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일(성공회대)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난다고 한다. 서로 대화하겠다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결과를 낼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 과거 대화와 합의,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에도 정세는 매번 교착상태에 빠졌다.
지금 북미는 ‘기 싸움’에 한창이다. 북한으로서는 ‘핵카드’로 미국을 대화 테이블에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일단 성공적이다. 주변 국가의 핵이 군사적 의미보다는 정치적인 의미를 지니기에 더욱 그렇다. 핵무기 자체는 인류의 삶 자체를 나락으로 빠뜨릴 파괴력을 지닌다. 하지만 주변국의 핵보유는 헤게모니 국가와의 물리적 대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핵이란 냉전시기 수천의 핵무기를 보유한 소비에트연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미국이나 북한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와 봉쇄에 대항해 북한이 내놓은 ‘핵보유국’의 지위란 지구화 속에서 피할 수 없게 된 ‘지구-정치적 시민권’의 요구였다. 미국에 대한 ‘체제보장 요구’는 그 상징으로 현실의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인정, 객관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기저에는 ‘정치적 카드’를 만들기 위해 ‘고난의 행군’을 마다하지 않은 인민-대중의 그 어떤 염원, 그들의 현재-미래의 삶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정치적 결단이 기입돼 있다.
이 위중한 국면에서 문재인 정권은 ‘운전자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정치는 자임하는 것에서 출발하기에 그 행위 자체는 가상하다. 그러면 이에 걸맞는 시나리오들과 카드들도 동반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외부의 힘에 수렴돼 오히려 적대와 긴장을 더 고조시키거나 한국과 같은 ‘수구-보수 독점의 정당체제’ 속에서는 급격한 정치적 반동의 흐름을 촉진시킬 수도 있다. 수구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에 자극된 군비경쟁에 호응해 글로벌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실현해주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했던 것, 그리고 정치 자체를 부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는 미국 등의 주관적 의지 여부와 무관하게 ‘포괄적인 일괄 타결 방식’으로, 그것의 실현은 상호주의에 입각한 단계적 과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는 미국의 관심 대상인 중국 등 주변국의 이해를 고려할 때,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대내외적인 이해들로 이리저리 뒤틀릴 수도, 삐끗해 금이 갈 수도 있다. 문재인의 ‘운전자론’이 이 상황에 대응할 시나리오와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와는 무관하게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이 있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의 문제를 ‘국내정치’에 외재하는 것으로, 즉 외교의 문제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는 ‘민주정부 3기’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권이 김대중 정권 이후 추진했던 ‘햇볕정책’의 실패 이유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햇볕정책’이 ‘퍼주기 정책’이라는 이미지로 도색되면서 실패한 이유 말이다.
과거를 불러와 보자. 1971년 대선에서 DJ가 ‘4대국보장에 의한 평화통일론’을 제시한 이후 그것은 계속 업그레이드됐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자체의 진화가 아니라 그것이 ‘대중경제론’ ‘대중민주주의’로 이루어진 ‘민중주의적 전략’과 쌍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통일대통령’을 넘어 ‘경제대통령’으로 이미지화되면서 대중에 어필해 이후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진보를 전유하며 정치적 헤게모니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렇다면 DJ정권의 출범이후 ‘햇볕정책’이 실패한 원인도 분명해 진다. 그 정책이 신자유주의, 그것도 풋잠과 같은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질서자유주의적 발상’을 거쳐 미국식의 신자유주의와 쌍을 이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대중경제론과 대중민주주의에 근거한 ‘햇볕정책’과 치안에 기대어 대중의 삶을 ‘죽거나 나쁘거나’의 상황에 빠뜨려 놓는 신자유주의 기조에 터한 ‘햇볕정책’이 대중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상상할 필요조차 없다. ‘햇볕정책=퍼주기 정책’,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는 언술이 맞물리며 대중을 사로잡았던 근인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지 비합리적인 수구 사회정치세력의 선동, 모략에 의한 것이라고 비판한다면, 거기에서 그 어떤 정치적 해법을 찾을 수 있겠는가. 애초 노무현 정권의 대북특검이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내부 문제’는 외면한 문재인 ‘운전자 역할’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운전자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이런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다. 지난 남북정상회담의 내용을 ‘보수야당’과의 합의를 통해 문서화한다고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의 흐름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치는 불가역성을 담보한다고 평가되는 그런 법, 제도적 합의를 우롱하고 그것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대중의 삶에 대한, 자기통치에 대한 요구들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외적인 관계들’로 보이는 문제들은 그 결과가 어떻든 ‘내적인 관계들’을 매개로 해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의 헤게모니 반경에 있고 그 라이벌, 중국에 둘러싸인 한국과 같은 반(半)주변국, 그리하여 ‘운전자론’을 뒷받침할 시나리오와 카드들이 빈곤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자유롭게 노조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 그 동안 착취, 수탈, 차별, 배제당해 온 이들이 요구하는 ‘차별금지법’,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요구, 나아가 자유로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중요한 이유이다. 반대로 그 운동의 주체들이 결코 조합주의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목록들이야말로 지구화시대에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가 담보해야 할 정초적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전자론’을 내세우는 문재인 정권의 좌석에는 그런 요구들이 자리할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내부의 문제들’에 눈감고 그에 대한 의미 있는 발상과 정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이미 정치적으로 약효가 없는, 전 민주노총위원장의 가석방 등으로 그 무능을 가리는 데 급급할 뿐이다. 아직 ‘운전자론’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는 것, 달리 말해 그 면허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원적 힘이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번영’이라는 언술이 대중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 이외에 문재인 정권이 쓸 수 있는 카드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워커스 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