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축하와 찬사로 가득 찬 남북 정상회담이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렸다. 남북 정상이 서로 사이좋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안겼다. 하지만 이 땅에선 평화조차 평등하지 않다. 평화가 도달하지 못한 곳은 이전의 전쟁 같은 삶을 이어가거나, 평화에서 소외되고 잊혀진다. 소성리와 대추리, 전쟁 기지가 되어버린 그곳을 《워커스》가 다녀왔다.
경찰로 뒤덮인 소성리 … 사드 공사는 여전히 직진
5월 10일 오전 6시 30분, 성주 투쟁의 연대자들이 바삐 발걸음을 움직인다. 사드 기지와 1.2km 떨어진 진밭교 앞 삼거리 평화기도회에 10여 명이 모였다. 백창욱 목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투쟁이란 “경찰이 투쟁하는 사람들을 꽁꽁 묶어 몸의 대화를 격렬히 나눈 후, 모두 전과자가 되는 일”이라고 한다. 강정 해군기지와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거친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다. 백 목사와 함께 평화를 염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마치니 오전 7시가 넘었다. 장비 반입을 위한 차들이 대거 들어올 시간이다. 모인 이들이 ‘평화행동’을 펼치고, 경찰과 본격적인 ‘몸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연대자들이 길목에 의자를 놓고 앉아 피켓 시위를 벌인다. 7개 중대, 560여 명의 경찰이 그 주위를 감싼다. 30분쯤 지났을까, 경찰과장이 메가폰으로 자진해산을 요청한다. 이들이 비키지 않고 저항하자, 의자 채로 사람을 옮긴다. 갓길로 옮겨진 사람들은 기지에 올라가는 차들을 향해 “사드에 봉사하지 말라”고 외친다. 마무리 피켓 시위까지 끝나니 오전 8시가 넘었다.
대구에서 올라온 한 연대자는 “경찰이 많이 올 땐, 사람 하나에 100명씩 달라붙는다. 아마 전국에서 경찰이 가장 많을 것 같다”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소성리의 낮은, 둘러싼 산들이 마치 소리를 누르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엔 현재 60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고, 주민 대부분은 70대에서 90대의 노인들이다.
오후 3시 30분, 1인 시위를 위해 마을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이 봉고차에 몸을 싣는다. 5월 10일 1인 시위엔 도금연(81) 할머니, 임길남(80) 할머니, 고춘자(74) 할머니, 임순분(65) 소성리 부녀회장이 나섰다. 진밭교 삼거리를 지나 차에서 내려 얼마간 오르막을 걸으니 가시철조망 너머 국방부 기지가 보인다.
한참 1인 시위를 하던 도금연 할머니가 타이어 펑크용으로 보이는 가시 덮개를 길 한 가운데로 끌고 왔다. “이렇게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다”라는 도금연 할머니는 차량 통제용 바리케이드도 옮겨놓으려다 주변의 만류로 참았다. 고춘자 할머니는 익숙한 구호들을 외치며 후창을 이끌어 냈다. 고춘자 할머니가 ‘사드 가고, 평화 오라’는 공식 구호를 시작으로 ‘무기 장사 고마해라’ ‘미군은 미국으로’ 등을 시원하게 외쳤다.
할머니들은 최근 들어 더 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남북 화해모드, 평화의 봄이 온다라는 세간의 말들이 신문지면과 방송을 장식하던 때였다. 도금연 할머니는 “문재인 (대통령) 되면 사드 보내는가 했다. 1번 찍으면 잘해주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다 못 믿을 놈들이다”라며 “몇 년 동안 투쟁하면서 내가 이렇게 악해졌다”라고 말했다.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기 불과 5일 전, 소성리 주민들과 사드 배치 반대 투쟁 연대자들은 다시 국가 폭력에 내몰렸다. 사드 기지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진밭교가 전선이었다. 4월 23일, 국방부는 사드 기지에 공사용 자재와 장비를 실은 덤프트럭 등 차량 22대를 반입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병력 3천명이 동원돼 진입 차량을 경호하고, 인부들을 들여보냈다. 소성리 주민과 연대자들은 서로의 팔을 연결하고, 맨몸에 그물을 감아 저항했다. 이들은 서로 낀 팔짱에 기대, 다시 시작된 국가 폭력에 저항했다. 경찰이 커터칼로 그물을 자르기 시작했다. 경찰의 칼자루가 눈앞을 오가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목 뒤에서 서걱거리며 그물이 잘려나갔다. 한 노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기도 했다. 이 날, 활동가 150여 명이 경찰에 끌려가고, 20여 명의 주민이 다쳤다.
촛불 정부가 탄생하고 지난해 6월 물러난 경찰이 이때쯤 다시 소성리로 들어왔다. 경찰은 4월 19일로 예정된 보수단체의 집회를 관리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보수단체의 집회가 끝나기도 전에 경찰은 진밭교를 지키고 있던 주민과 연대자들을 밀어내고, 사드 공사를 위한 인부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후 많게는 3천명, 1천여 명, 현재는 5백여 명의 경찰이 새벽부터 마을 어귀를 막고 있다.
성주, 김천 주민들은 경찰,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지난 5월 9일 서울을 찾았다. 청와대 앞 분수대에서 임순분 소성리 부녀회장은 ‘백주 대낮 소성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렸다. 임 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눈이 있으면 소성리 상황을 봐야하고, 귀가 있으면 소성리 상황을 제대로 보고 받고, 입 있으면 답변 좀 하라”라며 “소성리 주민도 국민이라고 말 좀 해달라. 우리는 이 나라 정부 믿고 시키는 대로 요구한 대로 세금 내고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 평화로운 마을에서 숨 쉬고 살 수 있도록 경찰 병력 빼달라”라고 요구했다.
경찰의 호위 아래 사드 기지는 얼추 체계를 갖춰가고 있다. 유류를 실은 헬기가 부지런히 마을 위로 날아든다. 막사나 시설도 곧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이 땅의 평화는 평등하지 않다. 소성리에는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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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우고자 했던 ‘대추리’라는 생명의 불씨
이주마을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작은 별장 같은 전원주택은 구획에 따라 정갈하게 들어차 있었다. 마을 가운데에는 조그마한 공원과 운동장이 만들어졌다. 잘 청소된 아스팔트 바닥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방문객은 마을 주민들을 부러워했다. 이런 전원주택에 살면 소원이 없겠다는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을 주민들은 타는 속을 쓸어내렸다. 그들이 살고 싶었던 곳은 아스팔트 위에 세워진 장난감 마을이 아니었다.
마을 입구에는 ‘대추리’라는 세 글자가 고집스럽게 버티고 서 있다. 누군가는 잊었을지도 모를. 또 다른 누군가는 ‘빨갱이들’이라고 욕 할지도 모를, 그리고 누군가는 상처로 남았을지도 모를 마을 이름이다. 12년 전, 군대와 경찰이 들이닥쳐 부수고 무너뜨린 마을. 그곳 주민들은 국가가 지우고 싶어 했던 ‘대추리’라는 생명의 불씨를 기어코 지키려 하고 있다.
“대추리라는 이름은 여기 주민들에게는 전부예요” 대추리 평화센터에서 만난 신종원 대추리마을 이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군기지 이전으로 마을을 빼앗긴 대추리 주민들은 현재 평택 팽성읍 노와리 끝자락에 이주마을을 조성했다. 주민들이 뿌리내린 이곳의 이름은 ‘대추리’여야
했다. 2007년, 눈물을 머금고 사인한 정부와의 합의서에도 명시돼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이주한 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추리’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처음부터 못 해주겠다고 했으면 기대도 없었죠. 약속한 것도 안 지키는 더러운 정부예요. 어차피 어떻게 살든 똑같지 않냐고 하는데, 우리한텐 아니에요. 주민 자존심이자 전부예요. 내 새끼 이름 짓는데 옆집 아저씨 성 빌려 쓰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신종원 이장은 정부가 약속을 어겼다고 했다. 실제로 2007년 당시 주민과 정부는 ‘행정구역 명칭을 대추리로 변경하는 것은 해당지역 기 거주 주민의 동의 등 행정구역 변경에 관한 규정에 따른 절차와 요건 구비시 승인한다’고 합의했다. 정부 측 협상자는 대추리로 행정명칭 변경이 가능하다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이주 후 상황은 변했다. 평택시는 현재 노와 5리에 거주하는 대추리 주민뿐 아니라, 노와리 1~4리 주민들을 상대로 우편투표를 진행했다. 압도적인 반대결과가 나왔다. 투표에 참여한 노와리 주민들이 노와 1~5리 전체를 ‘대추리’로 변경하는 것으로 오해했던 까닭이다. 대추리 주민들은 당혹스러웠다. 마을 이름을 ‘대추리’로 변경하는 것에 대한 주민 동의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 또는 직접 관련을 맺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뤄져야 했다. 신종원 이장은 “평택시는 지방자치법에 노와리 주민 동의를 요건으로 하지 않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행정구역 명칭 변경이 노와리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동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대추리 마을 주민들은 평택시장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마을회관에는 매일 열댓 명의 노인들이 모여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담소를 나눈다. 예전 같으면 벼농사를 짓느라 눈코 뜰 새 없었을 텐데, 이제 이들의 손을 필요로 하는 논과 밭은 없다. “아이고, 말도 꺼내지 말아.”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는 질문에 노인들은 손사래를 친다. 아무리 말 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 했다. 평생 논과 밭을 일구던 사람들의 일상에 무력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여건이 되는 주민은 아직도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대다수의 주민들은 일손을 놓은 지 오래다.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다른 이웃의 눈치를 본다. 그나마 농지를 살 수 있는 주민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주민이 더 많은 까닭이다. 다수의 주민은 이주단지에 집을 짓기 위해 빚을 떠안았다.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예전처럼 마을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노인은 “정부가 헐값에 땅을 빼앗았다. 이 근방에 그 가격 하는 땅은 없어서 서산까지 가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매일 왕복 4시간 씩 농사를 지으러 출퇴근 하는 일은 고역이다.
땅을 빼앗긴 주민들은 2년 전까지 공공근로로 생계를 유지했다. 평택지원특별법에 따른 한시적 일자리 사업이었다. 세대 당 1명의 주민은 길거리 휴지를 줍고 풀을 뽑으며 100만원 남짓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신종원 이장은 “15년까지 공공근로 사업이 진행됐는데, 사실상 우리의 미래를 까먹는 사업이었다”고 말했다. 실질적인 주민 생계 대책이 아닌, 단기적 생명 연장술 같은 것이었다. 공공근로 사업 기간이 끝나자, 주민들은 생계를 유지할 도리가 없어졌다. 현재 정부는 2007년 약속한 ‘평택지원특별법상 상업용지는 8평을 공급한다’는 생계유지대책마저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선언으로 한반도에 평화와 희망이 가득 찼던 그 때. 대추리 마을 주민들은 서울로 상경해 청와대 앞에 섰다. 12년 전 정부가 했던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2006년, 주한미군기지 이전으로 모든 것을 잃은 그들의 삶 또한 여전히 평화롭지 않았다.[워커스 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