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셋’의 의미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의미한다. 따라서 코르셋을 벗는다는 것은 이러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여성의 저항, 해방의 몸짓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댁 앞에서 코르셋 벗기’는 가능할까? 이것은 가족(가족법상 시집은 친족이지 가족이 아니다)에 대한 문화적, 제도적 규범을 비롯해 가족 내에서의 차별적 역할, 임신, 출산, 가사노동 등 여성의 생산과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와 자연화(naturalize)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가족’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은 당대는 물론 역사를 이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혼자서 혹은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치거나 이혼하기도 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타인을 죽이기도 했다. 한 보고서에 의하면 청주 여자 교도소에 남편 살해로 재소 중인 여성의 80%가 오랜 시간 극심한 폭력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는 이들을 범죄자가 아닌 생존자(survivor) 혹은 저항한 사람으로 바라본다.
정말, 가족 내부에서 ‘코르셋 벗기’는 가능할까? 내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직적인 운동은 물론, 온라인 페미니즘은 면 대 면(face to face)의 활동은 아니지만, 일정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구성원들이 정당성 확보와 지지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힘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건에 놓여 있다(이들에 대한 신상 털기와 무작위적 욕설, 협박은 반드시 단죄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족은 (인구 정책, 출산 정책, 사회복지 정책, 젠더화의 기초적인 사회화 과정을 담당하는 가장 정치적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담장을 치고 있는 매우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게다가 앞의 두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 가족 개별의 역사와 조건에 따라 여성이 처하는 맥락도 모두 다르다. 존비속에 대한 살해나 극심한 유기, 폭력 정도가 미디어를 통해 선정적인 방식으로 가끔 다루어지고 그마저도 정상가족의 재구성이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수단이 된다. 지극히 사적(이라고 생각하는)인 내용과 개별적 맥락의 이야기들이 가족의 높은 울타리는 물론, 사회의 더 높은 담장과 구획을 넘어 횡단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그 내부에서 여성들의 코르셋 벗기는 저항전략이든 어떤 임계점을 견디지 못한 것이든 사회적으로 발화하기 힘들다.
시댁, 가족과 관련한 ‘코르셋 벗기’의 함정과 패인의 주요인은 문제 제기가 개인에게 치환되는 데 있다. 1인 가구의 증가, 출산율의 하락 등 가족의 변화를 보여주는 많은 징후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의 일상은 여전히 이성애적, 가부장적, 정상가족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제도, 문화 코드로 점철되어 있음을 느낀다. 사회적 이슈로 취급되지 못하는 개별 여성들의 고군분투는 그들 각자의 고통(을 증폭시키거나)과 패배로만 기록되고 구조적 변혁은 요원한 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족을 비정치적 영역으로 착시화 하려는 것이 비단 국가나 자본만은 아니다. ‘가족 이데올로기’란 말에서 알 수 있듯 ‘가족’은 매일 매시간 반복되는 농밀한 일상과 문화적, 제도적 실천이 섞여 사람들에게 뿌리내려 있다. 내 주변 진보를 자처하는 수많은 남성 가운데 가족 문제에 비판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가족 자체에 비판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심하다. 이들에게 아내폭력 등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폭력은 ‘건강한 가정’의 해체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문제지 가족의 구성과 역할,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지 않는다.
가족이 사회화의 주된 기능을 담당한다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사회화 자체가 성별화 되어 있다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나아가 가족이 그리고 여성이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가 아니냐는 문제 제기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만큼 ‘가족’을 능멸하는 일이 된다. 자동차 등 대공장 사업장에서 주야 맞교대를 고집하는 이유가 착취적 노동시간을 통해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라는 노조의 주장은 틀리지 않다. 소방 행정은 현재 당비비(당번-비번-비번. 당번은 24시간 근무를 의미) 근무 체제를 시범 실시 중이다. 행정 영역에서의 24시간 근무체제나 남성 중심 공장에서의 밤샘노동, 장시간 노동을 추동해 내는 상상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아내’라는 존재와 역할이 아닐까? 한편 아내폭력의 절반 이상이 살인, 방화, 상해 등으로 강력 범죄화된다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가정폭력의 영역에서 범죄율을 낮추려는 사법적 노력은 더디게 느껴진다.
가족이 낭만적 휴식의 공간이 아니라 노동의 공간이며, 친밀성이 아니라 위계와 폭력을 통해 작동한다고 페미니스트들이 그간 수없이 논증하고 주장해 왔지만, 생각보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공고하다. 한정된 사회적 자원과 빈약한 사회보장 등 삶의 기반이 일천한 구조에서 그나마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자기편, 기댈 곳, 쉴 곳,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가족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공고함은 그 내부에서의 문제 제기와 투쟁을 무화하는 반대급부의 공고함으로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테제는 여전히 가장 적실해 보인다.
이사 계약을 앞두고 ‘남편의 형’이 나와 남편이 별거하던 동안에 우리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은 또 손을 벌리는가 싶어 너무 화가 났지만, 가서 사인만 했을 뿐 그것이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인지를 몰랐단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겨우 일부를 갚은 ‘남편의 형’이 그날 밤 보낸 ‘사랑하는 제수씨’로 시작한 문자 메시지는 가관이었다. 채무자로서가 아니라 마치 우리를 위해 돈을 마련한 것처럼, 수십억 사기 칠 능력이 있으나 집안의 명예와 ‘내 새끼’(나의 아이들을 이렇게 호명한다)에게 오명을 남길까 싶어 치지 않았단다. 매사 경계 없기와 염치없기가 시어머니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을까?
나는 결정적으로 “‘내 새끼’들이 좀 더 자란 후(이것은 당신의 어머니가 나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는 의미다) 어머니는 나에게로 와 나의 품에서 돌아가셔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문장에, 이성을 잃고 당신의 어머니를 당장에 모셔가라는 의미의, 매우 우회적인 답 문자를 보내고 재차 못 박았다. 이로써 나는 막장 드라마의 단골 메뉴인 시어머니를 ‘디스’하고 ‘토스’하는 ‘잡년’의 반열에 올랐고 격하게, 부부싸움을 반복하고 있다. 누구나 가슴에 하나씩은 칼을 품고 있다 했던가. 지금 나의 칼은 작두처럼 크고 육중하며 퍼런 서슬에,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 칼을 휘두르기도 하고, 칼이 저 혼자 공중을 날기도 한다. 또 그 칼을 작두 삼아 푸닥거리를 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중이다. 그 칼이 나 아닌 사람을 칠지 아니면 내 몸으로 날아들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옳고 선한 피해자이고 억압받았다는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남편과 그의 가족들이 틀리고 악한 가해자라는 것 또한 아니다. 집안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서자로서의 설움을 톡톡히 겪은 ‘남편의 형’은 어려서부터 집안을 책임지는 가부장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는 걸 알고 있다. 변사자에 대한 사인 조사를 위해 경찰이 맨 처음 확인하는 것은 핸드폰의 사채 독촉문자 여부다. 사업 실패 후 오랜 시간 빚에 시달린 그가 입만 열면 하는 ‘내가 다 책임질 거야, 내 새끼들 다 품어 안을 거야’라는 말은 실은 자신이 끼친 폐와 무능력을 합리화하고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권력과 책임의 경계에서 스스로 성찰하는 법을 잃어버린듯하다. 가족은 단지 전통도 당대의 반영만도 아니다. 가족은 전통과 당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조건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인 일상을 조직한다. 여기에 인간관계의 정동이 합쳐지면 그 많은 변수와 스펙트럼을 가늠하기조차 어려워진다. 이 두터운, 이 다양한 변주들을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가.
칼날이 누구를 향할지 모르는데, 나는 지금 날 선 작두에 올라 펄펄 뛰고 있다.
/ 우물 (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