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철(영국 브리스톨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
지난 3월 29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 개시 서한에 서명하며 영국과 EU간의 탈퇴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난해 6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가 가시화된 지 약 9개월 만이다. 협상 당사자인 EU와 영국 모두 협상을 위해선 EU정상회의 인준과 EU법을 영국법으로 대체하기 위한 대폐지법안을 준비해야 하므로 실제 협상은 5~6월 사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세기의 협상을 앞두고 양측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보호주의를 택한 영국과 이를 주도한 보수당에도 국운이 걸렸지만, EU에게도 전 세계적 보호주의와 우경화 흐름 속에서 이번 협상은 모멘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정치경제적 경향이 강화되는 가운데, 브렉시트가 의미하는 바를 초국적 제도와 민족국가 간의 딜레마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브렉시트 이후 혼란에 빠진 영국과 EU
브렉시트는 이미 현실이다. 경제적으로는 파운드화 가치가 곤두박질 쳤고, 경제지표들은 벌써 스테그플레이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이에 언론은 기업들이 브렉시트 협상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라 전하며 불안을 가중하는 한편, EU집행위는 영국이 약속한 분담금 600억 유로를 FTA협상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영국하원 브렉시트 위원장을 맡은 힐러리 벤 노동당 의원이 의회의 역할을 강조, 탈퇴 협상 틀에 대한 의회 표결을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상징적 역할만 하던 상원도 나서고 있다. 일반 상원위원과 달리 상원 내 EU위원회의 경우, 전직 고위 공직자와 교수 등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돼 있으므로 실제 협상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지난 3월 31일 스코틀랜드 의회는 두 번째로 독립 찬반 국민투표안을 통과시키고 영국의회에 독립투표 승인을 요청했다. 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정당 신페인당은 아일랜드와 통합을 묻는 국민투표 시행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분열에 대한 영국 기득권층의 두려움은 메이 총리가 제안한 브렉시트 협상의 7가지 원칙에서도 드러나는데, 그 중 하나에는 북아일랜드에 대한 통제권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포함됐다. 영국의회 개입과 기타 변수를 최대한 통제하고 싶은 보수당 정부는 난감한 상황이다.
이 같은 조건 속에서 영국 보수당 정부는 4월 18일 6월 조기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대표는 즉각 환영의 메시지를 보냈다. 보수당의 경제적 실패를 심판하고, 모두를 위한 브렉시트와 모두를 위한 경제를 이룩하는 첫발이 되게 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영국 사회당도 이에 동조하며 사회주의적 브렉시트를 위해 조기총선은 필수라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당 상황은 녹록치 않다. 텀오일 비긴스 노동당 하원의원은 코빈 체제 하에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냈고 덩달아 몇몇 의원들이 이에 동조하며 노동당의 내분을 예고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지지율 여론조사에서도 노동당(25%)은 보수당(42%)에 크게 뒤지고 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국민당 대표는 “조기총선은 상대당을 궤멸시키려는 전략으로 나라가 아닌 당의 이익만 고려한 처사”라고 발언했는데 일리가 있다. 즉, 현재까지 보수당의 조기총선 전략은 협상에 대한 의회 개입을 막기 위한 ‘조커’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EU에게도 마찬가지다. 브리셀은 EU 주축국들의 총선 및 대선을 앞두고 제2의 브렉시트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EU를 거부한 사례는 브렉시트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를 거치면서 반 지구화 흐름에 기반한 EU회의론이 발전, 확장되고 있다.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는 각각 총선과 대선을 마쳤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EU 찬반 의견이 갈려 치열한 선거를 치른 네덜란드는 친EU성향의 자유민주당이 33석(150석)을 차지해 제1당을 유지했다. 자유당의 연정 상대자이자 제2당이던 노동당이 참패하며 최소 4개 정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할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반EU 극우정당인 자유당이 제1야당으로 떠오르며 네덜란드 내 반EU 정서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부재자 투표용지 불량으로 치른 오스트리아 대선 재선거에서 친EU 성향의 녹색당 판 더 벨렌이 극우정당을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그도 과거 EU 탈퇴를 주장해 온 인물이다. 지난 12월 선거에선 극우성향의 자유당 호퍼가 승리했다는 점도 EU 입장에서는 불안한 요인이다. 프랑스도 반EU 극우 르펜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이는 가운데 결선투표까지 가야 판가름이 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에서 체감하는 반EU 정서는 최근 영국과 스웨덴, 독일 등에서 연이어 일어난 테러로 반이민 정서가 한층 커지며 대선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의회제도 개혁을 위한 국민투표가 부결되자 친EU 성향의 집권당인 민주당 당내 좌파가 탈당해 세력이 약화한 반면, 반EU 성향의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과 극우정당인 북부동맹이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EU에서 세 번째로 큰 채무국인 이탈리아가 유로존을 이탈할 시 그 파장은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늘어나는 EU 탈퇴 여론은 EU가 브렉시트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U와 민족국가 간 딜레마
기실 유럽의 보호주의로의 회귀와 정치적 우경화에 대한 우려는 현재 위기를 말할 때면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이러한 우려의 원인은 EU가 창설된 그 기원에서부터 잠재해 있던 것이다. EU 창설은 1930년대 국제경제 위기와 함께 찾아온 민족국가들의 보호무역주의와 민족주의의 고양 속에서 발발한 2번의 대규모 전쟁을 예방하고자 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단일 유럽의정서 하에 다수결과 만장일치제를 도입하는 한편, 자유시장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개별 민족국가들의 거부권을 기각하고 민족국가의 주권을 약화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즉, 자유무역과 다수결을 통한 단일 유럽 아래 민족국가의 주권을 제한한 것은 과거 유럽이 겪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호무역주의와 정치적 우경화 즉 배타적 민족주의의 발현으로 이해되고 있는 브렉시트는 EU 창설의 취지와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브렉시트는 유럽의 불안정한 질서가 태동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인가?
브렉시트를 필두로 최근 나타나는 유럽의 우경화와 과거 20세기 초 유럽의 경험을 동일 선상에서 볼 수 있을까? 우경화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대륙 전역에 퍼지고 있다. 사실 유럽 우경화에 대한 우려는 EU 헌법 부결 당시부터 제기된 것으로 최근의 경향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일련의 경향성을 과거 비극들과 비교하기도 이르다. 무엇보다도 21세기 배타적 민족주의는 반지구화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와 같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반지구화 배타적 민족주의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왜 반자본이 아닌 민족주의로 드러나는가?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를 보면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 개혁에 소외된 지역들, 세계시민적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했다. 문제는 이들의 정치적 극우화에 있다. 이들의 불만은 좌파 정당들이 내세운 반지구화 담론이 아닌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운 극우정당의 반이민 담론에 포섭되는 형태로 나타났다. 현재 영국 내 반이민 분위기는 배타적 민족주의 담론이 영국 내 주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오히려 좌파 정당의 지지 계층들은 EU 잔류를 주장, EU 회의론자인 코빈 열풍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형국이다.
그 이유는 초국적 제도와 민족국가 간의 괴리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민족국가는 EU와 같은 국제제도와 달리 구성원들의 신뢰를 발생하고 이를 유지하는 상징체계들을 흡수하며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소속감과 응집력, 연대감을 강화한다. 이는 민족국가의 하나의 정체성으로 민족주의로도 불리곤 한다. 이러한 정체성은 공적 위험과 재정 관리자로서의 민족국가 기능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다. 즉, 공적체제로서의 민족국가는 산업화 사회에 나타나는 전방위적 경제 위기에 노출된 구성원들이 마주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공의 재정을 통해 사회보장책을 구축해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EU와 같은 국제제도는 민족국가와 달리 사회문화적 동질성을 갖춘 정체성을 지니기 어렵다. 이는 조약에 기초한 국제제도의 특징이기도 한데, 따라서 EU의 설립취지, 즉 자본주의, 사회복지, 자유민주주의, 인권 등과 같은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 이념 및 가치에 기반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기초한 연대감과는 달리 언제든지 해체되기 쉬운 불안정한 기반을 대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약한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된 세계경제체제에 단위 민족국가 구성원들을 몰아넣고, 가치의 실현을 위해 개별 민족국가 수준에서의 희생을 강요하며 민족국가 주권을 해체해 나갈 뿐이다. 이에 종속된 단위 국가 국민이 경험하고 있는 불가항력적 위험에 대비한 보호는 여전히 상당 부분 민족국가에 전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구화에서 배제된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민족국가에 일정한 역할을 요구하게 하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민족국가 단위의 민족주의적 경향성을 더욱 강화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지구화에 저항하는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으며, 브렉시트는 민족국가를 소환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봉기인 것이다.
한편, 자유무역에 기초한 평화란 EU 성공이 가져온 신화에 불과하며, 이는 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 가지고 있는 국가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속성(패권)을 간과한 것이다. 영국의 경제적 성공에서 비롯된 자유무역체제란 신화의 실상을 살펴보면 그 성공의 이면에는 자유시장이 아니라 보호주의만이 존재한다. 자유무역은 약소국들과 피식민국들에게 강요되는 것이었고, 강대국들은 자국 관세를 높였으며, 관세를 낮춘다 하더라도 적극적인 국가개입을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했다. 그중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항상 프랑스, 독일, 일본 등과 비교해 높은 관세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경향은 자국의 완전한 경제적 우위를 점할 때까지 유지됐고, 이후에도 자국의 산업경쟁력이 약화하거나 혹은 경제적 우위가 쇠퇴할 경우, 보호주의적 조치는 항상 취해졌으며 불가능할 때는 경제적 패권 질서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각종 국제 금융기구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들의 이윤과 특혜를 보장해 줬다. 이 점에서 브렉시트는 그러한 패권적 국제기구로도 더는 보전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영국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국의 경제적 우위와 산업경쟁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보호주의로의 회귀는 예정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나가며
브렉시트는 그동안 적극적으로 추진돼 온 자유주의적 신화에 대한 제동이다. 지구화되는 경제 질서에서 이를 멈추고자 하는 국민의 저항이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좌파 정치세력이 주장하는 반자본주의적 세계화로 향하지 않았고, 배타적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반이민 담론에 포섭됐으며, 그들의 충실한 지지자들인 젊은 세대마저 유럽적 가치를 옹호하며 이들과 등졌다.
브렉시트 과정에서 좌파 정치세력이 간과한 것은 무엇인가? 경제적, 실증적 요소들에 너무나 매달린 나머지 민중들이 살아온 삶과 그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너무 간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브렉시트가 던지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이유다.[워커스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