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전 민주노총 비정규실장)
현대자동차 정규직 엄길정(46) 씨는 노조 임원을 맡은 적이 없다. 대의원 몇 차례와 1공장 사업부 대표가 엄 씨의 노조활동 전부다. 그런 엄 씨는 회사의 고소고발과 손배 소송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9월 11일 아침, 빗속에 찾아간 현대차 울산공장 정문 앞 사무실엔 엄 씨 혼자였다. 앉자마자 그는 7장짜리 서류를 내밀었다. 현대차가 지난 2월 14일자로 만든 <민.형사 소송 진행 현황>이었다. 노사 소송이 얼마나 복잡했으면 이렇게 서류로 정리했을까.
서류엔 2010년 11월 CTS 점거파업 이후 7년간의 소송내역이 빼곡했다. 울산과 아산, 전주공장의 정규직과 사내하청을 망라했다.
형사 소송은 울산 8건, 전주 2건 등 10건이었다. 민사도 정규직 7건, 하청 3건 등 10건이었다.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액만 130억500만 원이었다. 손배 소송은 정규직 관련 8건, 하청(정규직화 투쟁) 관련 7건이었다. 엄 씨는 손배 소송 중 정규직 관련 소송엔 2건만 등장하지만, 하청노동자 관련 소송엔 5건이나 피고로 등장한다. 또 형사소송 10건 중 3건에 피고소인으로 등장한다. 노조 지부장과 사무국장도 2번씩 만 등장하는데.
2만5천 명 중 4명, 0.016%…‘원하청 연대’의 바로미터
현대차는 2010년 11~12월 사내하청노조의 울산1공장 CTS(도어 탈착) 라인점거 파업 때 손해를 29명의 노동자에게 물었다. 7년여 소송 끝에 현대차는 정규직으로 신규채용한 하청노조원 24명에겐 소를 취하해줬다. 물론 이들이 현대차를 상대로 제기한 불법파견(근로자지위확인) 소송 취하와 맞바꾸는 조건으로. 2심 법원은 지난 8월 24일, 남은 5명 가운데 1명을 빼고 4명에게 20억원을 물어주라고 판결했다.
2010년 당시 엄 씨와 최병승, 김형기, 박점규 이렇게 4명은 서로 다른 처지였다. 최 씨와 김 씨는 점거파업의 주체였던 현대차비정규직지회(비지회) 조합원이었다. 박 씨는 금속노조 중앙간부였다. 엄 씨는 현대차 정규직이었다.
현대차 울산공장엔 엄 씨 같은 정규직만 2만5천여 명이 일한다. 그들 중 2010년 겨울의 점거로 지금까지 회사의 손배 소송을 떠안은 정규직은 엄 씨와 박성락, 김철환 등 4명이다. ‘2만5천 분의 4’, 비율로 0.016%다. 이 숫자가 ‘원하청 연대’의 바로미터다.
상고를 포기하려던 엄 씨는 법률단체의 모금으로 인지대 1,500만 원을 마련했다. 엄 씨는 모금 소식을 접하고 “동양시멘트나 울산과학대 같은 작은 비정규직 사업장이 손배로 더 고통받는데 대공장인 우리가 하는 게 맞느냐”며 거부했다. 그러나 손배의 부당함을 알리는 계기를 만들자는 동료의 지적에 수긍했다.
[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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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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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의 길고 길었던 겨울
2010년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25일간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벌어진 점거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전후무후하다. 정규직이 아닌 하청노동자가 원청의 공장을 한 달 가까이 세웠으니.
점거 넉 달 전인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자 최병승이 현대차를 상대로 한 근로자 지위확인소송에서 최씨의 손을 들어줬다. 회사의 탄압과 재정 비리로 지리멸렬했던 비지회엔 판결 직후 정규직을 기대하고 신규가입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대법원이 내민 종이 쪼가리에 놀라 1만여 생산직 사내하청을 냉큼 정규직으로 바꿔줄 현대차가 아니었다. 비지회도 이 사실을 알았다. 라인을 멈춰 세우는 직접타격만이 재계 2위의 현대기아차그룹을 움직일 유일한 수단이었다.
비지회와 현대차는 라인 점거파업을 놓고 샅바 싸움에 들어갔다. 어디를 잡을지가 관건이었다. 처음엔 시트사업부가 떠올랐다. 시트2부 태성산업이 2010년 9월 말 폐업을 공고했다. 회사가 먼저 찔러 본 거다. 2006년에도 하청노동자들이 싸웠던 시트2부는 격하게 저항해 폐업공고를 철회시켰다. 그러자 시트1부 신생기업인 동성기업으로 타깃을 바꿨다. 회사는 2010년 11월 15일 시트1부 동성기업을 폐업하고 거기서 일하던 비지회 노조원에게 새 업체와 다시 근로계약서를 쓰라고 했다. 그러나 대법원이 불법파견까지 인정한 마당에 하청 사장과 계약할 순 없었다. 자연스레 디-데이는 동성기업이 폐업하는 11월 15일이 됐다.
현대차는 점거파업 사흘 전부터 시트1부 앞에 문을 새로 설치하고 시트1부 공장 담벼락을 일부 허물어 오토밸리로 쪽으로 새 출입문을 냈다. 점거를 막고, 납품차량의 통로 확보를 위해서였다. 비지회는 동성기업이 계약해지되는 11월 15일 새벽 5시30분부터 시트1부 안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회사도 시트사업부로 집결해 추가 진입을 막았다. 안에선 경비용역들이 소화기를 뿌리며 라인을 점거한 하청노동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회사는 1시간 정도 멈췄던 시트1부를 미리 준비한 알바를 투입해 정상가동했다.
시트1부를 점거했던 하청노동자들이 끌려나오면서 점거는 끝나는 듯했다. 현대차는 시트사업부만 막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비지회는 15일 낮 1시 신형 엑센트를 만드는 1,2공장을 기습점거해 다시 라인을 세웠다. 1,2공장 라인이 15일 오후 내내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하청노동자들은 1공장에서 알바생과 관리자들을 밀어내고 CTS(도어 탈착) 공정을 완전히 점거했다. 여기선 15일 오후 내내 빈 컨베이어만 돌았다. 비지회는 15일 야간조도 파업에 들어가 밤 9시쯤 주간조가 확보한 1공장 CTS 공정 진입에 성공했다. 이렇게 25일간의 긴 점거파업이 시작됐다.
빵을 쟁취하기 위한 점거파업에서 최대 관건은 ‘빵’이다. 비지회는 점거가 시작된 15일 저녁 간신히 김밥 500줄에 빵 50만원 어치를 농성장에 넣었지만 1천여 농성자에겐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1공장 정규직이 등장한다. 야식으로 나온 빵과 캐비닛에 넣어둔 라면을 꺼내 전했다. CTS 공정 입구를 막은 경비용역들은 밥과 물을 넣으려는 비지회 간부들을 폭행했다. 당시 엄길정 씨는 1공장 대의원이었다.
7전 8기, 불굴의 투지로 지부장이 된 온건파 이경훈 집행부는 머뭇거렸다. 엄 씨 같은 1공장 정규직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정규직 1천여 명이 16일 낮 12시부터 비정규직이 점거한 CTS 안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 만한 지원군이 또 있을까.
하청노동자들이 15일 하루 동안 시트사업부에서 1,2공장으로 갔다가 결국엔 1공장 CTS 공정을 점거한 건 본능이었다. 하청노동자들은 2003년 노조결성 이후 10여 년 동안 정규직노조 간부들이 늘 8부 능선까진 함께 가다가 돌아서는 걸 수없이 봤다. 그나마 1공장은 그들에게 비빌 언덕이었다.
연대의 ‘화수분(河水盆)’이 된 1공장
이런 이유로 현대차 울산 1공장은 보수언론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2013년 봄 불완전한 주간연속2교대제에 문제제기하며 현대차 정규직들이 석 달 가까이 휴일특근을 거부할 때 울산지역 한 일간지는 “특히 강성으로 꼽히는 1공장의 경우 주말특근 임금보전안에 반발하며 본관과 노조 사무실 앞에서 특근 거부를 외치며 수백 개의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고 썼다. 그들 눈에 1공장은 ‘특히 강성’이었다.
현대차는 계란을 던진 엄 씨 등 2명의 정규직에게 3억원의 손배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2심까지 회사가 이겼고, 패소한 두 사람은 인지대도 없어 상고를 포기했다. 이때 엄 씨는 노조의 1공장 사업부 대표였다.
엄 씨는 “주간연속2교대제 세부협상은 현대차 정규직만이 아니라 사내하청과 바깥의 2,3차 협력사까지 10만여 명의 근로조건을 좌우하기에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엄 씨 등의 문제제기로 현대차는 12주 연속 주말특근을 못했다. 회사는 속이 탔다.
불똥은 다른 데로 튀었다. 특근 거부가 길어지자 퇴직을 앞둔 선배 노동자들이 엄 씨에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퇴직금은 퇴직 직전 3개월치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 주말특근을 못해 줄어든 월급으로 계산하면 수천만 원의 퇴직금을 손해 본다. “그 때 한 300~400명은 만난 것 같아요. 퇴직예정 선배들과 조·반장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떤 분은 ‘회사에서 가라고 해서 왔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었어요. 대부분 사안의 중요성과 파급효과를 설명하면 수긍하고 가시더라구요.”
엄 씨에게 울산1공장이 왜 이렇게 주목 받느냐고 물었더니 “끊임없이 젊은 노동자를 발굴해서”라고 했다. 엄 씨도 1공장 사업부 대표를 맡았을 때 갓 마흔을 넘겼다. 1공장 젊은 노동운동가 상당수가 하청 경험이 있어, 그만큼 정서적 교감이 자연스럽다.
불파 투쟁 뒤에 남은 숙제
엄 씨는 1996년 3월에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강원도 영월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엄 씨는 누나가 사는 울산에 와 SK 계열사에 1년 반쯤 다니다가 현대차에 들어왔다. 엄 씨는 IMF 태풍 뒤 정규직이 일하던 자리에 속속 비정규직이 채워지는 걸 봤다. 2015년 설 연휴 코앞에 해고된 엄 씨는 그해 7월 울산1공장 안에서 일어난 장비추락 사고 처리과정에서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된다. 엄 씨가 구속되자 열흘쯤 뒤 한국경제신문은 “엄 모 씨(44)는 해고자 신분인데도 지난 7월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무게 100㎏ 정도의 장비가 추락하자 안전사고가 났다며 10일간 일부 생산라인 가동을 멈춘 혐의(업무방해 등)로 최근 구속됐다”고 썼다. 이 기사 제목은 <1,118억 피해 입힌 노조원들의 ‘안전사고 조작극’>이었다. 석 달 뒤 엄 씨가 보석석방됐을 때도 현대차는 사보에 한국경제 기사를 다시 인용해 실었다. 얼마나 미웠으면.
2015년 7월 3일 낮 12시30분께 현대차 울산1공장에서 엔진을 고정하는 100kg짜리 반력암이
일하던 노동자 쪽으로 넘어졌다. 노동자는 넘어오는 반력암을 붙잡고 용케 빠져나왔다. 엄 씨는 그에게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안전사고라는 1공장 노조 대의원과 단순 장비고장이라는 회사가 공방하는 사이 7일간 생산라인이 멈췄다. 이른바 비공인(와일드캣) 파업이었다. 회사는 엄 씨와 1공장 대의원을 업무방해로 고소고발하고 5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회사는 아프지도 않은 사람에게 병원 진단 받으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현대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은 노동운동에 많은 숙제를 남겼다. 하청노동자였다가 최근 정규직으로 신규입사한 노동자들은 밤마다 엄 씨에게 전화해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엄 씨는 “그들에게 ‘누리지만 말고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고 말해준다”고 했다.
현대차엔 생산라인 밖에 시설관리나 환경미화, 사무보조 등 족히 5천명이 넘는 간접고용 노동자가 있다. 신규입사자가 떠난 비지회엔 최근 폐업한 업체 경리 2명이 가입해 싸움을 시작했다.[워커스 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