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개를 들 수 없어서
1월 11일. 파인텍지회 홍기탁, 박준호가 426일 만에 굴뚝을 내려왔다. 건강이 나빠진 탓에 곧바로 구급차 이송 침대에 누웠다. 정문을 나서니 1백 명의 기자들이 침대를 둘러쌌다. 파인텍 투쟁에 연대했던 시민 수십 명도 환호성을 보냈다. 하지만 이들의 말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말없이 차광호 지회장의 손을 잡은 홍기탁이 결국 몇 마디를 꺼냈다.
“이 사회에서 20년 넘게 지켜왔던 민주노조를 지키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굴뚝 위에서 생각했습니다. 배지만 달고 돌아다니는 국회의원들, 재벌 꽁무니 따라다니는 권력기구들을 갈아엎고 싶다고요. 청춘을 다 바쳤다! 민주노조 사수하자!”
그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국합섬에 처음 입사한 20대 시절부터, 회사가 파산해 홀로 불 꺼진 공장을 지켰던 기억. 차광호 지회장이 408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모습과, 회사가 다시 파인텍 공장에서 기계를 빼돌렸을 때의 분노. 두 번째 굴뚝농성을 계획한 뒤 조합원 다섯이서 여행을 갔던 추억. 민주노조를 지키려 청춘을 다 바친 세월이었다. 굴뚝을 내려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차광호가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부족한 합의입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스타플렉스의 태도에 참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함께한 분들이 있어서 홍기탁, 박준호가 땅을 밟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린 청춘을 다 바쳐왔지만 공장에서 두 번, 세 번 밀려 났습니다. 힘든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쫓겨나고, 탄압받아도 말 한마디 못 하는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바로잡는 날이 와야 합니다.”
#2 원칙과 동지애, 그 사이에서
차 지회장은 ‘부족한 합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교섭은 6차례 열린 끝에 지난 1월 11일 오전 타결됐다. 조인식 때도 차 지회장은 “합의는 부족하다. 하지만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굴뚝 위에서 굶는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사는 합의에서 파인텍 공장을 재가동키로 하고, 대표는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이사’가 아닌 ‘김세권’ 개인이 맡기로 했다. 애초 노조는 노조와 고용, 단체협약 3승계 이행을 요구해 왔다. 핵심은 스타플렉스의 직접고용이었다. 회사가 과거 자회사를 청산, 기계를 철수하는 등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쫓은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타플렉스는 사내유보금(이익잉여금+자본잉여금)이 774억 원에 달해 직접고용에 전혀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직접고용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스타플렉스 측의 ‘반노조 정서’ 때문이었다. 고공농성 장기화로 언론의 주목을 받자, 파인텍 강민표 대표(스타플렉스 전무)는 1월 8일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강 대표는 “고용할 여력이 있지만 고용할 수 없다”라며 “합리적 노조는 괜찮은데 (파인텍지회는) 조금 특이하다”라고 말했다. 민주노조를 향한 반감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당시 노조는 스타플렉스 직접고용 요구에서 한발 물러나 파인텍을 재가동하되 스타플렉스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이사’가 합의문에 서명하고, 파인텍이 파산할 시 스타플렉스가 고용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고공농성 410일째인 1월 6일. 홍기탁, 박준호는 노조 연대체인 ‘스타플렉스(파인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행동’에 무기한 단식을 ‘통보’했다. 직접고용을 거부하던 회사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굴뚝 위 노동자들은 식사를 올리는 밧줄을 묶어 버렸다. 당장 물과 방한용품, 비상 연락을 유지할 휴대폰 배터리도 올리지 못하게 됐다. 차광호 지회장과 금속노조, 민주노총, 공동행동은 다음 날인 7일, 이들의 단식을 만류하고 나섰다. 아침 식사를 올리기 위해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돌아온 것은 “단식을 만류할 생각이면 앞으로 전화 받지 않겠다”는 말뿐이었다. 홍기탁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굴뚝 위에서 정확히 요구했습니다. 회사가 내놓은 안(이번 합의안)에 합의할 수 없다고요. 주체가 빠진 합의서를 합의로 보기 힘들었습니다. 노동자를 사람으로 보지도 않는 자본가의 민낯이 사측 기자회견에서 드러났잖아요. 언론도 사측 비판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잖아요. 합의하지 않더라도 싸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교섭 방향을 틀어보려고 단식에 들어간 겁니다. 죽더라도 버티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홍기탁은 말끝을 흐렸다. 애초 노조의 요구였던 노조, 고용, 단협 3승계 이행은 합의 내용에 없었다. 단지 ‘교섭단체로 파인텍지회를 인정’한다는 내용만 담겼다.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 기간은 최소 3년이었고, 기본급은 최저임금+1,000원에 불과했다. 사실상 다시 간접고용, 계약직 노동자 신분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홍기탁의 눈빛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고공농성 노동자들이 단식에 나서자 기자들이 몰려왔다. 차 지회장은 그 앞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단식만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빨리 해결하고 두 동지가 내려오길 바랍니다. 정말 사측이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400일 넘게 교섭에 나오지 않던 사람이 이제야 나와 책임이 없다고 합니다. 정부는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헌법이 보장한 최소한의 권리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혹독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아야 하는 겁니까.” 극한을 넘은 동료의 단식 소식에, 그동안 눈물을 보이지 않던 차광호도 무너져 내렸다.
동료를 지키려는 마음과 원칙 사이에서 차 지회장은 괴로웠다. 스타플렉스 자본은 노조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단식이 장기화 될 수밖에 없었다. 고공농성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과거 고공농성을 경험했던 한 노동자는 파인텍 고공농성자의 단식을 지켜보며 “나도 고공에 있으면서 극단적인 생각까지 해봤다”라며 “마음이 심약해진 상태에서 어떤 생각까지 미칠지 무서웠다”고 전했다. 여러 차례의 설득 끝에, 결국 조합원 5명은 합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녹색병원으로 옮겨진 홍기탁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싸움, 이제 하나 일단락됐습니다. 세 개가 남았어요. 문재인 정권 퇴진, 재벌체제 해체, 노동악법 철폐.”
#3 남은 세 개의 싸움
병원에서 만난 홍기탁의 눈빛은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본가를 위한 악법에 복무하며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문재인이 당선 연설에서 촛불의 요구를 담아내겠다고 했습니다.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1년 반을 잘 돌아보십시오. 제대로 한 게 있습니까? 자유한국당이랑 협치하고, 재벌들하고는 맥주 마시고 있죠? 반면에 노동자들에게는 탄력근로제 개악하면서 노동권을 빼앗고 있어요. 우리 투쟁에는 방관으로 일관했습니다. 콜트콜텍, 유성기업, 김재주 택시 투쟁에 귀 한 번 기울인 적 있나요? 김용균 유족의 요구도 거부하고 있지요. 노동자, 민중들이 이 정권을 몰아붙이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돌이켜보면, 그들의 싸움은 언제나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 파인텍지회가 이번 투쟁에서 내건 요구도 마찬가지였다. △고용, 노조, 단협 3승계 이행 △헬조선 악의 축(자유한국당, 국정원, 독점 재벌) 해체 △노동악법 철폐다. 3개 중 2개가 정치적 요구다. 그들은 한국합섬 시절부터 정치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2007년 한국합섬이 파산하자 노동자 수백 명은 ‘파산기업 공기업화’를 요구했다. 퇴직금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정치적 요구를 걸고 정부를 압박하는 싸움을 벌인 것이다.
“한국합섬 때 진보언론마저 저한테 이렇게 묻더군요. 파산기업 공기업화가 말이 되는 요구냐고. 우리는 언제나 정치적 요구가 핵심이었습니다. 노동자 2200만 명이 당연히 정치의 주인이지 극소수 몇 명이 주인입니까? 이 땅을 떠나고 싶어 만들어진 말이 헬조선입니다. 70년 동안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노동악법을 만들었습니다. 이재용은 풀려나고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요. 공장에서 임금투쟁만 하면서 나만 잘 먹고 잘살면 재벌들과 뭐가 다릅니까. 우리는 사회의 한 구성원이고, 사회를 바꾸는 노력을 해나가야죠.”
언론은 파인텍 투쟁이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인텍 노동자들은 여전히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찾고 있다. 세상을 향한 ‘우직함’은 굴뚝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퇴진 촛불 때도 ‘광화문 캠핑촌’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사람들이다.
#4 그들의 ‘우직함’, 누가 모를까요
그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자본과 정권을 상대로 싸워왔다. 20대 청년이 머리가 희고, 주름이 깊어지는 동안에도 그들은 변함없었다. 20년간 두 번의 고공농성, 수차례의 단식, 오체투지, 셀 수 없는 집회까지. 그들은 쉬운 길보다 어려운 싸움을 택했다. 끊임없이 사회에 목소리를 전했고, 공감을 얻어냈다. 파인텍 투쟁에 연대했던 시민들은 그들의 우직함, 진정성이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꿔냈다고 입을 모은다.
“홍기탁 아저씨는 굴뚝에 내려와서도 ‘민주노조 사수하자’고 말했어요.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죠. 차광호 지회장님도 정말 동료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가리질 않죠. 408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는데, 자신이 먼저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의식을 가진 것처럼 느껴져요. 특히 굶고 다니는 분이 정말 아닌데 33일이나 단식을 했죠. 굴뚝 동료들을 챙겨온 박준호 아저씨도 한국합섬 때부터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한결 같이 좋은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지요. 조정기, 김옥배 아저씨도 형들에 대한 믿음, 의리가 누구보다 강한 사람입니다. ‘형들이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떠나’ 같은 것들이요. 이분들을 보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요. 얼굴도 모르는데 공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죠.” (김현수, 대학원생, 파인텍 투쟁에 연대하며 ‘그들은 왜 75m 굴뚝에 올랐나’ 스토리펀딩 연재)
“2006년이었어요. 기륭전자가 싸우고 있을 때 경북에 있던 한국합섬 노동자들이 상경까지 하면서 연대했어요. 한국합섬 노동자들이 우리 노조에 음향 기계까지 사줬어요. 자기들도 재정적으로 어려운데 말이죠. 그들은 다른 투쟁 사업장에 연대하러 가서도 식사 당번을 도맡아 하더라고요. 그렇게 기륭전자와 파인텍이 친해졌어요. 그들의 뚝심은 인정할 수밖에 없죠. 차광호 고집이 조금 센가요. 청산된 공장을 다시 돌린 사람들이에요. 이번에도 ‘죽어도 교섭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김세권을 나오게 했잖아요.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해낸 노동자들이죠. 자기들이 가는 길을 믿고 멈추지 않는 사람이에요.” (기륭전자분회 윤종희)
파인텍 노동자들은 20년간 ‘민주노조 사수하자’를 외쳐왔다. 그들의 말처럼, 정말 ‘청춘을 다 바쳐’ 지켜온 민주노조다. 그래서 그들은 좀처럼 놓을 수가 없다. 민주노조도, 민주노조가 바꿀 세상도. 굴뚝을 내려오자마자 동료의 손을 힘주어 잡은 것처럼, 그들은 다시 동료들의 손을 잡고 한 여름 7월에 공장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싸움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고, 그들은 또 한 번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해 낼 테다.(워커스 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