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후 |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다
이 나라 헌법은 파업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제33조 1항).” ‘근로자’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 항목에서 파업은 단체행동의 일환으로 인정되죠.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제약하거나 악화시키는 요소들은 다양합니다. 박근혜의 노동개악처럼 정부 정책일 수도 있고, 파견법이나 정리해고제처럼 정권을 뛰어넘는 법제도 혹은 사회구조의 문제일 수도 있고, 비용을 줄여 더 많은 이윤을 확보하려는 기업의 행태가 문제일 수도 있죠. 파업권은 이런 것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권리입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도대체 파업은 언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임금이나 노동조건 문제로 파업하면 밥그릇 챙기기라고 욕하고,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은 정치 파업이라며 불법이라고 합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귀족노조라고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미친놈들’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민간부문 파업은 경제를 망치고, 공공부문 파업은 국민을 볼모로 잡는다고 합니다. 쟁의행위 절차를 다 지켜도 불법, 안 지키면 그냥 불법파업 딱지를 붙입니다.
민주노총의 6.30 사회적 총파업에 대해 보수언론과 정부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공격이 있었습니다. 파업은 결국 노동자의 삶과 권리를 위협하는 다양한 요소들, 예컨대 앞서 언급했던 기업의 이윤이나 정부 정책에 맞서 타격을 가하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편하지 않다면 파업은 존재 이유가 없으니까요. 파업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불편함과 삶의 권리 그 사이에 있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어디쯤에 있을까요.
A 타입 : 파업은 미친 짓이다 (feat. 이언주)
지난 대선을 경과하면서 정치권은 이제 아무말 대잔치를 넘어 막말 대잔치를 벌이는 듯합니다. 최근에는 홍준표의 뒤를 이어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이 바통을 이어받아 그 선봉에 섰죠. 국민의당으로서는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하고 싶겠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내뱉은’ 말의 성질과 수준이 상당히 악질적입니다. 파업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가리켜 ‘미친 놈들’이라 하고 학교 급식 조리사들을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고 하는 등 원색적인 막말을 쏟아냈죠. 사태가 언론을 타고 일파만파 커지자 이언주 의원은 ‘사적 대화가 보도되어 유감’이라고 했는데요. 공식 석상에서 꺼내기에는 스스로도 천박한 수준의 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막말이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라 노동자를 바라보는 자신의 진짜 속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준 셈입니다.
사실 정치인이 이런 막말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파업한다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드는 각종 경제지와 언론들을 봐도 알 수 있죠. 밥 하는 아줌마, 볼트 조이는 아저씨, 타자기 두드리는 아가씨, 커피 타는 청년. 그들의 눈에, 노동자는 그저 하잘 것 없는 개인들이고 감히 주인에게 대들어선 안 될 노예들일 뿐이겠지요.
B 타입 : 이니 발목 잡지 마
2008년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많은 집회참가자들은 “깃발 내려!”라고 소리쳤습니다. 집회현장에서 노조 조끼를 입고 있는 것조차 논란이 될 때였죠. 반면 8년이 지난 2016년, 다시 열린 광장에서 그 누구도 민주노총 깃발과 노조 조끼에 대해 소리 높여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상황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모든 노동자의 노조 할 권리. 박근혜 정부 때에도 절절하게 외쳤던 요구입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이 슬로건을 걸고 사회적 총파업에 나서자 현 정부의 지지자들로부터 ‘적폐세력’, ‘귀족노조’라는 온갖 공격이 쏟아졌죠. 노무현 정부에서도 노동계가 발목을 잡았다며 트라우마처럼 얘기합니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 정부가 파견법 개악으로 비정규직을 전면 확대했던 것, 죽음으로 저항한 노동자들에게 ‘분신으로 항거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비웃었던 사실은 쉽사리 잊힌 듯합니다.
노동자들은 어떤 정부에서도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뿐만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도 노동자들을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든 상황은 같았거나 더 심했으니까요. 박근혜 정부에서는 조용하더니 새 정부가 들어서자 난리를 치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건 항상 거리에서 싸우고 있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그동안 듣고 있지 않았던 걸지도 모릅니다.
C 타입 : 귀족노조는 적폐
대기업노조를 사회악으로 여기는 풍조는 이제 완연히 자리매김한 듯합니다. 재벌이나 기업주, 사회 고위층 같은 기득권으로 묶이기 십상이고, 하다못해 결혼정보업체에서는 대기업 정규직이 전문직에 버금가는 결혼대상 상위권에 위치한다고도 하죠. 불과 30년 전만 해도 공장 앞에서 두발 단속으로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리고, 노조 자체가 금기시되며, 중소기업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낮은 임금을 받던 ‘공돌이’들. 이들이 오늘날 마치 다른 신분인 것처럼 ‘대기업 정규직’으로 불리는 배경에는 정권이나 재벌의 ‘선의’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만들어 온 투쟁의 역사가 있습니다.
지금 대기업노조가 ‘귀족노조’로 욕을 먹는 데에는 노조 스스로의 책임도 있습니다. 당장 같은 현장에서 비정규직이 부지기수로 늘어나는데, 그들과 연대하기보다는 회사와 적당히 타협할 때가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다단계 하청 같은 복잡한 비정규직 구조와 저임금 일자리를 양산한 정권과 기업들을 놔두고 대기업노조를 불평등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게 합당한 걸까요? 대기업노조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는 건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지만 대기업노조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규직이 기득권이라는 말 뒤에는, 정규직 자체를 점점 없애고자 하는 ‘빅 픽쳐’ 혹은 오래된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음모론인 것 같다고요? 지금 한국경제신문을 한 번 펼쳐보십시오.
D 타입 : 공공부문 파업은 안 된다
공공부문은 90년대 이후 모든 정부에서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공공부문에서 수만 명을 해고하며 개혁의 성과라고 자찬하기도 했죠. 각종 외주화와 수익성 중심의 성과평가로 공공부문은 20년간 훼손됐습니다. 그러면서 민영화와 위험의 외주화 문제가 나타났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공공부문에 대해 수익성이나 효율성보다는 안전과 안정성을 조금씩, 점점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등 충격적인 안전사고들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전면적인 민영화에 맞선 공공부문 노동자들, 특히 철도노동자들의 계속된 파업이 ‘민영화는 해로운 것’이라는 여론을 형성한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다른 파업에 비해서도 여론이 우호적인 때가 많죠. 민영화에 맞선 계속된 파업은 정부가 ‘민영화’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비용절감과 인력감축 속에 철도노동자들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들은 최근까지도 계속 들려옵니다. 공무원과 교사 노동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강요받으며 노조 자체를 부정당하죠. 정부와 국가 자체가 정치적인 것인데, 그에 복종하면 ‘정치적 중립’이고 저항하면 ‘(불온하게) 정치적’인 걸까요? 무너지는 공공부문을 그나마 지탱하려 했던 것은 낙하산 관피아들이 아니라 ‘불온하게 정치적인’ 노동자들의 저항이었습니다.
E 타입 : 정치파업은 불법
보수언론과 좌파 모두 ‘정치파업’이라는 말을 즐겨 씁니다. 물론 사용하는 의미는 정반대죠. 보수언론은 정치파업이 불법이라고 몰고 가고, 좌파는 정치파업을 해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쨌건 조합원의 임금이나 노동조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일로 파업하는 걸 대개 정치파업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파업 같은 것 말이죠.
그런데 이 구분이 상당히 모호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은 성과연봉제-퇴출제 저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들의 임금, 고용과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당시 검찰, 경찰을 비롯해 정부기관들도 불법파업이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박근혜 정부와 특히 철도공사는 불법 정치파업이라고 열을 올렸죠. 철도공사는 파업 당시 노동자들이 ‘박근혜 퇴진’을 주장했기 때문에 불법 정치파업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파업은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걸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이룩한 부와 가치를 어떻게 배분하느냐, 바로 정치의 핵심문제입니다. 노동자는 바로 이 배분의 당사자이기도 하죠. 합법과 불법을 따지기 전에, 파업은 임금 문제이건 ‘정치적’ 문제이건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F 타입 : 총파업이 세상을 바꾼다
당신은 총파업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사람입니다. 정부도 국회도 믿을 것 없고, 세상을 바꾸는 파업을 기대하죠. 이번 6.30 사회적 총파업은 당신에게 조금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총파업’의 위상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상당수 대규모 노조들이 파업까지 나서지 않았고, 그마저 하루 파업을 넘어서지 않았으니까요.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당하고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나오는 잇따른 개혁 제스처에 노조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게 답답하고, 심지어 화가 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부디, 실망하더라도 좌절하지 마시길. 하루아침에 갑자기 모든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는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꿈 같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문재인 정부가 이상적인 정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죠. 파견법은 건드리지 않은 채 이름만 바꾼 ‘정규직화’, 임금체계를 또다시 불안정하게 만들 직무급제 등. 물론, 불만이 생긴다고 곧바로 투쟁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현 정부에 실망하면 사람들은 다시 다른 보수정당에게 정권을 넘겨줄지도 모르죠. 그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지 않도록 다시 싸움을 준비하는 일. 세상 바꾸는 게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긴, 그게 쉬웠다면 세상은 1년에도 몇 번씩 뒤집어졌겠죠.
G 타입 : 파업이 뭐가 나빠
파업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노동자의 권리라고 굳게 믿는 당신은 이미 노조에 소속된 조합원이거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진보적 시민일 수도 있습니다.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이건,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파업이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파업이건 간에 당신은 파업할 권리를 가진 노동자가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헌법이 보장한 권리이기 때문이죠.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게 민주사회의 당연한 원리이고 때로는 보수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믿을지도 모릅니다. 파업이 질서를 위협하고 혼란을 가중시킨다는 보수세력의 공격에 맞서 파업의 합법성을 강조하고 싶을 때가 많을 겁니다.
파업을 지지하고 응원하면서도, 파업으로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당신. 하지만 파업의 역사는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낸 역사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파업이라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지만, 헌법에 파업권을 써넣은 것 역시 파업이 만들어낸 결과였지요. 불법의 족쇄에 시달리면서도 악법은 어겨서 깨뜨려왔던 파업. 법이 노동자를 옥죄고 있다면, 그 법과 맞서는 것 역시 파업의 당연한 역할일 겁니다. “파업이 뭐가 나빠”라는 생각 앞에, 조금 더 과감하게, 이런 말을 달아보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요. “불법이면 뭐 어때!”
H 타입 : 아이고 의미없다
무턱대고 파업을 비난하지도, 그렇다고 파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당신. 노조나 파업이 심적으로 불편하고 별로 존중하고 싶지도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굳이 욕을 보태고 싶지도 않은 당신. 당신은 어쩌면 노조가 없는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 나라 대다수의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조도 파업도 다 부질없고 의미없는 일, 거기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하루라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이라도 더 벌고, 소소하더라도 더 즐겁게 남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조를 만들고 파업에 나서는 건 분명 용기, 때로는 비상한 결의가 필요한 일입니다. 파업을 한다고 항상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죠. 오히려 패배로 끝날 때도 많습니다. 그 노동자 대부분은 소소하게 사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소소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 삶을 파괴당하고 내몰리게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힘든 싸움에 나서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머리띠를 동여매고 팔뚝질을 하는 노동자들의 곁을 지날 때, 문득 드는 불편함과 함께 이런 생각도 해보면 좋겠습니다. 이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방식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나섰다는 걸.[워커스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