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다솔·윤지연 기자
again 2002
Be The Reds! 티셔츠가 부끄럽지 않았던 2002년. 뜨거운 여름을 달궜던 붉은 악마의 열기는 겨울이 와도 식을 줄 몰랐다. 월드컵 때 미처 분출하지 못했던 애국심은 대선판에서 뜨겁게 타올랐으니. 이회창과 노무현의 박빙 승부는 마치 한국 대 스페인전의 승부차기 순간처럼 심장을 바운스하게 만들었다. 흰 와이셔츠를 입은 노무현 후보가 기타를 튕기며 ‘상록수’를 열창하는 선거영상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런 가운데 분노와 애통의 눈물도 거리에 차올랐으니. 미군 놈들이 들어와서 해방인줄 알았는데 미선이 효순이를 장갑차로 치어 사망케 한 것이었다. 여고생들의 허망한 죽음에 촛불이 타올랐고, 반미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미국 국기가 프린팅 된 ‘폴로’사의 니트를 입고 광화문을 활보하다 밟힐 뻔 했다는 사연도 전해졌다. 그동안 스테디셀러 템으로 사랑 받아왔던 미국 국기 무늬의 의복과 잡화들은 장롱 속으로 처박혔다. ‘미군 철수’와 ‘SOFA 개정’에 대한 요구가 확산됐다.
대망의 대통령 선거 전 날인 12월 17일 밤. 뜬금포 ‘단일화 파기’를 선언한 정몽준의 헛발질로 ‘노풍’이 몰아쳤다. 득표율 48.9%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 한국 최초의 ‘고졸’ 대통령. 민주화 운동과 인권변호사 딱지를 붙인 서민 대통령. 386세대는 “이제 세상이 바뀌었어!”라고 소리치며 기쁨의 눈물을 터뜨렸다.
기쁨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인 이듬해 1월 9일. 비보가 전해졌다. 부당해고에 맞서 투쟁해 온 두산중공업 배달호 노동자가 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두산이 해도 너무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재산 가압류, 급여 가압류, 노동조합 말살”이라는 피맺힌 한이 유서로 남았다. 정부는 무분별한 손배가압류가 남용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개혁 대통령’의 개혁을 기다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운송하역노조, 인천지하철, 굳모닝한주 등 3개 사업장에 손배 가압류가 들어왔고, 철도파업에 대해서는 정부가 직접 75억 원의 손배를 청구했다. 그 사이 화물연대 박상준 열사, 농민 이경해 열사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9월. 노무현 정부는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로드맵)을 추진했다. 무노동 무임금과 필수공익사업장 대체근로 허용, 노조전임자 임금 축소,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등 노조파괴 폭탄이었다. 10월에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열사가, 14일 뒤에는 곽재규 열사가 목숨을 잃었다. 두 열사의 장례식 다음날에는 이해남 세원테크지회장이 분신으로 사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다” 등의 강공 발언을 쏟아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계속 목숨을 잃었다. 박일수 현대중공업사내하청 노동자와 김춘봉 한진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 류기혁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그 와중에 정부는 파견법과 기간제법 등 비정규 악법을 추진했다. 2004년에는 이라크 파병으로 김선일 씨가 살해당했고, 2005년 겨울에는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경찰 폭력에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리고 28명이 사라졌다.
개혁대통령 시절, 열사가 된 노동자 농민의 숫자다.
one more time 2017
2012년,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 ‘노무현의 적통자’ 문재인의 대결은 보수 vs 진보로 규정돼 각 진영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대선 직전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내에 들 정도로 막판까지 선거 판세는 치열했다.
서로 비슷한 정책공약에 차별성을 찾지 못한 두 후보는 대중문화를 이용한 선전에 나섰다. 문재인은 당선되면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겠다고 했다. 박근혜는 카카오톡 본사를 방문해 당시 ‘국민 게임’이었던 애니팡을 직접 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약 2%의 차이로 문재인의 패배.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은 ‘보수의 결집력이 우수했다’며 아쉬워했다.
박근혜 정부 기간, 그는 나름 노동자 시민 편을 자처했다.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자 “대화와 타협이 먼저여야지, 공권력이 먼저여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과거 신상 털림 뿐. 2003년 철도 파업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그가 “철도파업은 대화와 타협의 여지가 없다”며 조기에 공권력을 투입했던 흑역사만 밝혀지고 말았다.
2015년 12월에는 “비정규직이 사상 최대라는 통계를 볼 때, 소득 양극화가 더 심각해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늙은 농민이 물대포로 공격받아 쓰러지는 모습을 볼 때 참여 정부를 돌아봤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리웠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노무현 정권 시절 ‘비정규직 악법’인 기간제법과 파견법을 주도했던 흑역사를 깜박하곤 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 2명의 농민이 경찰의 방패에 맞아 사망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2017년, 그가 다시 대권에 도전한다. 확실히 4년 전과는 다른 ‘원톱’ 후보가 돼 돌아왔다. 문재인 지지자들의 주관적 이념은 진보에 가깝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스로 진보이념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은 문재인과 이재명을 강하게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문재인은 ‘진보’라는 딱지가 영 부담스러운 눈치다. 지난 19일 부산 선대위 관련 기자회견에서 “4차 혁명시대에 진보, 보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것도 대한민국을 더 진보, 더 보수로 만들라는 이념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더불어 민주당 대표 시절엔 “진보정당 노선에 동의할 수 없다”고도 밝혔다.
그러다보니 문재인은 사사건건 진보적 의제들과 부딪히곤 한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사드 배치 문제를 차기 정부로 넘기면 외교적 카드로 사용할 수 있다”며 기존 반대 입장을 슬그머니 철회했다. 장애인들이 요구하는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해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뚱딴지 같은 대답을 내놨다. 노동계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는 최저임금 1만원 역시 현실론을 내세우며 반대하고 있다.
문재인 후보에게 ‘진보’라는 수식어의 유효기간은 진작 끝났다. 하지만 걱정 없다. 그의 빈 공간을 진보진영 인사들이 채워주고 있으니. 문재인의 말마따나 이제 고루한 단어가 돼 버린 진보. 과연 ‘진보’의 의미는 누구의 손에서 퇴색 돼 갔을까[워커스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