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연 기자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렇지만 왠지 새로워 보인다. 정권교체라는 네 글자가 주는 힘이다. “잊혀 지죠. 시간이 지나면.” 참여정부 시절, 동료를 잃은 어느 노동자가 말했다. 촛불을 타고 온 문재인 바람은 그만큼 위협적이다. ‘노무현의 남자’라는 꼬리표뿐이던 그가, 4년 재수 끝에 ‘젠틀 재인’으로 돌아왔다. 새로울 것 없는 인물, 새로울 것 없는 정책이지만 패자부활전은 화려하다. 누구도 견제가 불가능한 보수야당의 바람. 대한민국 진보세력이 다 모여 있다는 민주노총조차 피해가지 못했다. 이름 깨나 알려진 노동계 인사들이 보수야당 바람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이 조차도 전혀 새롭지 않다. 끝내주는 맛집이 아닌 이상, 개점 휴업중인 식당에서 마냥 음식을 기다릴 손님은 많지 않은 법. 누군가는 이를 ‘변절’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이를 ‘연대’라고 부른다.
‘젠틀 재인’의 노동자 군대
지난 3월 3일, CBS ‘정관용의 시사자키’가 주최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 이재명 성남시장이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에게 가시 돋친 질문을 던졌다. “노동조합이나 서민들이 아닌 4대기업 연구 소장부터 만나 ‘대기업 재벌이 한국경제의 견인차’라고 말씀 하셨죠? 서민 보다는 재벌 편향적인 친재벌 후보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문 전 대표의 대답은 이랬다. “재계 인사도 당연히 만납니다. 하지만 사회연대노동포럼이라는 노동자 포럼도 대규모로 결성해서 제가 참석해 노동정책을 충분히 밝혔습니다.”
문 전 대표가 자신 있게 내놓은 ‘사회연대노동포럼’은 민주노총 인사들이 주축이 된 조직이다. 민주노총 전, 현직 간부들이 조합원들을 조직해 결성한 단체이기도 하다. 문재인의 방패막이가 된 약 800명의 포럼 회원들은 여전히 민주노총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목표는 대선 국면에서 노동기초 복지국가에 동의하는 정치세력과의 정책 협약이다.
포럼이 출범한 시기는 지난 해 12월 10일. 그리고 올해 2월 18일 정책대회를 개최했다. 문재인 지지를 본격화 하는 자리였다. 출범식과 정책대회 모두 문재인 전 대표가 참석해 힘을 실었다. 이 자리에서 문 전 대표는 “강력한 지지의 뒷받침 없이 후보 혼자는 어렵다. 노동자들이 함께 해 주셔야 한다”며 “노동자들이 정권교체의 중심이 된다면 후보도 당도 더 당당하게 노동을 말할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사회연대노동포럼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내 좌파세력을 중심으로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노동운동 전, 현직 지도자들이 야권연대론을 확산시키는 이유는, 야권연대가 그들에게 ‘관직’을 주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포럼 측 관계자는 ‘과도한 해석’이라고 맞섰다. 포럼의 목적은 정치세력과의 정책협약일 뿐, 정당 가입이나 ‘관직’은 염두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포럼 출범 3개월 만인 지난 3월. 포럼의 문성현(전 민주노동당 대표) 상임대표와 백순환(전 금속연맹위원장) 공동운영위원장이 각각 문재인 캠프 ‘노동선대위원장’과 조직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포럼 관계자는 “(캠프행에 대한) 협의가 된 것이며, 문재인 캠프에 들어간 것이지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아니지 않나”라며 “(문 후보가 당선된다면) 사회민주주의 가치를 견인해 내기 위해 안에서 직접 참여를 하게 될 거다. 투쟁해서 되는 게 아니다. 자리가 있어야 노동자들을 위해 일을 할 것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재명도, 심상정도 아닌 왜 ‘문재인’일까. 이에 대해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이재명 보다 교감하는 측면이 있다”며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큰 후보와 다른 후보랑은 표면적으로 조금 다르지 않나”는 답변을 내놨다.
지도부의 문재인 캠프행으로, 포럼은 2기 체제를 맞이하게 됐다. 2기 공동대표로 선임된 인물은 임성규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최재호 전 사무금융연맹 위원장이다. 임성규 대표는 ‘사회연대노동포럼 동지들께’라는 글을 통해 “우리는 노동운동의 성장과 함께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모든 것을 쏟아왔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과연 치유와 재통합이 가능할까 우려될 만큼 분당 분열의 후유증과 상처, 남모를 아픔으로 점철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서 “박근혜 파면으로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국면이 만들어졌다. 안타깝게도 노동과 진보정치에게는 너무 좁고 짧은 공간이며 시간”이라고 덧붙였다.
이별 공식=“민주노총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
민주노총은 공식적인 비판 성명을 냈다. “민주노조와 민주노총을 버리고 양지를 찾고 싶으면 부끄러운 마음 안고 홀로 가라”고 선을 그었다. “더 민주당 유력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지만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총을 입에 담지 마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명이 처음은 아니다. 선거 시기 마다 민주노총은 보수야당으로 향하는 전현직 간부들에게 날을 세우며 작별 인사를 건네 왔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이수봉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등 민주노총 내 혁신연대 계열인 ‘노동정치연대포럼’이 안철수 캠프로 짐을 쌌다. 그들이 안 캠프를 선택한 표면적인 이유는 ‘정권교체를 위한 야권단일화와 새로운 진보세력 구축’이었다. 그 때도 민주노총은 성명을 발표하고 “그들의 행보는 정치공학에 익숙한 관료집단 특유의 입신양명일 뿐 민주노총과는 어떤 인연도 없다”며 선을 그었다. “자신들의 이름 석 자를 어디에 내걸 건 그들 자유지만, 바라건대 더 이상 노동운동과 민주노총의 이름을 빌어 행세하지 않길 바란다”는 경고도 비슷하다.
같은 해 3월,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도 입당서를 들고 민주당으로 향했다. 홀몸이 아닌, 조합원 1천 명의 입당서를 들고 왔노라 자랑스레 밝혔다. 입당식에는 이상범 전 현대자동차노조위원장, 박홍기 전 기아차노조위원장, 정상채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대공장 노조 간부 출신 인사들이 함께했다. 당시 민주노총은 ‘이석행 전 위원장은 김00 성폭행 관련으로 2009년 2월 위원장직을 스스로 사퇴한 이후 민주노총의 어떠한 직책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번 민주당 입당 역시 개인적인 정치적 판단일 뿐 민주노총과는 무관하다’는 짧은 브리핑을 내보냈다.
현재 이석행 전 위원장은 민주당 전국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15일 열린 전국노동위원회 출범식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가릴 것 없이 조직된 노동자들은 더불어민주당으로 함께하고 있다”며 “노동이 존중받는 세상, 노동의 가치가 인정받는 세상을 위해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극단적이고 충격적으로 ‘보수여당’에 몸을 실은 인사들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 대선 당시.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 747명이 이명박 지지 선언에 나섰다. 권영목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 정연수 당시 민주노총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고 권영목은 훗날 뉴라이트에서 활동하며 ‘민주노총 충격 보고서’라는 책도 썼다. 당시 민주노총은 성명을 통해 “이 보고서는 추잡한 글과 생각으로 가득한, 책이랄 수도 없는 종이쓰레기에 불과하다”며 “이런 찌라시를 만든 권영목은 민주노조운동을 저버린 변절자”라고 가감 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정연수 전 위원장은 이후 ‘국민노총’이라는 제3노총을 만들기도 했다.
안녕이라 말하지 마
사회연대노동포럼은 자신들의 활동이 과거 민주노총 인사들의 대선 캠프행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포럼 측 관계자는 “과거에는 노동포럼 같은 조직이 없었다. 상대방한테 맹목적으로 휩쓸리는 측면이 강했다”며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적 의제를 제시하고, 이를 공유하는 후보와 정책 협약을 맺는 거다. 휩쓸리는 것이 아닌 중장기적인 비전을 통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포럼은 문재인 캠프와 MOU를 체결했으며, 경선 이후 본협약을 체결한다는 계획이다.
포럼 측의 활동 방식은 분명 과거 노동 인사들의 캠프행과는 다른 지점이 있다. 과거 노동계 인사들이 짐을 싸 민주노총을 떠났다면, 최근에는 민주노총에 적을 둔 채 활동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양상은 민주노동당 분열 이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노총의 정치적 우경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민주노총이 20여 년간 추진해 왔던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목표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 전직 민주노총 간부는 “예전에는 소위 ‘배신’을 때리고 갔다면, 최근에는 민주노총에 머물며 활동을 하고 있어 노동자정치세력화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포럼은 민주노총이 이번 대선 전술로 준비했던 ‘민중독자후보’를 반대했던 세력 중 하나다. 집권 가능한 세력과 연대해 ‘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민주노총의 구호와 결별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주의정당을 견인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물적 토대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독자적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노동자정치세력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변절과 연대와 협약의 다른 점
민주노총은 성명까지 발표하며 이들과 선을 그었지만, 내부 분위기는 또 다르다. 내부 이견으로 ‘민중독자후보’ 전술이 좌초되면서, 민주노총은 특별한 전술 없이 대선을 치르게 됐다. 대신 대선 방침으로 보수야당과의 ‘정책협약’을 열어뒀다. 민주노총의 올해 대선 방침 중에는 ‘보수정당을 상대로 한 정책적 견인이 아닌, 조직적인 지지로 경도되는 것을 금지하고, 의제-투쟁을 중심으로 한 대선 대응사업의 성과가 이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틀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길고도 모호한 문장이 포함돼 있다. 간단히 말하면, 정책협약 등을 통한 정책 견인은 가능하지만, 조직적 지지는 금지한다는 말이다.
민주노총의 대선 방침이 나오기 전부터, 이미 공공운수노조는 보수 야당과의 정책 협의를 준비해 왔다. 진보정당 후보 및 보수정당의 당선 가능한 유력 후보 모두를 대상으로 정책협약 등을 추진한다는 별도의 대선 방침도 마련했다. 지난 3월 16일에는 이재명 후보와 정책 협약을 맺었고, 20일에는 한국노총 공공부문 노조와 공동으로 구성한 ‘양대노총 공공부문공대위’가 문재인 캠프와 MOU를 체결했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정당 대선 공약에 우리의 요구 내용을 담는 것이 목표이며,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까지 다 정책 협약 대상이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과는 맨 처음 협약을 맺었다”며 “공공부문의 경우 실질적 사용자가 정부고, 정부 정책이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정책협약을 맺어야 하는) 특수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공공운수노조는 지난 2012년 대선에서도 보수 야당과 정책 협약을 맺었다. 당시 공공운수노조 사회보험지부 전현직 간부들이 문재인 후보지지 선언에 나서기도 했다.
반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는 “협약을 맺으면 그 대가로 그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지 않나”며 “전교조가 제시하는 정책을 가지고 토론회는 열었지만, 협약은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공공운수노조 일각에서는 조직적인 보수야당 지지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 산하의 한 노조의 경우,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조직적인 경선 참여 및 세액공제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조직적인 경선 참여는 안 된다는 것이 노조의 방침이지만, 규제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지난 16일 열린 기자회견에 참여한 이영주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조합원 개인적인 활동을 통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발언했다.
10년 전, ‘적’이었던 세력이 ‘협약’의 대상으로 돌아왔다. “노무현 정부가 비정규직법 시행령을 국무회의에서 강행 통과시켜 스스로 비정규노동자의 적이 됐다. 비정규노동자를 수렁으로 몰아넣은 노무현 대통령은 퇴진 밖에 길이 없다.” 지난 2007년, 민주노총이 ‘노무현 퇴진운동’을 선언하며 발표한 성명의 내용이다[워커스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