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은 많은 이들이 입학을 준비하는 시기다. 한국의 헌법은 31조 ①항에서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교육기본법에 의거해 의무교육으로 제공되는 초등학교 및 중학교 취학률은 2018년 기준으로 97%를 웃돌며 고등학교 취학률 역시 92.4%에 이른다.¹ OECD 가입국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은 수치다. 그러나 학교에 소속돼 있을 뿐 실질적으로 학업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차별과 배제를 견디며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의 여건을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장기 결석 학생의 안부에 관심을 갖지 않은 학교, 노동권을 교육하는 대신 현장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학생을 노동 착취에 노출시킨 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종종 성적인) 물리적·정서적 폭력을 휘두르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을 비난한 학교, 성소수자 학생을 비정상으로 몰아세운 학교, 임신을 빌미로 학생들을 쫓아 낸 학교, 장애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학교 ― 이런 학교들을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특정 구성원이나 개별 학교의 일탈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의 문화로서, 숫제 제도로서 저렇게 굴러온 학교들 말이다.
교사든 다른 학생이든 ‘특이한’ 개인들을 만나지 않는다면, 학생으로서 학교에서 체제와 권력에 순응하는 법, 그리고 그 순응에 필요한 몇 가지 지식들을 배우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순응만을 요구하는 제도 바깥에서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만들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자원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순응하며 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혹은 순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사람들은 (학교를 거치지 못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학교를 거친 후에도 여전히 배운 적 없는 삶을 살아간다.
지난해 말 출간된 책 『어쩌면 이상한 몸』(장애여성공감 지음, 오월의봄 펴냄)은 이처럼 배운 적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무데서도 자신의 몸에 대해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 ― 장애여성이라는 ‘특수한’ 범주에 속하는 몸에 대한 정보는 공식적으로 제공되지 않으므로, 집 밖으로 나와 타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했으므로, 겨우 갈 곳을 찾는다 해도 그곳마저도 자신의 몸을 표준적인 몸으로 만들려하기 일쑤이므로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몸에 대해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 ― 에 대한 이야기다. 경험하는 장애의 종류, 나이, 직업, 가구 구성 등 많은 것이 서로 다르지만 ‘장애여성’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이 책의 주인공들은 “이 책이 장애여성들에게, 장애여성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 그렇다고 달리 배울 곳도 마땅치 않은 것들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책인 셈이다.
이렇다 할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긴 시간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겨우 배운다 해도, 주변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에 대해 알지 못하므로, 혹은 조금 익숙해 질쯤이면 (성장이나 노화, 호전이나 악화, 혹은 예상하지도 못했던 다른 어떤 과정들로 인하여) 몸은 변화하곤 하므로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대해 홀로 배워야 했다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남들은 알지 못하며 제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는 그 몸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과 관계 맺는 사람들, 때로 제 삶을 지키고 때로 제 삶을 내어주는 사람들에 관한 몇 편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배움이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으리라는 절망을 준다.
“억압이 아닌 가르침을”
하지만 이 절망감이 진실일 것이다. 삶에 대한 지식이란 언제나 단편적이어서 수많은 사건들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각자를 둘러싼 상황과 태도도 언제나 변화하므로 무언가를 행한다는 것,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는 언제나 배움을 요하는 일이며 또한 그 자체로 배우는 일이다. 이러한 절망감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배운 적 없는 것들을 애써 무시하는 것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 그렇게 하기 위해 (때로는 이전과는 다른 스스로를 포함해) 낯선 타자들을 괴물로 여기며 세계에서 지워 버리는 것 말이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는 세상에 등장한다. 우리 자신 또한 변화한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새로움들을 만나는 것이며 삶에 대해 교육이 할 일이 있다면 아마도 그 처음은 삶이란 변화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일 테다. 정해진 무언가가 있고 그것은 바꿀 수 없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적응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닐 것이다.
이곳은 이성애자들의 세계이며 동성애자의 자리는 없다고만 배웠으므로, 성별이란 불변하는 것이라고 배웠으므로,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배웠으므로, 지위가 낮은 사람은 그 어떤 불의라도 감내해야만 한다고 배웠으므로, 자신의 고통은 온전히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배웠으므로 ―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는 그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했으므로 ― 자신의 공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크고 작은 모임을, 학교를, 직장을, 가정을, 지역을, 나라를, 때로는 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억압이 아닌 가르침을, 그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닌 배움을, 배운 대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며 꾸려가는 삶을 말하는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동성애는 언급하지 말라는 지침과 함께 만들어진 성교육표준안, 노동권은 숨기고 순탄한 노사 관계만을 내세우는 사회 교과서, 여성적 어조와 남성적 어조가 따로 있다고 가르치는 국어 교과서 따위가 아니라 말이다. 우리에게 교육 받을 권리가 있다면, 국가에 그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면, 그 사이를 오가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너와 내가, 서로 다른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1) 국가지표체계(http://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520) 자료. 취학률은 ‘취학 적령’(초등학교 만 6-11세, 중학교 만 12-14세, 고등학교 만 15-17세) 인구 대비 각급 학교 재적학생수의 비율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