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문 성교는 안 돼”
매서운 눈길이 온몸에 꽂혔다. 북 치던 5명의 눈길이 내게 쏠렸다. 어깨 위로 박수 치며 찬양가를 부르던 아주머니가 곁으로 와 ‘쉿’ 조용하라고 손짓했다. 입도 안 뗐는데 주의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찬양가 아주머니가 멀어졌을 때, 의자에 앉은 이에게 “저도 예배드리러 왔는데요” 말을 붙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예배드리러 올 리 없다는 것일까, 말 걸지 말라는 뜻일까. “선생님, 어디서 오셨어요?” 한마디 더 건넸다. 내 눈을 뚫어지게 보던 그는 “대한민국’이라 답하고 입을 닫았다. 묻는 자는 어리숙했고 답하는 이는 능숙했다. 기도회 끝 무렵 그가 한마디 했다. “항문 성교는 안 돼.”
보수 단체 집회나 모임에 참여한 이들의 얘기를 들어 보려 지난달 27일 서울시청 정문에서 열린 ‘대한민국 살리기 진리 수호 구국 기도회’에 ‘잠입’했다. 무엇을 지키려고, 어떤 연유로 거리에 나왔는지. 하지만 그들은 한눈에 알아봤다.
기도회 주최는 ‘예수재단’이다. 예수재단 대표인 임요한 목사는 예수재단이 교단에 속하지 않은 ‘초교파’ 모임이라고 말했다. 뜻을 같이하는 목사들이 돌아가며 기도회를 인도한다. 이날은 10명의 신도가 자리를 지켰다. 기도회가 열린 27일은 4차 민중 총궐기 대회 날이다. 시청 광장에는 2만여 명이 모였다. 예수재단은 괴한의 방해가 있다며, 폴리스라인 안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 중에 한두 명 참석자가 늘어났다. 찬양가 아주머니는 광장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아끌고 북을 맡겼다. 털모자를 쓴 그의 손엔 ‘노동 개악 중단’이라는 유인물이 쥐어져 있었다. 아주머니 재촉으로 북을 쥔 그에게 다가갔다. 시큼한 술 냄새가 났다. 기도회에 오신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예수재단 관계자가 그에게 다가가 “저 여자랑 말 섞지 말고 북만 치라”고 했다. 북을 들고 잠시 주저하던 그는 곧 북을 두드렸다. 민중 총궐기나 기도회를 위해 광장을 찾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지난 5일 다시 기도회를 찾았다. 임 목사에게 “주변 노숙자를 기도회에 참석시켰느냐”고 물었다. 그는 “노숙자 사역하는 목사가 있어 그 목사를 쫓아왔을 것”이라고 답했다. “억지로 손목을 끌고 오는 것 같던데요”라고 되묻자 임 목사는 “더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나가 달라”고 말했다.
예수재단은 서울시청에서 400일이 넘게 기도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동성애 반대 △동성결혼 합법화 저지 △동성결혼금지법 제정 △차별금지법 폐기 △동성애를 지지하는 반기문 총장, 박원순 서울시장의 공직 하차 등 일곱 가지를 요구한다. 예수재단은 동성애 위험에 빠진 대한민국을 살려야 한다며 1000만 범국민 서명 운동도 한다. 인터뷰를 거절한 임 목사는 기자에게 ‘혼돈의 대한민국입니다. 헬조선이라고 대한민국을 조롱하는 친북 세력,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물론자들을 북쪽으로 보내기 위한 북송 특별법, 북한 임시 거주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라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목사는 애국 시민이라면 대한민국이 전시 상황임을 알아야 한다고 썼다.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는 “동성애는 이념과 구별돼야 하는 사안인데, 《워커스》는 동성애를 지지하는 언론으로 판단됩니다. 방문을 정중히 사양합니다”는 답장을 보냈다. 재차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예수님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천국에 함께 갑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하트 이모티콘을 붙인 ‘굿데이’가 그의 마지막 답이었다.
문제는 노안이었다
“국정원이에요?”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물었다. “네? 기자라고 말씀드렸는데….” “국정원 직원 아니고요? 워낙 나를 주시하는 사람이 많아서.” 국정원 직원이 하필 기자를 사칭할까 싶었지만, 그는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다. 강 모(56)씨. 그를 처음 본 건 구 인권위 건물 앞에서다. 예수재단은 기도회 후 의자를 정리해 인권위 건물 앞에 두었다. 그는 그 곁에 트럭을 세워 두고 서명을 받았다. 그는 8년째 박원순 저격수로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북한 인민을 위한 일도 한다고 말했다. 예수 재단과는 뜻을 모아 장소를 공유하고 활동한다고 했다. 그의 트럭에는 ‘김정은 개새끼, 개새끼보다 못한~놈! 개새끼보다 더한~놈! 박.원.순’이라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차세대바로세우기학부모연합’ 이름으로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를 학부모들은 반대합니다!’라는 팻말도 있었다. ‘대한민국 탈북자 통일의병대’라 쓴 플래카드도 보였다. 박원순을 비판하는 통일의병대라. 그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의 사무실은 목동 한 건물 5층에 있었다. 사무실 앞에는 ‘부모마음 교육 서울자유교원조합’이라는 팻말과 ‘反국가교육 전교조퇴출’이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은 조합과 관련이 없다며 잠시 사무실을 임대해 쓴다고 했다. 사무실에는 네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신문을 접었고 작은 비닐 봉투에 넣었다. <동아일보>였다. 북한 동포에게 대한민국의 생생한 소식을 전해 주려고 신문을 보낸다고 했다. 보급소에서 신문을 지원해 주지 않아 1부 70원에 사 온다며 한숨이었다. “국가에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덧붙였다. 거실 곳곳에 놓인 박스에는 비닐 뭉치가 한 가득 담겨 있었다. ‘늑대보다 못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 쓰인 대북 전단지였다. ‘통일의병대의 웨침’이라는 전단도 있었다. “김정은 체제는 결코 강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버리겠다는 자각으로 다 함께 일어난다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통일의병대’와 함께 일어나십시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이가 왜 박원순 시장을 비판할까. “내가 2008년부터 박원순을 지켜봤어요. 대한민국에서 나만큼 박원순을 잘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내 인생 5분의 2를 그 사람에게 썼지.” “왜 박 시장을?” “뭔가 느낌이 왔거든. 광우병 폭동을 겪으면서 그 중심에 박원순이 있다는 걸 확신했어요. 증거도 있어요. 박원순이 만든 단체가 뭐야? 참여연대 아니에요. 거기가 바로 종북 세력 양성소에요. 아름다운재단이라고 알아요? 거긴 종북세력 자금, 돈줄을 담당해요. 희망제작소는 종북 세력의 싱크탱크고. 자 봐, 결국 이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어요? 박원순 아냐? 박원순이 종북 좌익 빨갱이의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전단 살포도, 박원순에 의혹 제기도 결국 북한 인권을 위한 일이에요.” 그는 북한 인권 운동에 뛰어들기 전, 평범한 한 집안의 가장으로 중소기업을 운영했다고 한다. 2008년이 자신의 삶을 뒤바꿨다고 강조했다.
“2008년에 광우병 폭동을 접한 충격이 컸어요. 당시 광우병 괴담이 어마어마했잖아요. 그런데 내가 폭도들 현장을 본 거예요. 광화문 광장에서 광우병은 괴담이라고 했더니 16~18살 아이들이 내 옷을 뜯고 나를 한가운데 몰아넣고 빙 둘러쌌어. 광우병은 괴담이 아니라면서. 아이들에게 술 냄새가 났어요. 내가 1960년대생이라 당시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는데, 얘들에게 그런 일을 당한 거요.” 그는 나라를 잃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모른 척 지나갈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인 아이들이 종북 세력이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어 애국 운동에 뛰어들었다고 설명했다. 박 시장 비판도 같은 맥락이다. 시민 단체는 종북 단체인데 이를 만들어 유포시킨 박 시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박원순은 의혹이 많다고도 했다.
“자 봐요. 박원순은 출생부터 의혹이 있어. 박원순이 호적상 1956년 3월 26일생이에요. 3월 26일이 무슨 날이야. 천안함이 폭침된 날이에요. 그 날이. 그리고 또 박원순이 1956년생이면 지금 나이가 61살인 거예요. 그런데 얼굴을 봐요. 61살의 얼굴이 아니에요. 70대 얼굴이지.” 문제는 노안이었다.
3월 9일, 예수재단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430일째, 국회 앞에서 70일째 기도회를 열었다. 철야 기도는 230일째였다. 대한민국 탈북자 통일의병대 역시 성실했다. 그들은 밤새워 대북 전단 살포를 준비한다고 했다. 2014년부터 전단을 북한에 무사히 안착시키려고 바람의 방향과 세기부터 고도까지 계산했다. 끈질기고 촘촘하게 노력했다. 전단지 ‘웨침’이 ‘외침’의 오타라고 생각했는데, 북한식 표현이었다. 전단을 받는 북한 주민을 고려한 문장이었다.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에 신념이 더해졌다. 그 결과는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