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슬퍼할 시간조차 주지 않나요. 빈소는 슬픔보다 긴장의 연속이에요. 아무런 힘도 없는 평온한 우리 가족과, 사망 책임을 묻는 국민을 왜 1년 가까이 괴롭히나요?”
– 9월 29일, 고 백남기 농민의 차녀 백민주화
경찰과 서울대병원의 ‘쿵짝’
백남기 농민이 숨진 9월 25일. 약 800명의 시민이 장례식장을 지켰다. 경찰은 이미 백남기 농민 사망 전부터 서울대병원에 대규모 경력을 배치했다. 경찰은 장례식장을 봉쇄하고 부검 영장을 신청했다. 부검 시도 소식을 듣자 시민들은 격분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최성영 서울지방경찰청 제1기동단장은 “불법시위는 막아야 해!”라며 소리쳤다. 다툼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 기자는 머리를 다쳐 응급 후송됐다. 시민의 항의 끝에 경찰은 오후 7시쯤 철수했다. 이날 경찰이 철수하지 않고 법원이 부검 영장을 발부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부검 영장의 유효 기간은 오는 25일이다.
백남기 농민의 주치의였던 백선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과장은 사망 종류를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기재했다. 경찰은 9월 25일 병사를 두고 “사인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영장을 신청했다”고 말했다. 백선하 과장은 병사 논란이 일자 10월 3일 “유족이 적극적인 치료를 원치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병사로 표기”했다고 재확인했다.
서울대병원과 경찰의 호흡이 의심쩍다. 작년 사고 당시 응급실 의사들은 모두 “가망이 없어 요양원으로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유족에 권유했다. 하지만 백선하 과장은 몇 시간 뒤 등산복 차림으로 응급실에 급히 와 수술하자고 했다. 백남기투쟁본부는 사고 당시, 혜화경찰서장이 서울대병원장에 긴급 협조 요청을 보내 백선하가 수술을 집도한 것을 확인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김경일 신경외과 전문의는 지난 9월 30일 “그때 돌아가셨으면 명백히 물대포로 돌아가신 것이다. 이 효과를 줄이기 위해 생명을 연장한 것이라면 수술은 성공”이라며 정치적 고려에 의한 수술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기 전인 9월 22일 백선하 과장은 가족의 의사 소견서 요청을 거부했다. 경찰은 두 달여 전인 7월 17일에 “백남기 씨가 위독하다면서요”라며 대책위에 전화했다. 하지만 당시 어느 가족도 백남기 농민이 위독하다는 것을 서울대병원으로부터 듣지 못했다. 또한, 이날 서울대병원은 경찰에 “시위 단체들이 병원 시설물을 점거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판단한다”며 시설 보호를 요청했다.
서울대병원장 서창석은 박근혜 대통령 주치의 출신이다. 백선하 과장은 2006년 황우석 사태 때 조작된 논문에 공동 저자로 올라 징계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정치적인 수준에서 논할 것도 못 되잖아요”
10월 4일까지 전국 129곳에 백남기 농민 분향소가 설치됐다. 경찰청은 백남기 농민이 숨지자마자 전 지방청 경비과장에게 분향소를 차단하도록 지시한다. 경찰청 경비과는 “분향소 설치 용품은 미신고용품으로 차단, 분향소 설치 시 미신고집회로 차단, 폭력 행위 발생 시 대비 경력 적극 개입”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국가에 의해 죽음을 당한 농민의 추모를 국가가 막았다. 하지만 시민들은 경력을 철수시켰다.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지키려 밤을 새웠다. 장례식장 로비가 가득 찰 만큼 후원 물품을 보냈다. 10월 1일 백남기 농민 추모 범국민대회에 3만 명이 집결했다. 이 민심은 청와대에 들릴까?
“내가 속한 세상이, 국가가 불편해요. 사람으로서 불편해서 나왔어요.” 이한솔 씨는 지난 28일 ‘국가에 대한 의무’인 예비군 훈련으로 군복을 입은 채 촛불집회에 왔다. 그는 먼저 구석에서 흰 봉투에 조의금을 담아 유족에 전했다. 그는 “처음으로 촛불 집회에 왔어요. 정치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백남기 농민은 나이 드신 분이고, 옳은 일을 하시다가 물대포를 맞았고, 이 때문에 300일 넘게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정치적인 수준에서 논할 것도 못 되잖아요. 나라도 사과드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조의금으로 얼마를 냈냐는 기자의 질문에 “얼마 되지 않아요. 9천 원이요. 지갑에 있는 돈 전부였어요”라고 답했다.
“이쪽으로 와서 밥 먹고 가세요.” 40세 남성 정승렬 씨는 어르신이 돌아가신 다음 날부터 조문을 왔다가 매일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음식 준비를 거들거나 길 안내를 하는 등 단순한 일이지만 사람이 많을 때는 애를 먹기도 한다. 그는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마음 아파 조금이라도 거들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14일 현장에 있었어요. 어르신이 쓰러지는 걸 목격했죠. 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누구의 지시가 있었으니 물대포를 쐈을 것 아닙니까? 정부가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하면 좋겠어요”.
조상국 전북 농민회 의장은 28일 촛불집회에서 “우리 농민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습니다. 한평생 농사만 지었는데 돌아보면 너무 힘든 기억만 남아 있어요. 쌀값이 25년 전 수준이지만 그래도 농민들은 추수에 정성을 다하고 있어요. 백남기 어르신도 농산물 가격 보장을 요구하셨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민간 투자 활성화 대책을 추진하면서 자본에는 땅 주고, 돈 주며 농사를 짓게 한다고 울화통을 터뜨렸다.
“너무 늦게 왔어요.” 집회 대열 끝에서 발언을 듣던 40대의 한 여성. 천안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부검 영장에, ‘시체놀이’라니…. (정부 여당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21세기가 맞는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요. 탄압의 끝이 없는 것 같아요.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한국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어요.” 지역에서 시민단체 일을 한다는 그녀는 백남기 어르신의 소식을 듣고도 너무 늦게 왔다며 자책했다.
경찰은 국가의 중앙행정기관이다. 서울대병원은 국가중앙병원이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작년 11월 14일 후 지금까지 국가는 없다. 서울대 의대생과 서울대 의대 동문회, 전국 의과대 학생, 전국 약사, 한의사 등 1,828명의 의료계 인사가 릴레이 대자보로 서울대병원의 병사 판단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러야 국가는 나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