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1970년
4.19혁명 이후 각 대학에서는 총학생회 재건 운동이 일었다. 학도호국단의 폐지와 민주적 총학생회 건설 움직임 속에서 단과대 여학생 대표들로 구성된 여학생회가 꾸려졌다. 1960년부터 서울대를 비롯해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한양대 등 각 대학에 여학생회가 만들어졌다. 1960년에는 단국대학교 여학생회가 각 대학 여학생회장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기도 했다. 1962년 당시 연세대 교수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해방 직후에는 강의실에서 남녀가 섞여 앉던 것이, 요새는…(중략)…여학생회가 있어 환영회니 송별회니 사은회를 주최하여 남학생을 따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여학생회가 표방했던 것은 ‘여성주의 운동’과 거리가 멀었고, 대개 전통적인 ‘여성다움’을 강조하는 사업을 벌이며 주변 활동에만 머물러 있었다. 이후 박정희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또 한 번 학생회가 위기를 맞게 되면서 여학생회의 활동 역시 침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1980-1985년
1979년 박정희 피살 후, 대학가에도 민주화의 바람이 불었다. 1980년 서울대는 단과대 학생총회에서 새로운 학생회칙을 제정했다. 이 회칙에 총여학생회(이하 총여)의 신설이 포함됐다. 이후에도 10.26 사태와 문교부의 탄압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84년 학생회가 재건됐고 총여학생회장이 선출됐다. 80년대에는 총여도 대학 내 민주주의 투쟁을 주도했고, 여성해방투쟁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고려대 총여는 1983년 학내 교지 <석순>을 창간했다. 이듬해 6월에 2호를 발행한 <석순>은 ‘맑시스트여성해방론’과 ‘중국공산당과 여성’이라는 논문을 실어 학교로부터 배포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해 12월에는 서울대 총여학생회장 장은주 씨가 반정부유인물을 제작한 혐의로 연행됐다. 고려대 총여는 회칙을 통해 ‘본교 여학생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상의 정립과 여학생 자치활동을 통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향상, 권리의식과 책임의식의 증진을 도모한다’는 설립 목적을 명시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기존 총학생회 산하기구였던 ‘여학생회’가 ‘총여학생회’라는 하나의 독립적인 기구로 자리매김 했다.
1986-1988년
80년대 중반 이후 대학 내 총여 설립은 확대됐고, 이들의 투쟁도 본격화됐다. 1988년에는 전북대 총학생회장과 여학생회장 등 간부 3명이 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단식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같은 해 연세대, 고려대 총여학생회장은 학내 게시판에 ‘북한여성 생활소개 대자보’를 게재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으며, 이 사건으로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회들은 불법구속 규탄대회를 열고 이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총여를 상대로 한 묻지마 테러도 벌어졌다. 88년 6월, 조선대 총여 사무실에 20대 청년 7~8명이 손도끼와 쇠파이프, 일본도 등 흉기를 들고 난입했다. 이들은 폭언과 함께 기물을 파손하고 난동을 부리다 사과탄 2발을 터뜨리고 달아났다. 1987년에는 서울 28개 대학 총여학생회장들이 ‘서울지역여대생대표자협의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취업 과정에서의 남녀차별 문제를 제기하며 채용 차별이 드러난 4개의 기업을 검찰에 고발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1990-1995년
60년대의 여학생회가 전통적 여성성을 바탕으로 한 이벤트성 사업을 중시했다면, 80년대 총여는 전투적인 사회변혁 운동을 수행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여성들은 투쟁에서의 남성성과 일상에서의 여성성을 동시에 강요받았으며, ‘여성운동’은 민족, 노동해방 투쟁에 종속됐다는 논란도 있었다. 이후 9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운동 집단과 총여를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반성폭력 운동’이 확대된다. 1992년 4월에는 한양대 총여가 “여성들이 더 이상 성폭력의 일방적인 희생자일 수만은 없다”며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학내 서명운동을 벌였다. 광운대 총여는 성폭력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했으며, 건국대 총여는 ‘성폭력 추방 한마당’에 이어 시민들을 상대로 한 성폭력 추방 운동을 전개했다. 일상에서의 여성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반대하는 반성폭력 운동은 지역에서도 확대됐다. 충북지역 5개 대학과 여성단체들도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위한 거리서명운동을 벌였다. 여성단체와 학생들이 벌여온 법 제정 운동은 90년대를 관통하며 이어졌고, 1997년 성폭력특별법 제〮개정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1995-1999년
90년대 후반부터는 총여를 중심으로 반성폭력 학칙 제정운동이 전개됐다. 서울대학교 조교 성희롱 사건과 한총련 여학우 성추행 사건 등이 공론화되면서,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도적 절차로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97년에는 동국대 총여, 이화여대 여성위원회, 서울산업대 총여, 서울시립대 총여, 성균관대 총여 등 각 대학 총여와 여성주의 집단 등은 ‘학내성폭력 근절과 여성권 확보를 위한 여성 연대회의(여성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이후 여성연대회의의 참여 단위는 지역으로 확대됐다. 이 같은 움직임에 힘입어, 부산 동아대는 전국 최초로 총여가 마련한 ‘성폭력 특별규정’을 학칙에 포함시켰다. 1999년 기준, 전국 총여는 약 30곳으로, 학내 여성운동 단위까지 포함하면 약 40곳 정도가 활동을 이어갔다.
2000-2005년
반성폭력 운동이 200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전개되며 총여에서도 반성폭력 학칙을 꾸준히 마련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교육인적자원부가 2001년 「남녀차별금지법령의 시행에 따른 업무처리 요령」을 각 대학에 행정 지침으로 내리면서 대학들도 성희롱, 성폭력 관련 규정을 만들었다. 1999년까지 관련 규정을 제정한 곳은 10여 개에 불과했지만 2001년에 들어 그 수는 123개로 확대됐다. 일부 대학에서는 형식적인 절차만을 강요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성균관대는 반성폭력 학칙안에 총여가 다른 입장을 보이자 이사회를 꾸려 날치기했다. 당시 성대 총여는 ‘피해자중심 원칙’과 ‘사건공개의 원칙’을 포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당시 인터넷 보급에 따라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지자 총여 활동을 두고 사이버 불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3년 중앙대 총여는 기숙사 야유회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을 접수해 비대위를 꾸렸다. 남녀 신체접촉이 수반되는 게임 등 전반적인 행사 진행에 문제의식을 가진 여성들이 신고한 사건이었다. 비대위는 해당 사건을 ‘환경적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대책 마련을 시작했는데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온라인에서 총여를 향해 욕설이 쏟아졌다. 신고자의 신상도 공개돼 기숙사 방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반성폭력 학칙의 필요성을 절감한 중앙대 총여는 ‘반성폭력 회칙’을 만들었고 이는 2년 뒤 전학대회에서 통과됐다.
2006-2012년
2009년 처음으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추월했다. 대학집단의 남초현상이 사실상 사라지고, 여성들의 총학생회 활동도 활발해지면서 총여가 총학생회의 산하집단으로 재구성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취업난 등으로 학생 자치가 무력화되면서, 총여는 더욱 관심 받지 못했다. 수적 평등을 이룬 여학생들은 ‘탈페미니즘’을 주장하기도 했다. 연세대에선 2000년대 후반에 ‘총여학생회 탈페미니즘’을 주장한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이후 총여는 생리대 자판기 설치, 생리공결제, 여성휴게실 등 여학생 복지에 초점을 맞췄다. 2006년, 총여가 꾸준히 요구한 ‘생리공결제’가 중앙대를 시작으로 각 대학에 도입되기 시작됐다. 인권위는 “여성의 건강권과 모성보호를 위해 적절한 사회적 배려를 하도록 관련 제도를 보완하라”며 생리공결제를 권고했다. 하지만 생리공결제를 둘러싼 끊임없는 역차별 논란이 발생하며 제도가 후퇴하기도 했다. 가톨릭대는 2010년 학기 중 한 달에 한번 공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시범도입 했으나 비난 여론에 부딪혀 2011년 1학기부터 한 학기에 한번으로 후퇴시켰다. 여학생 휴게실도 남학생 역차별 주장의 단골 대상이었다. 2008년 서울대 51대 총학생회 선거에선 ‘남학생 휴게실 설치’ 공약이 뜨거운 감자였다. 다른 대학들도 여학생 휴게실 축소나 관리 부실 문제를 겪었다.
2013-2018년
2013년부터 지금까지 전국 총여학생회 중 74% 가량이 사라졌다. 총여는 계속 존폐 논쟁에 소환됐고, 폐지 투표에 부쳐졌다. 총학생회 산하기구로 편입되거나, 후보가 없어 비대위체제로 운영되기도 했다. 회칙에만 존재할 뿐 줄곧 공석인 학교도 있다. 총여의 존폐위기는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로 더욱 심화됐다. 대나무숲, 에브리타임 등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총여에 대한 인신공격성 글들이 도배되기도 했다. 총여 폐지를 요구하는 이들은 총여의 활동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며, 학생회비에서 총여의 예산이 집행되는 것 또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총여의 투표권을 남학생에게도 줘야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총여 폐지 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연세대는 지난 6월, ‘총여 재개편 요구의 안’이 총투표에서 가결돼 현재 개편을 논의하고 있다. 이번 개편은 지난 5월 연대 총여가 인권축제에 페미니스트 은하선 씨를 강사로 초빙한 게 발단이 됐다. 일부 학생들은 은 씨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고, SNS에 딜도 사진을 게시한 것이 기독교 대학인 연대의 이념과 맞지 않는 신성모독이라며 강연 반대 서명을 했다. 그럼에도 총여가 행사를 강행하자 총여 퇴진 여론이 형성됐다. 성균관대 역시 지난 10월 16일 서울 인문사회과학캠퍼스에서 열린 학생 총투표에서 총여 폐지안이 가결돼 총여가 폐지됐다. 일부 학생들은 절차적 하자, 논의 부족 등을 이유로 총투표 자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다. 동국대에 총여가 남아있지만, 내년도 입후보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해부터 동국대 대나무숲,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엔 총여 예산 집행 내역이 올라오고 있는데 시행세칙에 어긋나지 않은 정상적인 집행임에도 조롱이 이어지고 있다. 총여 구성원들에 대한 공격은 총여 입후보를 막는 원인 중 하나다. 지난해 11월 한양대 총여회장 후보의 SNS엔 성희롱 댓글이 무더기로 달렸고, 성균관대 총여 재건 모임 역시 비슷한 괴롭힘에 시달렸다.
사실이 다른 부분이 있어 글을 남깁니다. 생리공결제가 가장 처음 도입된 곳은 부산 동아대, 그리고 경희대 입니다. 그 후 중앙대 외 다른 대학들까지 확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