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도시개발의 탈출구
“비록 전임 시장 때의 일이지만, 서울시장으로서, 행정의 책임자로서 진심을 다해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취임한 지 2개월여 지난 2012년 1월. 박원순 서울시장이 용산참사 3주기 추모 행사에 참석해 유가족들과 피해 철거민들에게 사과하며 머리를 숙였다. 사과와 함께 ‘뉴타운·재개발사업의 인권적 전환과 해결’에 의지를 밝혔다. 그 후 서울시는 ‘뉴타운·정비사업 신(新)정책구상’을 발표하면서, 개발사업의 정책방향을 ‘소유자 위주에서 거주자 중심으로’, ‘전면철거 중심에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중심으로’ 전환한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뉴타운·재개발 수습방안’으로 실태조사를 통해, 정비사업의 추진 및 해제의 진로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해제 지역 등을 도시재생사업의 하나인 주거환경관리사업 등 대안사업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다음해 2013년 6월 「도시재생특별법」’이 재정되면서, 바야흐로 도시재생의 시대가 열렸다.
일련의 과정을 보면 박원순 시정의 서울시가 선도한 도시재생의 탄생은 용산참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계기로, 3~40년 지속돼온 개발 패러다임의 전환을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용산참사가 한국사회 개발주의 욕망의 정점에서 발생한 참사였고, 가혹하지만 참사를 거치고 나서야 반성과 대안 제시가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보다 분명히 봐야 할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도시재생’ 또한 자본주의의 개발주의 노선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애초 2008년 금융위기와 맞물려 부동산 경기가 둔화되면서, 곳곳의 개발 사업들이 주춤하게 됐다. 가상의 계획만으로 자금을 동원하던 프로젝트 파이낸싱(PF: Project Financing) 대출이 자금압박으로 막혀 갔기 때문이다. 금융상품을 통해 자금을 동원하는 개발이 어렵게 되자 소규모 정비라는 형식으로 이를 정치적‧정책적으로 수렴한 것이 도시재생이다. 즉, 더 이상 기존의 대규모 개발방식이 자본의 이윤을 무한정 보장해줄 수 없게 된 경제위기의 조건에서, 개발의 새로운 탈출구로 ‘도시재생’이 등장한 것이다.
불행한 참사와 선량한 행정가의 등장이라는 한국적 상황만으로 도시재생의 등장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우리만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재생은 이미 서구 발전주의 도시화 과정에서도 도시공간에 대한 자본의 새로운 포섭 과정으로 등장했다.
유령마을
2016년 4월 12일 오후 1시 20분경, 화염에 휩싸여 쓰러진 한 남성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민주노총 건너편, 돈의문 뉴타운 지역의 철거민이 용역들에 둘러싸인 채 강제집행에 항의하며 분신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2017년 9월, 그 곳은 ‘돈의문 박물관마을’로 개장됐다. “오래된 도시조직, 삶과 기억, 역사적 층위가 잘 보존되어 재생한 국내 최초 마을단위 도시재생 사례”라고 설명돼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도시 조직, 삶과 기억, 역사적 층위가 잘 보전되어 재생한’ 그 곳에, 원통한 철거민들의 삶과 기억 그리고 죽음은 보존되지도 재생되지도 않고 지워졌다.
돈의문 박물관 마을은 전면 철거방식이 아닌 ‘국내 최초 마을단위 도시재생’으로 ‘보존’한 사례라며, 서울시는 도시재생의 성공 사례지로 소개하곤 했다. 도시재생 사례지인 이곳은 엄밀히 말해 뉴타운 개발에 따른 도시환경정비사업 지역이다. 뉴타운 정비사업 조합이 2,533세대의 매머드 급 ‘경희궁 자이’ 아파트 단지와 주상복합 단지를 짓고 근린공원 조성을 위해 기부채납 한 땅을 서울시가 기존 건물들을 리모델링해, 전시 및 문화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 돈의문 박물관마을이다. 전면철거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짓는 명분으로 받은 한 귀퉁이 공간에 건축물만 보존하고 사람은 보존하지 않은 마을을 조성한 것이, 돈의문 박물관 마을의 도시재생 사례이다. 그래서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마을’이라는 냉소까지 듣는다. 죽임당하고 삭제된 원통한 영혼의 절규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틀린 비유도 아닐 것이다.
박물관마을의 사례가 여느 도시재생과 다르고 드문 경우일지 몰라도, ‘도시재생’의 현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흔히 전면 철거의 뉴타운·재개발 정비사업의 대안이라고 일컫는 도시재생은, 새 시대의 첫차가 아니라 구시대의 막차에 올라 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개발주의 패러다임 전환의 시작이 되지 못하고, 순환을 기다리는 개발의 끝자락에 불안하게 올라 타 있다.
토건의 연속, 도시재생 ‘뉴딜’
기존의 도시 개발은 대규모 속도전의 철거 방식으로 폭력적으로 치러졌다. ‘도시재생’이 이와는 다른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윤만을 목표로 거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축출과 교체를 수반하는 재개발을 막고 지역에서 주민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헌신하는 도시재생 활동가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도시재생이 도시공간에 대한 자본의 새로운 포섭 전략이기도 하지만 ‘뉴타운 반대’라는 외침을 보수적으로 수렴한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핵심으로 공약했고 추진하기 시작한‘도시재생 뉴딜’은, 개발의 순환열차에 올라탄 도시재생의 토건사업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공약으로 발표된 “5년간 500곳 50조”라는 규모와 속도의 제시는, 도시재생이 패러다임 전환이 아닌 연속이라는 의구심을 확증하게 한다. 기존 도시 개발의 대규모, 속도전, 자본 중심이라는 반성에서 출발한 대안으로 도시재생이 이야기될 때 소규모, 점진적(천천히), 주민주도(참여)라는 가치가 부각됐었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도시재생 뉴딜’은, 표면적인 가치에 위배되는 규모와 속도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지자체의 공모방식으로 선정되는 뉴딜사업은 지자체의 중앙정부 돈 따먹기로 변질될 우려가 높다. 벌써부터 도시재생 활동가들의 입에서 문재인식 4대강 사업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느리게 확장되는 주민들의 참여는 실패로 간주되고, 단기적 성과를 가시화하는 데 집중하면서 주민 참여는 소유자 중심의 동원과 관리의 맥락으로 전락될 수 있다. ‘재생’보다 ‘뉴딜’에 방점을 찍은 사업은, 관 주도의 성과제일주의와 단기간에 동시다발적인 추진으로 인해 ‘민간 활력 촉진’이라는 이름의 소규모 민간개발을 촉발할 우려가 크다. 정부가 추진하는 도시재생뉴딜사업지로 지정된 곳을 개발 호재 지역으로 인식하며 부동산 투기세력들이 새로운 먹잇감으로 달려들고 있다. 기존의 전면철거에 따른 집단적 ‘강제퇴거’는, 도시재생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돼 의도하지 않은 부수적 현상으로 치부되고 있다. 물리적 공간만 바뀌거나 삶이 아닌 사람이 바뀌는 도시재생은 규모와 방식만 다른 토건사업일 뿐이다.
쇠퇴하는 도시와 성장 전략
사실 이러한 도시재생의 토건 본질은 이미 「도시재생특별법」에 드러나 있다. 특별법에서 정의하는 도시재생이란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법에 따른 ‘도시재생사업’은 도시재생활성화계획에 따라 시행하는 모든 개발사업들을 통칭한다. 벽화 그리기나 집수리 정도가 아니라 기존의 전면 철거형 주택재개발사업이나, 뉴타운사업, 도시개발사업, 역세권개발사업, 산업단지개발사업, 시장정비사업 등도 모두 도시재생특별법에서 규정하는 ‘도시재생사업’이다. 결국 도시재생사업도 도시의 보존이나 지속 가능성보다는 성장에 목표를 두고 있다. 특히 도시공간을 ‘쇠퇴하는 도시’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 전략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특별법에서는 쇠퇴의 기준으로 인구감소, 사업체 이탈, 건축물 노후도를 제시하며, 이중 2가지 이상 충족하는 지역을 ‘도시재생활성화지역’으로 지정할 수 있게 했다. 서울시는 이 기준에 따라 서울의 2/3에 해당하는 지역을 쇠퇴 지역으로 보고 있다.
지난 여름 박원순 시장이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에서 한 달 살이를 한 후 발표한 ‘강북 우선투자 전략’은 이러한 쇠퇴 도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균형발전을 위한 불균형 투자’라고 설명한 강북 우선 투자 전략은 ‘강북을 강남처럼 만들어 주겠다’며 균형발전 전략으로 뉴타운 개발을 발표한 이명박의 구상과 다르고도 같다. ‘강북을 강남처럼’ 고급 아파트촌으로 평평하게 만들겠다는 이명박 식의 구상과는 달리, 서울시도 ‘강남과는 다른 강북’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지역재생에 집중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강북이 경쟁력이 없다, 혹은 쇠퇴했다고 진단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강북의 경쟁력은 저층주거지를 중심으로 한 저렴한 주거지부터 중고급 주거지가 다양하게 공존하면서 주민들이 계층별로 다양화돼 있다는 것에 있다. 이런 경쟁력은 현재 존재하는 경쟁력이지, 새롭게 창출해야 할 경쟁력이 아니다. 도시재생사업이, 강북 지역을 ‘경쟁력 없음, 낙후, 쇠퇴’로 진단하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성장주위에 치중한다면, 기존의 경쟁력인 저렴 주거지의 존속은 무너진다. 도시 성장의 결과물은 다양하게가 아니라 차별적으로 분배된다.
여기 다시, 사람이 있다
결국 용산참사를 통해 다시 묻게 된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가 “누구를 위한 재생이냐?”는 질문으로 반복된다. 도시재생사업으로 가장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그 곳의 세입자들, 가난한 사람들, 배제된 사람들이다. 개발에서 삭제된 이들이 재생에서 삭제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용산을 반복하게 된다. 용산에서 외친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절규가 박제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두가 도시재생을 말하는 시대에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사건인 양 고립된 개발지역과 대안으로 말해지는 도시재생사업지에도 생동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건물은 쇠퇴했을지 몰라도, 사람은, 삶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여기, 다시 사람이 있다.(워커스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