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공항에 내리자마자 검은 먹구름이 빠른 기세로 하늘을 덮더니 짐을 찾는 새에 기어코 비를 내뿜었다. 아차, 태풍이 일본에서 올라오고 있다고 했는데…. 제주도는 서울에서 한참 먼 곳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뭍에 사는 자의 무심함을 생각하며 강정으로 들어왔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해군기지로 가는 길목 천막에서 10여 명의 사람들이 미사를 보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사를 보던 천막은 경찰과 해군, 용역들과 부딪쳤던 공사장 정문에 있었다. 해군기지 완공이 피부로 들어온다.
해군기지가 건설됐다고 평화를 향한 여정이 끝난 게 아니기에, 생명평화미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꼬박꼬박 열린다. 문정현 신부는 미사 말미에 청와대 행정관이 마을을 어수선하게 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국제관함식 행사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미사 끝에 봉헌송 ‘강정아’는 구슬펐다. 문 신부는 어깨와 등을 활처럼 굽히고선 온몸으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아니라 툭 치면 금방이라도 통곡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이었다. 분노였다. 문자가 아닌 육성이 전파하는 아픔과 슬픔이 천막을 휘감았다. 어느새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강정아 너는 이 섬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쓰러지고 넘어져도 일어나리라. 우리 너와 함께하리라.”
▲ 사라져버린 구럼비의 끝자락 멧부리는 해군기지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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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 건설로도 바꿀 수 없는
미사가 끝나고 홍기룡 제주평화인권센터 소장을 만나 멧부리와 삼거리 식당, 강정포구에 가기로 했다. 정부가 강정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발표한 2008년부터 그는 해군기지 반대 싸움을 했다. 현재 ‘제주군사기지 저지와 평화의 섬 실현 범도민대책위’ 집행위원장이다. 이전에는 주로 이주노동자 인권활동을 했다. 홍 집행위원장은 “지역주민공동체에 관심을 가지며 여성·장애인·청소년·이주노동자와 함께 한 후로 수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강정 싸움은 또 다른 고민을 안겨줬다”고 했다.
우리는 비바람을 맞으며 강정천을 지나 멧부리로 갔다. 기지건설이 한창일 때, 강정천 다리 입구에서 백배를 드렸는데…. 멧부리는 강정천과 강정바다가 만나는 곳이자 제주올레 7코스와 연결된다. 지금은 사라진 구럼비의 끝자락이어서 해군기지를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이다. 걷다 보니 멧부리박이라는 평화활동가가 해군의 불법공사행위를 감시하던 텐트가 보였다. 사람은 없었다. 조금 걷다 보니 드디어 범섬이 있는 바다다. 해군기지 안에 정박한 군함도 2척이나 보였다. 저 아름다운 바다에 어선이 아니라 군함이라니, 해군기지 건설을 다시 실감한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제단이 보였다. 매년 1월에 마을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했다. 해군기지 싸움을 하면서 찬성 측과 반대 측으로 나뉘어 마을제도 없어지고 마을운동회도 없어졌다가, 최근 해맞이 행사 끝에 안녕기원제를 다시 지낸다고 했다.
▲ 삼거리식당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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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라 중덕삼거리에 있는 삼거리식당으로 먼저 갔다. 삼거리식당 입구에 다다르니 중덕이(개 이름)가 열심히 밥을 먹고 있다. 삼거리 식당은 농사를 짓던 김종환 삼춘(제주도에서는 주변 어른과 지인을 남녀구분 없이 삼춘이라 부른다)이 2012년에 구럼비에 세운 천막식당이다. 구럼비 폭파 이후 삼거리로 이전했다. 강정주민들과 평화지킴이들이 여기서 점심을 먹는다. 삼거리식당에 들어가니 미사를 보던 주민들과 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선전전을 하던 평화활동가들이 밥을 먹고 있었다. 예정된 국제관함식 관련 활동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홍 집행위원장은 강정에서 인권의 장소로 삼거리 식당을 빼놓을 수 없다고 했다.
“삼거리 식당은 어찌 보면 우리를 밥상공동체로 만들었어요. 뭘 하든 점심은 여기서 같이 먹으니까 이렇게 끈끈이 이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니겠어요. (미군기지가 있는) 오끼나와 분들이 와서 삼거리 식당을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대단하다고.”
점심을 먹고 해군기지가 보이는 강정포구에 갔다. 태풍의 영향으로 거세진 바람 탓에 몸을 곧추세우기도 힘들었다. 해군기지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이전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정부는 민군복합항이라고 우겨댔지만 아직도 크루즈항 공사는 끝나지 않았다. 포구에 올라가보니 문정현 신부가 해군과 싸우다 추락했던 테트라포트 표시가 보였다. 사라진 풍경을 대신하듯 치열한 투쟁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저기서 보트를 타고 해양오염 감시활동도 했었지….
신산공원, 퀴어의 장소로 거듭나
우리는 제주퀴어문화축제(이하 제주퀴어축제)가 열리는 신산공원으로 갔다. 신산공원은 제주시에 있어 서둘러야 했다. 제주시로 진입하니 확실히 차가 많아져 밀렸다. 신산공원 근처에 경찰이 많이 보였다. 올해 두 번째로 열리는 제주퀴어축제에 동성애혐오 기독세력들이 몰려와 축제를 방해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어 경찰이 동원된 것이다.
▲ 행진을 막는 혐오세력을 뚫고 도로로 달려나가는 퀴어문화축제 조직위.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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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혐오세력이 방해해도 신나게 놀아야 축제다. 제주에 있는 여러 성소수자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이 부스를 차리고 소소한 행사를 열었다. 마침 평화활동가들이 손을 잡고 빙 둘러서 춤을 추고 있었다. 뭔가 평온한 느낌, 다른 지역 축제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얼마 후 행진을 알리는 흥이 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행진을 하기 전 제주퀴어문화축제 김기홍 조직위원장을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김 조직위원장은 커밍아웃한 퀴어로 올해 녹색당 성소수자비례대표로 지방선거에 출마했다. 그가 커밍아웃한 계기는 지난해 대통령 선거 때 홍준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동성애에 반대하냐”고 묻자 “반대합니다”라고 답하는 방송토론이었다. 대선 후보들의 혐오 표현에 소리라도 질러야 했다. 그는 음악교사로 자신의 성 정체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 짓지 않는 논바이너리(여성과 남성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 성)이며, 성적 지향은 바이섹슈얼(양성애)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이지만 이분법적 성 분할에 익숙한 사람들은 경계를 흩트리는 사람이 낯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이 퀴어축제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청소년 시절 자신의 성에 대해 고민했을 때 마음 편히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나눌 공간이 없었다며, 퀴어축제가 열리는 신산공원은 퀴어들에게 상징적인 장소라고 말했다.
“퀴어축제는 퀴어들의 존재를 보여주는 가시화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퀴어들이 갈 수 있는 장소가 트랜스젠더 업소나 게이 업소 정도인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갈 곳은 별로 없잖아요. 그리고 지난해 축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의당 제주도위원회에 성소수자위원회가 생겼어요. 퀴어 예술 단체 등 여러 단체도 생기고 제주대학교에 퀴어동아리도 생겨났어요.”
혹시 장소를 신산공원으로 정한 의미가 있는지 물었더니 우연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함덕해수욕장이나 시청 등을 생각했는데 혐오세력들의 항의전화로 옮기게 된 것이다. 시청 앞은 세월호 집회만이 아니라 혐오세력들의 집회도 열리는 정치적인 장이니 그곳도 염두에 뒀다고 했다.
신산공원은 제주 4·3 50주년인 1998년에 세워진 ‘4·3 해원방사탑’이 있는 곳이다. 억울함을 푼다는 의미의 해원과, 4·3사건과 같은 사악한 기운이 미치지 않게 해달라는 뜻의 방사탑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혐오세력을 보니 이제 그 탑은 국가폭력만이 아니라 소수자 혐오라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칠 사명도 부여받은 게 아닌가 싶다.
지난해 제주시가 퀴어축제 장소를 불허해 행정소송을 했다. 퀴어축제가 승소를 했지만 혐오세력들이 제주시 곳곳에 퀴어축제를 반대하는 현수막을 붙였다. 덕분에 홍보가 많이 됐다. 그런데 올해는 혐오세력이 예멘 난민들을 혐오하느라 제주퀴어축제는 소홀히 한 것 같다며 김 조직위원장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난해에는 동네 분들도 축제를 둘러보며 떡을 나눠먹기도 했는데, 올해는 혐오세력의 행동이 과격해져 경찰이 펜스를 치는 바람에 아름다웠던 축제의 모습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퍼레이드 대열을 가로막던 혐오세력 탓에 행진이 40분 지연됐다. 심지어 기독혐오세력들은 행진 중에도 난입해 차량 앞에 눕고 멈춰선 트럭 밑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성에 안 차는지 행진차량이 시민을 치었다는 가짜뉴스도 배포했다. 물론 얼마 후 사건의 진상이 언론보도로 밝혀지긴 했지만 이러한 공격은 성소수자들을 숨게 만든다.
축제 참가자들은 행진을 마치고 신산공원으로 들어왔으나 아쉬움으로 자리를 뜨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축제, 서로의 존재를 지우지 않는 축제이기에, 성소수자 혐오로 가득한 세상으로 나가기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정지킴이로 평화활동가이기도 한 최혜영 퀴어축제 조직위원은 “살아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정말 온몸으로 느낀 한해였다”며 “퀴어와 퀴어의 친구들이 소중한 친구들을 지키며 내년에 만나자”라고 마무리했다. 우리도 아쉬움을 뒤로 하고 강정으로 넘어왔다.
▲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옆 텃밭 정선녀 회장.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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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움을 잊게 해주는 땅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보니 하늘이 갰다. 우도에서 강정으로 넘어와 강정지킴이로 활동하는 정선녀 공소회장을 만났다. 땅콩농사를 짓던 농사꾼답게 뒷밭에서 김을 매고 콩밭을 살피고 있었다. 강정지킴이들과 함께 땅콩농사를 짓는 텃밭은 폐기물을 쌓아 뒀던 곳이라 2~3년은 무상으로 임대받았다고 한다. 작은 텃밭이지만 농작물을 보는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우도에서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땅을 살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 오는데 마음의 갈등이 있었지. 2007년부터 해마다 강정에 오다가 2012년엔 아예 짐 싸들고 왔거든. 그런데 오자마자 경찰들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흙으로 가자!’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지으면 잡념과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게 생각나는 거야. 처음에는 공동묘지 2천 평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어. 마을소유의 공동묘지인데 묘지가 없어서 5년 계약으로 밭을 일궜지. 거기 가면 너무 행복한 거야. 그래서 다시 여기에 밭을 일구었지.”
이제 육십이 된 그가 평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4·3 때문이다. 4·3때 아버지가 억울하게 총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자랐다. 제사 때 위폐 없는 조상상을 보곤 누구 상이냐고 물으면 어른들은 ‘알려고 하지 말고, 들으려고도 하지 마라’고 했다.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는 4·3때 행불된 사람, 죽어버린 삼촌들이지. 그래도 말을 아예 못했어. 연좌제 때문에 쉬쉬했지.”
게다가 그가 살던 모슬포에 60년대까지 미군들이 있었는데, 전투기나 헬기가 하늘에 오르면 섬 전체가 달달 떨었고 주민들이 느낀 두려움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공포들이 고스란히 체내에 쌓여도” 그대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세대부터는 달라진 것 같다고 했다. 4·3을 겪은 어른들은 트라우마 때문에 군이나 경찰에게 폭력을 당해도 소리도 못 질렀지만 자신은 당당하게 경찰과 해군에게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따지지 않느냐며 목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4·3은 정말 반인권적이고 비민주적인 테러”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 강정포구에서 바라본 해군기지.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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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기지 앞 100배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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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처를 제공해준 동백동산
4·3사건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미 군정 체제에 대한 불만과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투쟁, 그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다. 4·3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제주 곳곳이 4·3유적지다. 4·3유적지로 알려진 곳은 낙성동 성터와 묵시물굴, 북촌 옴팡밭과 너븐숭이, 동광 큰넓궤 등 주로 학살의 장소다.
우리는 학살 장소이자 영화 <지슬>의 촬영장소이기도 한 동백동산으로 갔다. 주민들이 나무도 베다 쓰고 숯도 구워다 팔던 동백동산은 곶자왈이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의 합성어로 된 제주어다. 곶은 숲을 뜻하며, 자왈은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이 공존하는 곳을 말한다. 해발 100~600m 지역에 있는데 제주도 면적의 6% 정도 차지한다.
▲ 묵시물굴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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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숲을 지키기 위한 약속 중 하나로 ‘동백나무는 베지 말자’고 했다. 나무를 베는 것보다 동백씨로 기름을 짜는 것이 경제효과가 더 커서다. 그 덕에 울창한 동백동산은 30만 평이나 된다.
동백동산습지센터에서 제주생태관광협회 고제량 대표를 만났다. 고 대표는 환경전문가로 2010년부터 국립습지센터의 지원을 받아 주민역량 강화사업을 8년째 하고 있다. 그는 환경전문가이기에 지역에 가면 자연이 주민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 파악한다. 선흘 1리 주민들에게 동백동산의 공급서비스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 답이 너무나 놀라웠단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생태계서비스 중에서 공급서비스가 뭐냐고 물으면 용암동굴 은신처 제공이라고 써요. 공급서비스에 은신처라니 너무 웃기잖아요. 열매나 땔감처럼 직접적으로 물건을 주는 게 공급서비스거든요. 주민들이 그러세요. 4·3때 (동백동산이) 우리를 숨겨줬잖아!”
국가는 배신했지만 자연은 은신처를 제공하며 주민들을 보살폈던 것이다. 1948년 10월 무장대를 토벌하겠다며 중산간지역 소개령이 내려졌다. 선흘1리 사람들은 3일만 견디면 되겠지 하고 굴에 숨어 살았다. 그러나 누군가의 고발로 은신처가 발각됐다. 11월 21일 토벌대는 200여 명이 숨은 묵시물굴과 50여 명이 숨은 도틀굴에 수류탄을 던지고 박격포를 쏘아댔다. 시신수습도 못하게 불태웠다. 끔찍한 학살이었다. 주민들이 4·3에 대해 입을 뗀 것은 작년부터다. 피해유족들을 침묵하게 할 만큼 학살은 강렬했고 연좌제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 묵시물굴 내부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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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공동체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묵은 갈등이 있으면 힘들어요. 묵은 갈등을 풀고 우리가 목표를 같이 세우면서 잘 친해지는 게 기본이어서 말했는데 어르신들은 건드리지 마라, 화해는 절대 안 된다 그러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누구네 아방이 말해서 우리 아방이 죽창에 찔려 죽었는데 어떻게 화해하느냐고 그래요.”
밀고한 사람이나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출신 가족들이 이웃에 살지만, 그들과 웃으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70년 전인 부모 때부터 이어진 고통과 트라우마는 현재진행형이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재작년에 마을주민 130여 명이 모여 동백동산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를 논의했는데 70대 이상 어르신들께서 당신들도 뭐라도 하시겠다고 의욕을 보이시는 거예요. 그래서 시작한 게 매주 한 번씩 센터에 나와서 살아온 삶을 그림책으로 그리는 작업이에요. 그걸 한 분이 한 권씩 책으로 만들었더니 14권이에요. 우리 마을엔 작가가 14명인 거지요. 하하. 그런데 모든 얘기에 4·3이 나와요. 살아온 곡절이 각각 다른데도 말이죠. 북콘서트를 하는데 말하는 어르신도 울고 듣는 우리도 울었어요. 어르신들이 그러세요. ‘아이구 속이 시원하다’ ‘살풀이한 느낌이다’ 그동안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림책을 그리면서 풀어낸 거지요.”
그동안 4·3을 말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말할 수도 있고 들어주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전보다 주민들의 표정이 밝아졌단다. 위령비를 세우자는 이야기도 최근에야 나왔다. 가기를 꺼리던 동백동산에도 가신단다.
▲ 동백동산 [출처: 김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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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푸르른 하늘을 보며 생각한다. 국가폭력의 희생자와 소수자들에게 숨으라고 침묵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뭘 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이 더 이상 침묵에 숨지 않도록 못다 한 이야기를 더 들어야겠구나. 가시화 전략만큼 중요한 사회적 듣기 전략은 또 하나의 동백동산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워커스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