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방탄소년단이 사로잡은 메르켈 세대(링크)
②노조파괴왕 메르켈, 그는 실패했지만 승리했다
독일의 실업률은 지난 8월 3.4%로 세계적으로 가장 낮은 수위를 보였다. 독일 실업률이 낮아진 계기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사민당 정부가 추진한 하르츠 개혁 덕분이다. 이는 독일식 노동유연화 조치로 실업률을 2003년 약 10%에서 15년이 지난 현재 3% 대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최근 〈경향신문〉의 ‘긴급진단, 한국 경제의 위기’ 기획처럼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독일 하르츠 개혁을 꺼내들며 노동자의 양보가 최선인 듯 훈수를 둔다. 하르츠 개혁이 경제위기를 이유로 노동계의 양보를 강제한 낸 조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3% 대라는 마의 실업률에도 함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일을 해도 가난한 ‘위킹푸어’가 갈수록 늘고 있는 현실이다.1)
최근 독일 한스뵈클러재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에서 2014년 사이 10년 간 워킹푸어 노동자 수는 10%나 늘었다.2) 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일을 하고 있어도 생계가 어려워 보조금을 받는 노동자도 100만 명에 이른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독일식 노동유연화 조치가 유럽 전역에도 관철돼 왔다는 것이다. 바로 슈뢰더 총리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 모델을 유럽연합에 13년 째 이식해 왔다. 그리고 그 13년 동안 성장한 세대가 바로 메르켈의 세대다.
메르켈의 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집권한 2005년은 한창 유럽 헌법이 제정되던 시절이었다.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으로 시작된 유럽연합으로의 통합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그러나 곧이어 2008년 가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유럽에 연착륙하면서 유럽연합은 ‘사회적 유럽’을 위한 기관에서 전 유럽 노동자와 남유럽 나라를 후려 패는 고리대금업자의 추심원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면서 지난 10년 간 유럽의 금융/경제위기는 유럽연합의 위기조치를 통해 각국 정부 예산과 부채 위기로 이어졌고 이 대가는 고스란히 일반 노동자와 생산구조가 허약한 가난한 나라가 치르게 됐다.
이 위기 대처에 앞장 선 메르켈 독일 총리의 칼은 무엇보다 남유럽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향하고 있었다. 임금을 삭감하고 노조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노조 파괴의 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경기 부흥보다는 노동자에게 목줄을 다는 게 목적인 듯했다. 조제 마누엘 바호주 당시 EU집행위원장은 이를 두고 ‘조용한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의 말에서 제목을 따온, 독일 로자룩셈부르크재단의 지난 9월 ‘조용한 혁명과 몰락 사이에서’라는 연구보고서는 이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구조적인 국제 분업으로 만들어진 유럽의 불균등한 자본과 무역관계 속에서 경제위기는 독일을 필두로 경제 강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을 대치시키고 남유럽 노동자의 임금과 권리를 수탈하는 과정으로 조직됐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애초 유럽의 불균등한 경제 구조는 독일 생산체제의 구조적인 우세 속에서 동유럽과 중국이 시장경제로 전환되며 심화됐다. 동유럽과 중국은 독일 등 경제강국들의 직접 투자 및 아웃소싱을 통해 이미 생산체제에 편입돼 있었고, 수출은 이곳을 포함해 이른바 신흥국 시장으로 확장됐다. 이 과정에서 불어 닥친 금융 위기는 유럽 내부의 모순을 증폭시켰다. 위기 대처는 금융자본은 구조하면서도 그 비용을 개별 정부에 청구하는 한편, 각국의 국내 정책 권한을 유럽연합 차원으로 확대해 개별국에 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 개입의 초점은 노동과 임금 관계 정책에 집중됐다.
노동시장 구조를 흔들어라
위기 전 유럽 각국의 노동시장정책은 각국 정부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위기 후 유럽학기제(Europäisches Semester)3)가 도입되면서 각국 경제와 예산, 노동과 사회정책에 유럽연합이 관여할 수 있게 됐다. 애초 학기제는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사항이었으나 2013년 유럽 구조 정책이 시행되면서 구속력이 강해졌다. 가입국의 예산 적자가 과도하거나 거시경제적 균형을 맞추지 못할 경우 학기제는 구속력을 가지며 이에 대한 권고안을 가입국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법적 제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조치는 유럽의 금융안전망 구축을 위한 상설 위기관리 프로그램으로 유럽안정메커니즘(ESM)4)이 2015년 설립되면서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됐다. 이 권한은 트로이카(EU집행위원회, IMF, 유럽중앙은행ECB)가 집행했다. 트로이카는 지불능력을 잃은 국가들에 대출을 제공하기 위한 조건을 규정하고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했다. 이로써 트로이카는 EU 가입국의 국내 정책에 개입하며 각국의 주권을 제한했다. 가령, 각국 임금 상승은 3년 간 9% 미만으로 제한했다. 이 조치를 이행하지 않으면, 교정조치가 요구되며 금융제재도 받을 수 있게 됐다.
트로이카 중에서도 ECB는 이러한 돈 정치를 직접 이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ECB가 2011년 8월 5일 서면으로 이탈리아 정부에 2개월 안에 권고된 구조 개혁을 이행하지 않으면 국채 매입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한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개별 기업 수준으로의 단체교섭 제도 개혁, 공무원 임금 삭감과 해고 보호 규제 완화를 포함하고 있었다. ECB는 비슷한 서한을 스페인 정부에게도 보냈다. 2015년 그리스 정부가 3차 양해각서를 수용하게 된 결정에도 ECB가 그리스 은행에 대한 유동성 공급을 제한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ECB의 이 정책은 처음에는 비공식적이었지만, 2012년 국가 채권을 무제한적으로 구입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공식화됐다.
로자룩셈부르크재단 해당 연구보고서는 유럽 노동시장정책에 대한 유럽연합 기관들의 조치는 전반적으로 구속적이고 독재적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통치권이 국가 수준에서 유럽 수준으로 크게 변했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의 재량권이 크게 제약됐다. 이러한 유럽개입주의는 무엇보다 해고 보호 완화, 실업기금과 최저임금 축소, 단체협약 권한 축소를 강제했고 노동유연성 확대와 임금 감소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남유럽뿐 아니라 거의 모든 유럽연합 가입국에서 노동시장 개혁이 EU집행위원회나 트로이카 또는 유럽 학기제를 통해 유도됐다. 2016년 핀란드에서 채택된 이른바 ‘경쟁력 협정’도 임금 동결과 근로 시간 증가를 나타내는데, 이 또한 EU집행위원회의 국가별 권고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임금노동자 비용으로 위기 해결
유럽연합의 위기 조치는 노동자의 임금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위기 이후 유럽의 경기가 다소 나아지고 고용도 소폭 늘었지만 가입국 대부분에서 임금은 억제돼 있다.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실업, 인플레이션과 생산성이라는 고전적인 변수가 현재 임금 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위기 전 보다 적다. 단체교섭의 적용 범위 축소, 임금 편제의 지방분권화, 불안정 고용과 비자발적 시간제 노동의 증가는 임금 성장의 구조적 침체를 초래했다. 이는 위기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유럽연합의 개입주의로 강력해졌다.
유럽 노동정책 지표를 보면 이러한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유럽연합과 유로존에서 실업률은 각각 7.6%, 9.1%로 줄었으나 그리스(21.5%), 스페인(17.2%)은 계속해서 위기 전 수준 보다 높다. 게다가 남유럽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창출되는 신규 일자리의 다수는 비정규직의 경우가 많았다. 전체적으로 유럽연합에서 2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이 됐다. 위기 초기 비정규직 비율이 후퇴했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해고됐기 때문이다. 2014년부터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이 수는 다시 증가했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불안정 노동관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노조 파괴와 임금 하락
로자룩셈부르크재단의 해당 연구에 따르면, 트로이카가 감독한 위기 조치들로 기존 단체협상과 임금결정구조는 완전히 해체됐다. 거의 모든 유럽연합 가입국에선 분권화와 친기업주의 경향을 나타냈고 임금협상의무도 후퇴했다. 그리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연합 가입국 중 최소 10개국의 단체협상이 분권화됐다. 프랑스, 그리스와 스페인은 현재 산별 협상이 아니라 기업 협약이 일반적으로 선호된다. 단체교섭 제도가 가장 후퇴한 곳은 아일랜드와 루마니아, 그리스였다. 이곳에선 기존 임금 결정 메커니즘이 완전히 파괴됐다.
결과적으로 EU 평균 단체교섭은 2009년에서 2017년 사이 7.9%포인트 감소했다. 대표적으로 트로이카의 감독 아래 루마니아에서는, 2007년에서 2017년 사이 35% 포인트나 떨어졌는데, 이는 단체 협약을 사실상 폐지한 것과 다름이 없다. 2007년에는 모든 노동자의 98%가 단체협상으로 임금을 결정했었다.
그리스에서도 비슷하다. 2013년까지 단체교섭 범위가 급격히 감소했는데 모든 노동자의 83%에서 40%로 줄었다. 그 이후로 그리스는 정부가 단체협상 통계를 따로 발행하지 않는다. 그리스 노동조합총연맹의 INE 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에는 단체 교섭 협약의 6.6%만이 회사 차원을 넘었다. 모든 임금협상의 다수는 개별 노동자와 회사가 개별적으로 진행한다. 포르투갈에선 2011년 단체협상 개혁이 산별 단체 협약을 사실상 폐지했다. 그 후 단체협상을 벌이는 노동자의 수는 190만 명에서 2013년 24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경기 회복기에도 단체협상률이 하락 및 정체하고 있다는 것은 노동시장 개혁을 통해 노조가 구조적으로 약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조가 구조적으로 약화됐다는 사실은 실질임금에서도 나타난다. 위기 때 실질임금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2013년부터는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유럽연합 가입국에서 2017년 실질임금은 여전히 2008년 수준 아래에 있다. 2009년에서 2017년 사이 실질임금은 그리스 26.0%, 크로아티아 13.3%, 키프로스 7.5%, 포르투갈 4.8%, 스페인 1.0%, 이탈리아 2.0%, 영국 1.5%, 헝가리 4.7%, 벨기에 0.6%포인트가 줄어들었다.
결국 유럽 경제위기 대처는 노조 권한을 약화하고 노동자의 임금을 빼앗는 방식으로 귀결됐다. 최근 메르켈 독일 총리는 3년 뒤 사퇴를 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에서 연이은 선거 참패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메르켈이 국내 선거를 실패로 본다하더라도 메르켈의 13년은 그가 대표한 유럽 금융기관과 자본가 그룹 편에선 승리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위기 조치는 노동자와 노조를 향했으며 거꾸로 이들의 ‘방탄’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그 사이 유럽은 극우가 부상하고 역사상 최악의 양극화로 내달려 왔다. 내년 5월 다시 유럽연합 의회 선거가 돌아온다. 계급 의제로 유럽의회 선거를 돌파해야 한다는 유럽 좌파들의 목소리가 주목되는 현실이다.[워커스 49호]
[각주]
1)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2796
2) https://www.neues-deutschland.de/artikel/1103749.armut-das-neue-prekariatwaechst.html?sstr=Gewerkschaft
3)유럽학기제는 2011년 유럽 2020전략에 따라 도입됐다. 각국 의회가 결정하기 전 EU가 예산과 개혁조치를 조기에 검토 한다는 내용이다. 유럽연합은 가입국이 이 조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이 조치는 유럽연합이 각국에 깊이 간여하게 하는 발판이 됐다.(https://de.wikipedia.org/wiki/Europ%C3%A4isches_Semester)
4) EU 회원국들의 재정위기가 타 국가로 전이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목표로 2010년 임시로 설립된 유럽재정안정기구(EFSF)에 이어 설립
[참고자료] https://www.rosalux.de/fileadmin/rls_uploads/pdfs/Analysen/Analysen49_Revolution.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