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훈(객원기자)
1.
언제였더라. 한창 ‘썸’을 타던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다. 어쩐지 80년대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땐 눈에 콩깍지가 씌인 탓인지 ‘참 우아한 휴일을 보내는구나’하고 생각했다. 며칠 전에 음악을 틀어놓고 책장 청소를 하다 만화책을 한권 집어 들고 먼지구덩이 위에 벌러덩 누워 낄낄거리고 있는데 ‘굳이 솔직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있다”고 대답하다 문득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녀는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혹은 ‘정말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있었을까?’
2.
어느 카페에 앉아 있는데 음악 선곡이 너무 대중없었다. ‘다양한 스펙트럼’이라고 말하기엔 나오는 음악들이 너무 조야했고, 카페의 컨셉으로 이해하기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손님들의 취향에 맞춘 것이라기 여기기엔 손님은 내 일행들뿐이었고. 도대체 뭘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친구가 너무 손쉽게 답을 알려줬다. “멜론 인기차트 100”. 이런 빨간 맛.
3.
살며 가장 어이가 없었던 때는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동영상을 영화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투덜거리고 있는데 눈물 콧물을 다 뺀 일행들이 내게 “재수없다”고 말했다.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한다느니, 어설프게 평론가인 척을 한다느니, 천만이 넘는 사람들을 다 바보로 여긴다느니, 영화를 판단하는 다양한 기준이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다 듣고 나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건, ‘이게 정말 재미있어?’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천만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만든 감독이다. 그의 다른 천만관객 영화도 영화라고 부르긴 어렵다.)
얼마 전에 ‘힙스터 체크리스트’가 세간에 떠돌았다.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무라카미 하루키와 찰스 부코스키를 읽고, 강원도 양양에서 서핑을 즐기거나 대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야 힙스터다. 사람들은 경리단이나 해방촌 같은 ‘힙한 동네’에 몰려들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케아에서 가구를 사고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아다니고 ‘평양냉면’과 ‘알리오 올리오’를 먹는다. 냉면에 가위질을 하면 안 된다고 면장질을 하는 것도 잊어선 안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힙스터 체크리스트 같은 건 사실 언어도단이다. 힙스터의 본질은 ‘구분짓기’에 있다. 독보적이고 독특한 취향으로 자기를 타인과 구분짓는 것, 그러니까 자아와 주체의 확립이 힙스터의 의미라면 “이래야 힙스터”라는 힙스터 판독기에 편입되는 순간 그는 이미 힙스터가 아니다.
따져보면 사실 한국에 ‘취향’ 같은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모두가 똑같이 머리를 빡빡 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강요받으며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노래를 들으며 똑같은 독재자를 찬양하며 사는 나라에 취향같은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취향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명확히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학교 현관엔 현관문보다 큰 글씨로 단결과 통일이라고 적힌 액자가 붙어 있었다. 폭력과 야만의 시대였다. 그걸 민주화라고 불러야하나, 아무튼 겨우겨우 대통령 욕을 해도 잡혀가지 않는 시절이 왔을 때 ‘똘레랑스’란 말이 유행했다. 교과서에도 상대주의니 다양성이니 하는 말이 등장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같은 표어도 그때쯤 나왔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양’과 ‘취향’을 책으로 배운 탓일까. 사람들은 ‘단결’과 ‘통일’이 있던 자리에 ‘취향’과 ‘다양’을 채워놓고 똑같이 굴기 시작했다. 힙스터가 되기 위한 방법마저 남과 같아야 하는 세상이라니. 자아와 주체는 여전히 삭제돼 있다. 다름을 허용치 않던 폭력이 ‘다름’을 강변하는 야만으로 둔갑했다. 역시 마찬가지로 ‘타자성’에 대한 혐오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얼굴을 볼 수나 있을까.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언어생활에서 ‘다름’과 ‘틀림’을 도무지 구분하지 못한다.) 모두 똑같은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 한국사회엔 여전히 취향이 없다. 용산구와 마포구에만 힙스터 체크리스트에 충족하는 힙스터가 수만 명은 될 거다. 자기의 얼굴이 없는 몰취향의 고장.
몰취향은 위험하다. 자기의 얼굴을 모르는 달걀귀신들만이 횡행하는 세계와 같다. 세계를 단조롭게 만들고 서로를 외면하다 결국 혐오하게 한다. 심지어 몰취향을 취향이라고 인식하게 하는 알리바이마저 주어진다면 (혹은 스스로 획득한다면) 개선의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지금은 총체적 난국이다. 몰취향의 가짜 힙스터들이 몰린 자리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고 가난한 자영업자들은 쫓겨난다. “호모를 싫어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라는 말이 혐오를 정당화 한다. ‘취향’의 외피를 뒤집어 쓴 ‘몰취향’은 마침내 반지성주의를 잉태한다.
곧 타인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그건 틀렸어”라는 지적에 그것이 무엇이든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고 대답해버리면 그만이다. 지적 사유와 갈등과 토론과 쟁명이 사라진다. 자기 존재의 역능을 통해 타자의 얼굴을 보기보단 대화를 포기하고 타자를 외면하고 혐오해버린다. 그걸 타자성의 인정이라고 우긴다. (결과적으로 <국제시장>이나 <해운대>가 천만관객을 돌파한다.)
다시, 그 시절 내 썸녀는 정말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었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건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 고상한 취향을 드러내고 전시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 ‘조악한 욕망’에 홀랑 넘어가 눈에 하트를 그린 내 유치한 마음이다. 멜론 인기차트 100을 틀어놓고 기계적으로 커피를 내려주던 그 카페의 알바는 귀갓길에 어떤 음악을 들을까? <국제시장>의 감독은 다음 영화에서 또 천만관객을 넘길 수 있을까? 경리단 오르막길, 힙스터의 언덕은 자기들만을 고립시킨 몰취향의 달걀귀신들이 모인 고원은 아닐까.[워커스 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