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옷걸이가 낙태를 위한 도구가 되선 안 된다”
각국 사례로 본 ‘낙태죄 폐지’의 실제 의미
나영(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1973년 1월 22일, ‘Roe v. Wade’ 사건에 대해 미국 대법원은 최종 판결문에서 이렇게 명시했다.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밖에서 스스로 생존이 가능한 시기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여성은 어떠한 이유로든 임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결정을 스스로 내릴 권리가 있다.”
이 판결은 여성에게 ‘임신중지의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여성의 프라이버시권으로 인정함으로써 이후 낙태죄 폐지운동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현재 전 세계 74개국에서 허용사유 제한 없이 ‘여성의 요청에 의한 임신중지’를 합법화했으며,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보험을 적용해 안전한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을 비롯해 많은 국가는 임신중지를 원칙적인 불법으로 정해 놓고 별도의 허용사유를 두는 방식으로 제한하고 있다. 가장 최소한의 수준은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인데, 아프리카의 다수 국가, 필리핀, 이란, 온두라스, 아일랜드 등에서 이 수준으로 임신중지를 금지하고 있고 대부분 처벌 수준도 상당하다. 다른 국가들은 산모의 신체 혹은 정신 건강상 이유, 태아의 건강상 이유, 강간으로 인한 임신,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사회경제적 사유 등에 따라 허용수준을 각기 다르게 두고 있다. 니카라과, 남수단, 엘살바도르, 도미니카공화국 등 6개국에서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임신중지를 할 수가 없다.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수준이 엄격한 국가일수록 위험은 온전히 여성의 몫이다. 의료 접근성은 낮고, 처벌을 피하고자 옷걸이 등을 이용해 자가 낙태를 시도하거나 비위생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시술을 받는 등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비용도 많이 지급해야 한다. 시술을 받기 위해 해외로 가기도 한다. 2008년 WHO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2,100만여 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 시술을 받았고, 850만여 명의 여성이 합병증 등으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다. 안전하지 못한 낙태 시술과 후유증으로 4만 7,000여 명이 사망했다.
보건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낙태죄 폐지’ 요구가 본격화된 지금, 폴란드와 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등 세계적으로도 같은 요구를 가진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며 빠르게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낙태죄’에 따른 처벌과 비범죄화, 합법화의 맥락과 흐름을 몇 개국 사례를 통해 짚어본다.
낙태 범죄화의 정치적 맥락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국제 행동의 날이 있다. 9월 28일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권리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이다. 20여 년 전부터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 여성들은 임신중절 비범죄화, ‘안전하고 적절한 임신중절 시술’을 받을 권리, 임신중지를 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매년 9월 28일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지금은 국제적 수준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여성이 동시다발 행동을 벌이고 있다.
올해도 9월 28일을 전후로 각국에서 여러 캠페인과 행동이 준비되었는데, 특히 폴란드의 ‘검은 시위’가 전 세계적으로 ‘낙태죄 처벌’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촉발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폴란드는 한국과 비슷한 정도의 허용 수준을 두고 있다. 즉 산모나 태아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 정도를 예외로 두고 있다. 사실 이 정도의 허용 수준으로는 임신중지에 대한 제약이 매우 크다. 그런데 극우 정권인 ‘법과정의당’은 이마저도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로만 허용 수준을 제한하려고 해, 이번에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이 법안은 이를 위반할 경우 임산부와 의료진을 최고 징역 5년에 처하고, 심지어 의사가 조언만 해도 처벌받을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수십만 여성의 시위와 규탄으로 결국 폴란드 보수당의 발의안은 폐기됐지만, 동시에 현재의 법을 완화하자는 발의안도 묵살되었다.
폴란드 여성들이 이토록 강력하게 파업과 시위에 나서고 여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이 법안이 비단 ‘낙태 처벌 강화’의 의미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과정의당’은 보수 가톨릭계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극우 정당이고, 이번 발의안은 자신의 보수적 가치를 확실히 드러냄으로써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조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독재를 우려할 정도의 현 상황에서, 이 발의안이 통과되면 집권당에 더욱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함께 작동했다.
종교 집단의 지지를 등에 업고, 권력 기반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보수적 ‘가족 가치’를 내세워 효과적인 여론 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미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의 보수 정부가 취해온 대표 전략이다. 그중에서도 ‘낙태 처벌 강화’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임신/출산/양육 등 사적 영역에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이 보수적 가족 가치를 위한 역할에 길들도록 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래서 사실상 사문화 됐거나 일부 허용 조항이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낙태가 불법 행위로 정해져 있는 이상, 언제든지 정권에 따라 극단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한국이나 이번 폴란드의 사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2014년 스페인에서는 보수 정부가 이미 3년 전에 합법화된 법안을 되돌려 ‘산모의 정신적, 신체적 건강이 위험한 경우’와 ‘강간에 의한 임신’에 한해서만 임신중지를 하도록 제한하려다 실패한 바 있다.
‘낙태죄 폐지’가 답이다
역사적으로 최악의 사례로는 루마니아를 꼽을 수 있다. 1966년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 ‘임신중절수술 금지법’을 시행하자, 10년 사이에 모성 사망률이 800% 증가했고, 거리에는 고아와 노숙 아동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매년 500명에 달하는 여성이 위험을 감수하고 불법 임신중절 시술을 받다가 사망했고, 합병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일랜드 역시 낙태죄 폐지를 위한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데, 아일랜드에서는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 외에는 모든 임신중절 시술이 금지되어 있고, 임신중절을 한 여성은 최대 14년까지 감옥에 갇힐 수 있다. 1992년 강간으로 임신한 14살 소녀는 영국으로 낙태 시술을 받으러 가려 했으나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고등법원의 명령으로 아홉 달 동안 아일랜드 본국에 억류되었고, 산모는 자살 충동으로 위험에 처했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상황으로 ‘자살 충동’을 넣어 수정하려 했지만, 결국 이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20년 후인 2012년에는 사비타라는 여성이 자연 유산의 과정에 있었음에도 시술을 거부당하고 산모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근 아일랜드에서는 관련 조항인 헌법 40조에 대한 8차 수정안이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이면서 ‘낙태죄 폐지’ 요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아르헨티나 역시 산모의 생명 또는 건강이 위험한 경우에만 임신중절이 허용되는 나라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0월 10일 7만여 명의 여성이 모여서 낙태를 결정할 권리와 여성 살해의 종식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낙태 합법화 이후 모성 사망률의 변화는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결정권’이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허구에 불과한지를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낙태가 불법이었던 1974년 이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임신중절을 감행한 여성은 한해 30만 명이었다. 1975년 매월 2명의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절 수술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합법화 이후 낙태 시술로 인한 모성 사망률은 1년에 한 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15세~18세 여성에게 무료로 피임약을 제공하며, 2013년부터는 임신중절 비용 전액을 보험으로 지원받을 수 있게 했다.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 정권의 ‘임신중절 금지법’ 시행 이후 800%까지 증가했던 모성 사망률은 1989년 12월 혁명으로 금지법이 철폐되자 절반으로 감소했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은 결국 여성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밖에 없다. 삶의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출산을 결정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어떤 여성도 이 사회의 조건과 완전히 동떨어져서 임신중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낙태는 태아와 여성의 대립이 아니라, 실제로는 삶의 조건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가 여성과 태아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인 것이다.
‘낙태죄’는 현재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가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해버리는 가장 쉬운 수단이다. 이는 여성의 성적 권리를 통제하기 위한 가부장, 남성 중심 사회가 공모한 결과다.
재생산 정의(justice) 운동을 하는 단체인 ‘재생산 정의를 위한 아시아 커뮤니티’는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가로막고, 재생산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재생산 통제와 여성의 몸과 노동의 착취는 모두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 연령, 이주상태에 기반을 둔 사회적 억압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재생산 통제가 단지 인구 통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 영역에 걸친 구조적 통제를 위해 활용된다는 점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것, 여성을 처벌하는 대신 누구나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라는 것, 그리고 여성의 판단력을 믿으라는 것이다.<워커스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