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과 가을 내내 즐긴 이 푸른 하늘도 곧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늦은 가을부터 다음 봄까지 뿌연 미세먼지나 황사가 한반도를 뒤덮는 일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먼지는 이제 바깥 기온보다 더 먼저 확인하게 되는 환경 지수가 됐다. 미세먼지 농도 상태가 ‘아주 나쁨’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안심해야 하는 지경이다. 게다가 초미세먼지까지 걸러주는 마스크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제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됐다. 우리는 그렇게 미세먼지를 이미 하나의 일상적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초미세먼지 입자의 크기는 1밀리미터 길이 안에 4억 개의 입자를 나란히 늘어놓을 수 있을 만큼 작다. 너무나 미세하여 폐를 통해 혈관으로 흡수돼 심장질환이나 뇌졸증의 원인이 되고, 평균수명을 3.1년이나 단축시킨다고 한다. 2세기 전 영국 산업혁명 당시의 끔찍했던 스모그가 또 다른 모습으로 지구의 다른 장소에 돌아왔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미세먼지의 원인을 밝혀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 아무런 상관없어 보이는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자체 연구비까지 써가며 한국의 대기오염물질 농도를 측정하는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미세먼지 입자에 포함된 각종 중금속과 화학물질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밝히는 것이 외교상의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어서인지 이웃 중국에게는 대략 절반의 책임만 묻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된다.
국경도 없이 대기 중에 부유하는 초미세먼지가 있다면, 바다 속에는 미세 플라스틱 알갱이가 있다. 이 미세 플라스틱 입자는 눈에 보이는 부유 플라스틱 쓰레기와 달리 맨눈으로 식별할 수 없다. 최근의 소식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근해에서 채취한 해양생물의 대부분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됐다고 한다. 북태평양을 순환하는 바닷물 1리터 속에는 미세 플라스틱이 최대 0.25밀리그램이 들어있다는 연구도 발표됐다. 이 미세한 입자들은 해양 생태계 먹이사슬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생물에까지 도달하고 있다. 하지만 초미세먼지와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대체 그 입자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또 얼마나 세밀하게 우리 인체와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피해를 직접 받고 있으면서도 그 피해를 인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의 두려움이 커진다. 한편,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느끼게 되고 그 심각성은 경감된다.
이런 미세한 입자들은 인간이 만든 것으로서 점착성이 있어 어디에나 달라붙으며 크기가 작아서 어디로든 이동이 가능하고 한번 만들어진 이상 다시는 자연적으로 없어지지 않으며 전 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 철학자 티모시 모튼은 일반적인 사물을 초과하는 어떤 것, 즉 초과물, ‘하이퍼오브젝트’(hyperobject)라고 부른다. 이미 지구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오로지 전 지구적 재난의 상황과 같은 방식으로 인간 사회에 영향을 미칠 때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실재하는 위협으로 경험되는 그런 것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파괴와 방사성 물질의 유출과 같은 재난적 사건을 통해 우리는 방사성 물질과 같은 하이퍼오브젝트의 실재를 체감한다.
초미세먼지, 해양 미세 플라스틱 알갱이, 방사성 물질, 유전자변형식품,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하이퍼오브젝트들의 복합적 효과로서의 지구 온난화는 우리가 다시는 그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떤 문턱과도 같은 것들이다. 여러 과학자들은 인류가 지구상에 어떤 생태적이고 지질학적 수준에서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지금의 시기를 중생대의 ‘백악기’나 ‘쥐라기’처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다소 반성적인 동시에 냉소적인 이 인류세라는 명칭은 현재 지구상의 인류가 대면하고 있는 온갖 환경 위험과 위협이 사실은 바로 인류 그 자신이 구축하고 또 무너뜨려 온 것들의 결과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최근 우리는 인공지능이나 기계인간들이 감정을 가지게 되고 인간과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며,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인류를 멸망케 하리라는, 대단히 오싹한 상상을 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사소한 것, 티끌 같은 것, 아니 그보다 더 작고 미세해서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없을 그런 존재들의 위험에 대해서는 왜 덜 염려하고 금방 잊고 마는가. 471명의 시민이 참여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원전 건설 재개를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민주주의가 숙의의 과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대신에 인류의 미래 환경이 시민의 합의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인류세의 문제는 절차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생존과 재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 이후의 환경을 염려한다면 언제 멈추어도 이미 늦은 결정이다.[워커스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