지난 29일 이 사건을 두고 기각을 결정했다.
당시 근로자위원으로 지노위에 참여한 양현 철도노조 법규국장은 “사용자위원, 공익위원들이 증거를 너무 보수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양현 법규국장은 “녹취상 서경지부를 탄압한다는 정황 증거는 있었지만, 노동위원회는 사용자의 지배 개입의사를 증명하는 데만 집중했다”며 “사실상 사용자가 ‘민주노총을 미워한다’는 자백에 준하는 증거자료를 요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또 ‘체력테스트’로 한국노총 가입서를 쓰게 한 건 사실인데, 회사와 용역업체 간 민주노총 가입을 막기 위한 공모와 그 계획이 드러나지 않은 점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위원들 사이에서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전했다.
실제로 태가비엠 사용자 측은 체력테스트는 때마침 철산노 지부장, 조합원이 있어 시킨 일이고, 서경지부 조합원 유동 인력 배치는 업무상 필요로 이뤄졌다는 취지로 항변했다. 사측은 노조끼리 알력 다툼을 한 것이지, 회사가 개입한 건 아니라고 일관했다. 그리고 이 주장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특히, 사건을 두고 위원들의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다. 통상 노동위원회에서 각 위원은 심문을 진행한 후, 결정 전 쉬는 시간 등 사석에서 사건에 대한 평가, 견해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주심을 비롯한 위원들은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양 국장은 “세브란스는 언론에 많은 주목을 끌었던 사건이기도 해, 위원들이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기각 결정에 주심을 맡았던 공익위원은 조용만 건국대 교수다. 조용만 위원은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보학계 인사로 분류된다. 참여정부 시절, 민주노총 노사관계 로드맵 정책대안 사업에 참여하기도 했고, 박근혜 정부의 전교조 탄압 반대 교수 연구자 지지 선언에 동참하기도 했다.
조용만 교수는 지난 18일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당사자가 불복해 중앙노동위원회로 사건이 계속될 것으로 안다”며 “중노위가 다르게 판단할 수도 있는 문제고, 현재 사건이 끝났다고 보지 않아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고 답변을 피했다.
노동위원회의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인정률은 2013년 11%, 2014년 10%, 2015년 18% 수준이다. 지난 11월 중앙노동위원회와 각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심판 사건 인정률은 9%에 불과했다. 서경지부 역시 이 9%에 포함되지 않았다. 주심이 ‘진보적인 노동법 연구자’여도 불가능했다. 노동위원회에서 만큼은 부당노동행위를 보수적으로 바라봤다.
실망은 분노로 돌아왔다. 서경지부는 중앙노동위원회 절차로 싸움을 이어갈 예정이다. 아직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의 수사도 기다리고 있다. 철산노-원청-하청의 공작으로 서경지부 세브란스병원분회 규모는 작아졌지만, 분위기는 달라졌다. 용역업체 퇴출 운동도 계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