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한국고속철도(KTX)는 첫 삽을 뜬 지 10년만인 2004년 4월 1일 개통했다. 노태우 정부는 KTX 건설비용을 4조 원으로 예상하고 설계했지만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까지 4명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실비는 5배가 많은 20조 원으로 불어났다.
언론은 서울-부산을 2시간 30분 만에 오가는 ‘꿈의 교통수단’이라고 포장했다. KTX 승무원에는 젠더 코드까지 십분 동원해 ‘지상의 스튜어디스’라는 미사여구를 남발했다. 4월 1일 개통을 앞두고 350명을 뽑기로 한 KTX 승무원 채용에 5천 명 가까이 몰린 것도 언론의 호들갑 때문이었다.
승무원 채용이 한창이던 2004년 1월 17일 조선일보는 10면에 <고속철 여승무원 모집에 대졸 이상이 절반 석・박사 43명 몰려>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지상의 스튜어디스’인 고속철도 여승무원 350명 모집에 4651명이 지원해 13.3대 1을 기록했다. 지원자 중 대졸 이상이 절반을 넘었다. 석・박사 학위자 43명과 외국 유학 경력자도 30명에 달했다. 전・현직 스튜어디스 19명과 새마을호 승무원 14명도 응시했다. 이날 서류전형을 통과한 800명을 면접한 철도청 홍익회는 ‘우수 인재가 너무 많아 선발하기가 오히려 힘들다’고 했다”고 썼다.
매일경제신문도 개통 1주일을 앞둔 2004년 3월 23일 시운전 중인 KTX를 타고 ‘시승기’ 기사를 쓰면서 승무원들을 ‘지상의 스튜어디스’라고 호명했다.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달리 KTX 승무원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었다. 2년을 일한 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철도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지만 공사는 280명 해고로 맞섰다. 2006년 5월 노무현 정부 때 일이다.
철도공사 직고용을 요구했던 KTX 승무원은 이후 12년 동안 해고자 신분으로 버텼다. 단식과 삭발, 고공농성, 점거농성, 삼보일배 등 안 해본 게 없다. ‘12년’은 20대 중반의 화려했던 청춘을 마흔을 앞둔 중년으로 만들었다.
“매일매일 도망가고 싶었다”
철도노조 KTX승무지부 박미경(37) 부지부장을 만난 1월 8일은 날이 참 애매했다. 1월 16일 법원의 마지막 조정재판을 1주일 앞두고, 남은 KTX승무지부 조합원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듯 가슴 졸이는 시간이었다.
12년 동안 ‘희망고문’에 시달린 박 부지부장은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송두리째 부정당한 2015년 대법원 판결의 끔찍한 기억이 남긴 트라우마가 가장 컸다고 했다. 지난 1월 8일 저녁 부산역에 있는 철도노조 부산본부장실에서 KTX승무지부 박미경 부지부장과 마주 앉았다.
박 부지부장은 ‘82년생 김지영’보다 한해 먼저 부산에서 태어나 줄곧 부산에서 살았다. 2003년 12월 외국어 전공으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스포츠마케팅 일을 하고 싶었는데 철도청의 KTX승무원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첫 직장이었다.
2004년 2월쯤 채용된 박 부지부장은 2주간 철도대학에서 교육받았다. 면접 때도, 교육 때도 철도공사 간부들이 나와 진행했고 강사마다 “지금은 철도청에서 공사로 전환되는 시기라서 혼란스러운데 전환 이후엔 너희들도 공사로 데려간다”고 했다. 채용은 철도청 산하 한국철도유통이 했지만 곧 철도청이 철도공사로 바뀌면 공사 소속으로 옮겨 준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2년 뒤 철도공사는 철도유통이 담당했던 승무사업을 직고용하지 않고 자회사인 KTX관광레저(현 코레일 관광개발)에 재위탁해 버렸다. 승무원들은 2006년 3월 철도공사 직고용을 요구하며 파업했지만 두 달 뒤 자회사로 전직을 거부한 승무원 280명은 모조리 정리해고됐다.
이때부터 승무원들은 국가인권위원회와 노동부, 철도공사, 정치권을 뛰어다니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사회적 해결은 어려웠다. 법적 소송 외엔 방법이 없었다. 승무원들은 철도공사를 상대로 ‘근로자지위보전소송’을 벌였고 1, 2심 모두 이들의 실질적 사용자가 철도공사라고 판결했다. 덕분에 해고된 기간에 못 받은 임금도 받았다.
그러나 2015년 대법원은 그해 ‘최악의 판결’로 길이 남은 결정을 내렸다. 1, 2심 판결을 뒤집으며 간접고용에 정당성을 실어줬다. KTX에 탑승해 코레일의 지시 하에 승객과 최일선에서 만나는 승무업무가 합법도급이란 말도 안 되는 판결이었다. 그 판결은 280명 청춘의 삶을 부정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의 생계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철도공사는 대법원에서 패소한 34명의 승무원들에게 ‘부당이득금 환수소송’을 걸어왔다. 하급심 판결로 받은 가지급된 임금을 돌려달라는 거였다. 가혹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부산 승무원 1명이 어린아이를 남긴 채 자살했다. 같은 부산의 동료였던 박 부지부장은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매년 3월 친구의 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기도 힘들다고 했다.
280명이 집단해고된 그 많던 동료들은 하나 둘 씩 이탈했다. 100여 명에 달했던 부산 승무원들은 9명 남았고, 그중 부산에 5명이 살고 있다. 4명은 결혼 등으로 서울로 갔다.
박 부지부장은 “매일매일 도망가고 싶었지만, 노조 만들 때 부산승무지부장을 맡은 동료가 절친이어서 도망갈 수 없었다”고 했다. 12년을 버틴 힘은 어디서 나왔느냐고 물었다. “가족들의 지지가 가장 큰 힘이었다”고 했다. 항상 딸의 뜻을 존중해준 부모님과 동생의 지지가 여기까지 이끌었다.
박 부지부장은 30대 중반의 미혼으로 부모님에게 의탁해 살기도 힘든 나이다. 생계를 위해 직장에 다니면서 복직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박 부지부장은 “대법원 판결나고선 다니는 직장에 KTX승무원이었던 사실을 숨기게 되더라고요. 죄인도 아닌 죄인처럼 속으로 삭였죠”라고 털어놨다. 지금 다니는 직장도 그녀가 KTX승무원이었던 사실을 모른다.
민주당이 희망고문을 결자해지할까
철도노조 간부를 통해 1주일 뒤 1월 16일 법원의 조정재판 얘기를 들었다. 4대 종단 원로가 지난달 “가지급 임금 중 5%를 승무원들이 변제하고 철도공사가 나머지 청구를 포기한다”는 중재안을 냈다. 1월 16일 법원에서 조정이 성립됐지만, 박 부지부장을 만난 8일엔 그마저도 불투명했다. 박 부지부장은 “이번엔 정말 해결됐으면 좋겠다. 희망고문이 정말 힘들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홍영표 위원장은 지난해 7월 한 언론인터뷰에서 “KTX 여승무원들은 반드시 복직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1, 2심 승소에 이어 집권여당발 희망고문이 다시 시작됐다.
희망고문의 경험 때문에 박 부지부장은 “도장 찍을 때까진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 12년의 지난한 경험 때문에 어떤 동료는 “부산역 지나가기도 싫고, KTX 타는 것도 두렵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자존감 상실이 제일 커요.” ‘지상의 스튜어디스’라고 사기 쳤던 국가(철도공사)와 언론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
그러나 복직의 끈을 놓지 않고 싸우는 승무원이 아직 33명이나 된다. 박 부지부장도 12년 전엔 노동운동의 ‘노’자도 몰랐다. “처음 철도노조 KTX승무지부로 가입했을 때 언론 인터뷰하면서 기자가 물으면 우리는 철도노조지 민주노총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였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박 부지부장이 12년을 버텼다. 오랫동안 승무지부와 함께해온 한 노조간부는 “승무원들은 여기서 포기하면 한국 땅 어딜 가도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족쇄에 묶여 평생 살 수밖에 없다는 걸 본능으로 알았기에 버틴 거”라고 했다. 실제로 두 달 전엔 여전히 간접고용인 KTX 현직 승무원들이 파업을 벌였다. 후배들의 파업을 지켜본 박 부지부장은 “짠했다”고 했다.
철도공사가 이사회까지 열고, 법원의 중재가 받아들여져 가지급금 문제는 예상대로 해결됐다. 그러나 복직, 그것도 직고용까진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다. 철도공사와 국토교통부, 국회, 청와대 문턱도 남아 있다. 386 출신의 오영식 민주당 전 의원이 철도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다. 민주당 정부가 12년 전 자신들이 꼬아놓은 KTX승무원 문제를 결자해지 할지 주목된다.[워커스 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