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윤(다른세상을향한연대 실행위원)
최근 유럽연합(EU)이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EU 탈퇴) 예정일을 10월 31일까지 미루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일시적 유예일 뿐 앞으로도 영국 사회는 계속해서 브렉시트라는 블랙홀 속에서 소용돌이 칠 것이다. 이 소용돌이는 강경 탈퇴파(하드 브렉시트), 온건 탈퇴파 (소프트 브렉시트), 잔류파로 사분오열돼 충돌과 마비를 반복하고 있다. 영국 하원뿐 아니라 영국 사회 전체는 물론이며 갈등은 특히 거리에서 자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말 영국 런던에서 100만 명이 참가한 브렉시트 반대 시위가 있었다. 이것은 지난해 10월 70만 명이 거리를 행진하며 ‘민중 재투표’(The People´s Vote)를 요구한 것에 이은 두 번째 집회였다. 참가자 다수는 친이민 다인종 청년들이었고,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집회 이후 영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이 시위를 전후해 브렉시트 철회를 요구하는 의회 청원 서명에는 4일 만에 500만 명이 참가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동 당원의 대다수와 노조원 다수도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영국의 급진좌파들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반감에 공감하거나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한 급진좌파 단체들은 그 시위에 불참했고 노동당의 좌파적 지도자인 제레미 코빈도 불참했다. 사실 영국 급진좌파의 다수는 지난 2016년 국민투표 때 브렉시트 찬성 투표를 주장했다. 그래서 당시 작은 표차로 브렉시트가 가결됐을 때 급진좌파들은 환영했다. 심지어 이것을 ‘계급투표’를 통한 노동계급의 승리라고 봤다. (대표적으로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이런 입장이었다.) 물론 제조업이 무너진 변두리 지역의 저소득·저학력층에서 탈퇴표가 많이 나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태도였기 때문에 급진좌파 다수는 지금도 브렉시트 반대 진영의 제2 국민투표(‘민중에게 맡겨라!’) 요구를 지지하지 않는다. 사실 재투표를 하면 다시 찬성 주장과 선동을 하기 부담스럽고, 좌파 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혼란스럽게 표출될 것을 걱정하는 듯도 하다.
이런 급진좌파들의 입장은 사실 이해되는 면이 있다. EU가 인권·노동권을 보호해온 진보적 기구인 것처럼 설명해 온 주류언론과 달리, EU는 처음부터 미국과 경쟁하기 위해 유럽 각국에 신자유주의적 규칙과 구조조정을 강제하려고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그리스에 살인적 긴축정책을 강요해 온 것도 바로 EU다. 또 EU와 보수당이 합심해서 추진한 긴축정책은 영국 노동자들의 삶을 망쳐 왔다. EU는 유럽으로 건너오려던 중동의 수많은 난민들이 지중해에서 익사해온 비극에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 좌파는 전통적으로 EU의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고 반대해 왔다. 그리고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에도 찬성 투표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좌파적 탈퇴(Left Exit), 렉시트(Lexit)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EU는 유럽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을 위한 시스템일 뿐이고, 긴축과 기성체제에 분노와 불만을 가져온 사람들이 지금 브렉시트를 지지하고 있다”며 “브렉시트가 가결돼 이 시스템이 위기에 빠지면 그것은 우리 좌파와 노동계급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peoples-vote.uk]
|
인종주의와 반이민 문제
그러나 브렉시트는 이 같은 입장으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가이며 사회주의 활동가인 닐 포크너 (Neil Faulkner)는 이런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데, 그의 주장을 한 번 살펴보자.
“이와 비슷한 주장이 과거에도 있었다. 모스크바의 지령 하에 있던 독일공산당은 1930년대 초반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를 환영하며 파시즘에 대항해 (‘사회적 파시스트’라고 덧칠된) 독일사민당과 연합하기를 거부 했고, ‘히틀러의 독재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1932년에 히틀러의 운동이 반(反)바이마르 운동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브렉시트 운동은 반EU, 반의회, 반체제 운동이었다. 히틀러는 실업자, 미조직 노동자, 파산한 자영업자와 잊혀진 ‘존재감 없는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브렉시트 운동은 세계화, 신자유주의, 긴축의 희생양인 사회 밑바닥 사람들 사이에 고여 있던 거대한 쓰라림에 의존했다.”(1)
이것은 브렉시트를 둘러싼 좌파의 지형이 단순하지 않으며, 우리가 브렉시트의 어두운 측면인 인종주의와 반이민의 문제를 중요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3년 전 영국 보수당 총리 데이빗 캐머런은 브렉시트 투표 카드를 꺼내면서 국내적 문제로 쌓인 불만의 화살을 이민 문제로 돌리려 했다. 보수당 안팎에서 자신의 우익 경쟁자들을 통제하며 주도권을 높이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뚜껑이 열린 브렉시트라는 블랙홀은 캐머런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영국독립당(UKIP)의 나이젤 패라지(Nigel Farage)와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같은 보수당 우파들이 인종주의 선동을 하며 브렉시트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EU의 지나친 노동·환경 규제와 분담금이 영국 경제를 망치고 있다”, “국경 통제권을 확보해 쏟아지는 이민자들을 막아야 한다” “이민자들이 너무 많아서 복지부담이 커진다”
“EU의 초국가적 성격이 영국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특히 인종주의 우파는 백인 저소득층 속에서 ‘기성정당과 엘리트들이 잘못된 정책으로 모든 걸 망쳤다’는 포퓰리즘적 주장을 하며 그것을 반이민 선동과 연결시켰다. “우리는 다국적 기업과 대형 상업은행과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부패와 속임수와 싸웠다.” “주류 정당들은 그동안 이민자들로 인해 병원 약속이 밀리고, 학교에 자리가 없고, 소득이 떨어지는 대중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이게 바로 영국독립당의 지도자인 나이젤 패라지가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며 한 말이다. 이민자를 마치 몰려오는 짐승들처럼 묘사한 포스터는 이 인종주의적 선거 운동의 상징이었다. 절정은 브렉시트 투표 며칠 전에 터져 나온 노동당 조 콕스((Jo Cox) 의원 피살 사건이었다. 반이민 인종주의자인 테러범 토마스 메이어는 난민과 연대해 온 조 콕스 의원을 살해하며 “영국이 우선”이라고 외쳤다. ‘영국이 우선이다’는 바로 브렉시트 찬성파의 핵심 구호 였다. 며칠 후에 브렉시트는 과반을 간신히 넘어 가결됐고, 인종주의적 우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프랑스의 르펜, 미국의 트럼프 등도 이 결과를 환영했다. 결국, ‘신자유주의와 긴축이 낳은 불만이 인종주의 우파가 주도한 투표를 통해 뒤틀린 방식으로 표출됐다’가 브렉시트 투표 가결의 본질이었다.
지금 테레사 메이의 보수당은 분열, 약화돼 있긴 하지만 대체로 하드(강경) 브렉시트를 추구하고 있다. 소프트든 하드든 보수당이 내놓은 브렉시트 방안은 모두 이민자에 대한 공격, 국경 통제 강화와 연결돼 있다. 더구나 5월 말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독립당의 지지율은 13%, 분리해 나온 나이젤 패라지의 브렉시트신당의 지지율은 12%다. 인종주의 정당들이 더욱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오늘날 영국뿐 아니라 유럽에서 인종주의 우파와 나치의 위험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프랑스에서는 나치인 르펜의 국민전선이 차기 대선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독일 등에서 극우익이 급성장하고 있다. 2008년에 시작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경제 위기, 중동을 지옥으로 만든 전쟁, 희생양을 만들고 노동자를 이간질하는 이슬람포비아, 좌파의 실패와 분열 등이 그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속에서 극우익은 실업자, 빈민, 소외된 사람들의 기성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비집고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30년대의 유럽에선 비슷한 요인들이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경제 위기는 1929년 대공황으로 폭발했고, 인종주의는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당시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도 실업자, 빈민, 소외된 사람들의 기성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이용해 급성장했다. 30년대 초에 나치는 집권 사회민주당 주정부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제기했다. 당시 독일 공산당은 이 투표에 찬성표를 던지며 그것을 ‘적색 국민 투표’라고 불렀다. 독일공산당이 집권 사민당을 반대할 이유는, 오늘날 좌파가 EU를 반대할 이유보다 더 많았다. 사민당은 로자 룩셈부르크같은 혁명가를 살해하고 발포 까지 하며 노동자 파업을 짓밟고 있었다. 독일공산당은 사민당의 위기와 나치의 부상을 ‘체제의 위기이자 좌파의 기회’라고 반겼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브렉시트에서 ‘좌파적 탈퇴’를 주장한 일부 좌파가, 그 결과를 ‘노동계급의 전진’으로 반겼던 것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뒤틀린 EU 찬반 전선 해체해야
지금, 영국에서 브렉시트 찬성인지 반대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노동당의 수수께끼’는 여전하다. 브렉시트를 찬성 하면 인종주의 우파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고, 반대하면 EU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와 긴축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노동당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노동당 안팎의 블레어 후예들은 이런 난점을 이용해 브렉시트 반대 운동의 주도권을 쥐며 노동당을 분열시켜 제 3당을 만들 기회로 이용하려 한다. 노동당 지도자 제레미 코빈은 “탈퇴냐 잔류냐의 구분이 핵심이 아니다. 노동하는 다수와 부를 독점한 소수의 구분이 진정한 대립”이라고 했는데,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노동자 편이 라는 세력과 우리는 자본가 편이라는 세력이 나란히 마주 보고 싸우는” 그런 순수한 계급투쟁은 현실에 없다. 계급 적대와 대립은 온갖 뒤틀린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지금 영국에서는 브렉시트를 통하고 있다. 당연히 양쪽 모두에 지배자와 노동대중이 섞여 있다. 하지만 3년 전 잔류에 투표했던 쪽에 유색인종, 무슬림, 이민자, 청년, 노조원들이 더 많았고, 그들은 대체로 친이민, 친페미니즘, 친생태주의 경향을 보였다.(2) 지난해 10월과 올해 3월에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런던 거리로 나섰던 것은 그들이 행동할 의지가 있다는 것도 보여 줬다.
바로 이들과 함께 행동하며 그 속에서 기반을 마련하고 넓히는 것이, 영국의 좌파에게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EU가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곧바로 브렉시트 찬성이라는 결론이 나와선 안 된다. 쓰레기통 에서 벗어나자고 똥통을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EU를 벗어나 영국 국민국가 강화로 가는 것은 더 나은 일일 수 없다. 브렉시트를 주도한 우익은 대처리즘 시대의 영국을 그리워하고, 유럽 내에서 비자와 여권 없이 이동할 수 있는 자유도 없애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브렉시트 찬성에 이끌린 저소득 백인 노동자, 실업자, 가난한 연금생활자 등을 내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좌파가 반우파·친이민 노동대중과 청년들 속에서 기반을 넓히며 단결과 투쟁을 건설해 긴축을 중단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줄 때, 더 효과적으로 이들을 왼쪽으로 견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투쟁 속에서 장차 ‘EU 지지냐 반대냐’라는 뒤틀린 전선을 해체해야 한다. ‘이민을 환영할 것이냐 반대 할 것이냐, 긴축을 반대할 것이냐 지지할 것이냐’라는 더 분명한 전선을 형성하고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그런 투쟁이 더 강력하고 넓어질 때, 좌파가 위기와 분열을 극복하고 노동계급 다수의 신뢰를 얻게 될 때, 신자유주의적 EU를 벗어던질 뿐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가능성도 커질 수 있을 것이다. 3년 전 조 콕스 의원 테러범의 “영국이 우선”이라던 외침에 좌파의 답은 분명하다. ‘영국이 우선’이 아니라, 가장 억압 받는 이민자들과 연대하며 빼앗긴 모든 이들의 단결과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항상 ‘최우선’이다.[워커스 54호]
[각주]
(1) http://www.europe-solidaire.org/spip.php?article38304
(2) http://leftunity.org/trumps-victory-hitlers-shadow-a-clear-and-present-danger-time-to-a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