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과 비물질
태어나서 처음 입에 넣었던 불판에 구운 소고기의 맛을 잊지 못한다. 홍대와 신촌 사이의 허름한 고깃집이었고 ‘갈비살’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부위였다. 삼겹살, 목살, 껍데기 외에 다른 메뉴는 사정권에 들어오지 못하던 때였다. (지금도 여전하다.) 붉은 피가 채 빠지지 않은 고깃점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신세계가 펼쳐졌다. 고소한 향이 입안에 퍼지고, 뒤이어 야들야들 씹히는 육질은 감탄사와 함께 소리 내 웃게 만들었다. ‘아, 이것이 ‘고기’라 불리는 음식이구나.’ 아직도 소고기를 먹을 때면 늘 이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바의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때 맛을 보지 못했다면 여전히 닭은 새고, 돼지는 돼지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니까. 고기는 역시 소고기다.
그때가 이십 대 중반이었다. 이십 대 중반이 되도록 불판에 구운 소고기를 맛보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어머니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구운 고기를 드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으신 뒤에는 굽지 않은 고기도 드시지 않는다. 그러면서 늘 달걀과 우유는 끊지 못하겠다 말씀하신다.
극악무도하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축산 시스템을 안 뒤부터 고기를 먹을 때면 늘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소고기를 입에 넣는 순간 불편한 마음은 혓바닥 위에서 녹아 버린다. 어쩌면 어떻게든 소고기는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먹지 못해 억지로 끊는 중이다. 자발적 소고기 섭취는 끊었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런데 왜 ‘소고기’라는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 입안에 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걸까?
새부터 끊어 보자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이 새 축산이기도 했고, ‘치킨만 안 먹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안일한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치킨이 눈앞에 당도하는 상황이 오자 여지없이 손가락을 쪽쪽 빨며 뼈를 발라먹고 있었다.
최근 채식주의자 어머니와 함께 평소 가 보고 싶었던 채식주의 식당 순례에 나섰다. 이제 두 곳에 다녀왔는데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음식의 가격대가 조금 높긴 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 돈이면 소고기를 구울 수 있지 않은가! 어쩌자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 담배를 끊은 인간과는 말도 섞지 말라던데 고기를 끊은 인간 역시 말을 섞으면 안 될 것 같다.
(워커스12호 201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