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다(페미니스트)
“외출하면 물을 조금만 마셔. 화장실 가는 횟수를 줄이려고.” 처음 이 말을 들은 건, 10년 전 중증장애가 있는 동료로부터였다.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장애인 화장실이 지금보다 귀하던 시절이다. 그는 ‘장애인은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으라는 뜻’이라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다. 최근엔, 비장애 여성들로부터 외출하면 물을 조금만 마신다는 말을 한 번씩 듣는다. 직장, 학교, 지하철 화장실에 있을지 모르는 몰카 때문이다. 나사못과 같이 생긴 몰카, 쓰레기통 틈새의 몰카 등은 피할 재간이 없다. 이렇게 많은 몰카의 의미는 여성은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으라는 뜻일까?
인터넷에 ‘화장실 몰카’라고 치면 수많은 동영상이 뜨고, 여성의 속옷, 성기, 얼굴이 다 찍힌 ‘베스트영상’도 흔하다. 어떤 이들은 자신도 찍힌 게 아닐까 싶어 몰카 영상을 열심히 검색하지만, 발견한다 한들 방법도 없다. 아는 게 약인지, 병인지 혼란스러워진다. 거리에서 가슴이나 다리가 몰카에 찍힌 건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한숨조차 쉬기 싫다. 누가 이런 걸 찍나 싶지만, 몰카범들은 ‘평범한’ 공무원, 학생, 의사들이다. 공통점은 그들은 남성이라는 것, 그리고 그 몰카에 찍히는 건 불특정 다수의 여성이라는 점이다. 시선의 비대칭성이 명확하다. 도대체 화장실에서 오줌 누는 모습, 걸어가는 이의 다리를 몰래 찍고 보는 행위를 왜 하는 거냐고 한심해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 관계가 가시적으로 명확한 군대사회. 취침 전 점호 받는 이들은 줄지어 정면을 본다. 오직 상관만이 자유로운 시선으로 그들의 몸과 사물함 등 모든 걸 조망할 수 있다. 군대는 매순간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뉜다. 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일방적으로 보여지는 사람. 점호, 얼차려 시간의 시선 제한은 우연이 아니다. 시선 제한이 기선제압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통제한다는 것, 보여지는 사람은 주체성이 휘발된다.
화장실 몰카가 욕망하는 건 여성을 통제한다는 쾌감일까. 여성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지우고 사물화하는 쾌감. 언제든 너희의 벗은 몸을 볼 수 있고, 인터넷에 전시할 수 있으며, 사이트에서 거래도 한단다! 그들은 여성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위안’을 얻을까. 니네가 아무리 떠들고 설쳐봤자, 여성이야 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은 걸까. 남성의 권리가 약화됐다고 믿는 이들이 화장실 몰카를 보며 ‘숨통’을 트는 것일까.
# 누구의 시선에 공감하고 있나?
상당수의 여성은 화장실과 거리의 몰카로 숨 막혀 하지만, 대부분 몰카범은 가벼운 처벌만 받는다(약 70%가 100-300만원의 벌금형, 한국여성변호사회). 몰카범 판결을 살펴보면 결혼을 앞둬서 선고유예 받고, 공무원이라서 집행유예 받는다. 100회 넘게 몰카를 찍고 게시했지만 의사라는 직업의 사회생활을 염려해 신상공개에서 제외된다. 몰카범죄를 누구의 ‘시선’으로 보는지 생각하게 한다.
여성들은 몰카 촬영이 명백한 범죄라며 안전할 권리를 주장하는데, 재판부는 가해남성의 호기심이었다는 말에 공감해주고, 초범이라며 남성의 직장생활을 걱정해 준다. 여성의 고통, 불안은 고려되지 않는다(사물은 느낌이 없다!). 이는 몰카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성범죄에서 잘 드러난다. 피해자는 강간이라는데, 가해자가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을 신뢰해주고, 술을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에 공감하며 성폭력을 선처해준다(40대 연예기획사 대표의 15세 청소녀 강간으로 인한 임신사건 무죄판결, 40대 남성이 애인의 딸을 감금 및 성폭력한 사건 집행유예 판결 등).
가정폭력을 신고해도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개입하기를 주저하는 공권력은 사생활의 극단인 화장실 용변 보는 모습에 대한 몰카범죄 앞에선 그 ‘사생활 보호’를 외면한다. 강력한 처벌이 능사라는 게 아니라, 공권력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게 누구의 어떤 권리인지 선명히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은 비정규직과 아웃소싱에 대해 고용불안정이라며 생존권 보장을 호소하는데, 재판부는 노동유연화라며 기업주의 ‘시선’으로 사건을 보는 것처럼. 물론 이는 재판부의 일방적 문제가 아니다. 재판부는 사회의 반영이다.
# 공포, 투쟁 그리고 당신
화장실 몰카, 여성살해(femicide) 현실은 여성에게 공포심을 조장한다. 누군가는 미세먼지 공포 때문에 마스크 쓸 때, 누군가는 몰카를 피할 수 없으니 얼굴이라도 가려야 한다며 화장실 갈 때 마스크를 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살해를 멈추라는 시위에 참여하며, 신상 털리고 마녀사냥 당할까봐 광장에서 마스크를 쓴다. 공포의 목표가 통제라고 했을 때, 목표를 상당히 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 자신의 고통이 개인의 불운이 아님을 알게 됐고, ‘기울어진 운동장’이 비로소 명징하게 보인다며,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각성을 하게 됐다는 이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두려움은 용기가 돼 돌아왔다며, 새롭고 오래된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의 낯선 손을 잡고 온오프 광장에 집결하고 있다. 우리를 공포로 통제하는 그 시선을 걷어차고, 메두사의 머리로 반사할 수 있는 물결을 만들자는 다양한 목소리가 광장에서 들려온다.
한국사에서 어느 때보다 뜨거운 페미니즘 물결 속에서 혹시, 아직도 스스로 질문하지 못한 이들이 있을까. 자신은 누구의 어떤 ‘시선’에 공감하고 있는가? 그리고 광장의 목소리에 당신은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워커스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