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원대회는 시작부터 격렬했다. (참석자들은) 대의원석과 참관석을 구분하기 위해서 장내 정리를 해달라는 사회자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도부에 대한 불신은 굉장해 노사정 합의과정에 대한 보고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중략) 심지어 배석범 직무대행은 합의안이 부결되고 참관석의 대의원들이 ‘파업가’의 뒷부분 ‘승리의 그날까지’를 부르자 ‘승리의 그날까지 열심히 투쟁하십시오’라고 비꼬았다.”(1)
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민주노총 1기 집행부 직무대행은 ‘(가칭) 국난 극복과 경제회생을 위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다. 이때 고용보험제와 실업기금 확충, 공무원 직장협의회 허용과 교원노조의 합법화, 실업자의 조합원 자격 인정, 정치자금법의 개정을 통한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의 자유 보장 등을 대가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 도입을 내줬다. 이에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대의원들은 임시대회를 열고 노사정합의 원천무효, 협상 대표단과 지도부 사퇴, 총파업투쟁을 결의했지만 국회는 직권 조인된 ‘역사적 대타협’ 안을 통과시킨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 잠정합의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비록 직권조인 형태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에선 처음이자 마지막인 ‘노사정 사회적 합의’로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를 수용하면서 계급지형이 불안정노동체제로 바뀌었다.
김대중 정부는 나아가 ‘노사정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2기 노사정위원회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결국은 좌초된 노무현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 또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로 노사정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한국형 사회적 합의주의
70년대 말 80년대 초 세계 공황에 중화학공업 과잉 중복투자로 한국경제에도 위기가 닥쳐왔다. 정부는 그간 저금리로 특정 기업에 자본을 지원해 중화학공업을 육성했다. 그 과정에서 수입은 규제하고 수출을 장려해 국내에서는 높은 이윤과 값싼 양질의 노동력을 챙기는 한편 해외시장을 확보하는, 국가가 주도하는 재벌중심의 경제체제를 형성했다. 하지만 곧 한계가 드러나자 1979년 정부는 금융, 가격통제 해제, 수출금융 축소, 수입 자유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제안정화 계획을 시행한다. 이어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장화와 민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2)
이렇듯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지지만 노동에 관해서는 억압적 착취체제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던 듯하다. 이후 경제개발에 ‘사회’가 들어가면서 복지를 강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회적 억압정책은 계속 유지됐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에 이어 노동자대투쟁의 불길이 전국을 뒤덮었고 결국은 정치체제를 변화시켰다. 자주적인 노조 설립마저 봉쇄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전국의 전태일이 들고 일어나면서 조문으로만 있던 근로기준법, 노동3권을 살려냈고, 결국 노태우는 노동법 개정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11월 28일 노동법을 개정했지만 그 내용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보조를 맞추면서 노동의 시민권을 확대하기보다는 기업 수준에서 집단적 노사교섭과 조합 결성을 일부 용인하는 정도였다. 이후 여소야대 정국에 힘입어 개정된 노동법도 노태우가 거부권을 행사해 무산됐다.
당시 정치적 민주화에도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과 배제는 계속됐다. 그것이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의 지배적인 대응전략이었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시기 형성기에 있던 노동운동은 전 계급적 연대와 대중동원전략으로 맞섰다. 국가의 탄압에 맞서 노조를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이를 흔히 전투적 조합주의라고 한다. 이는 경로의존적인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1년 무렵 신생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이 시작되면서 ‘전투적 조합주의 비판론’이나 ‘노동운동 위기론’이라는 담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그 자체로 민주노조운동의 내부 변화를 압박하는 담론적 의도를 가지거나 효과를 내기도 했다.(3)
1993년 김영삼 정권은 개혁과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각종 기업규제 완화와 민영화 정책 등 이른바 ‘신경영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정권 역시 노동운동을 상대로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지속하는 한편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와 노사화합을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1993년 정부와 경총이 나서 한국노총과 임금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려고 한 일이다. 그러나 전노협이 중심이 돼 총액임금제와 임금 가이드라인 분쇄를 위한 광범위한 연대전선을 형성하면서 사회적 합의 시도는 무력화됐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은 ‘21세기 초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신노사관계 구상’을 전격 발표하고 “참여와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노사관계를 정착시키기” 위해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한다. 3저 호황을 거친 후 국가의 울타리를 걷어내고자 하는 자본의 요구가 계속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WTO체제에 함께 하면서 OECD 가입을 추진하기 위해 노사관계 및 노동관계 법률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을 추진했다. 노개위에서는 기업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목표로 복수노조 허용, 제3자 개입 금지와 노조 정치활동 금지조항 폐지와 함께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도입을 시도했다. 노동자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성탄절 전날 자정 국회에서 기습적으로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했다. 민주노총이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고 시민사회가 광범위하게 반발하며 사회적 합의는 결국 무산된다. 두 달에 걸친 총파업과 국민적 저항으로 날치기 법안은 무산됐지만 곧 이은 외환위기와 IMF관리체제에서 ‘(가칭) 국난 극복과 경제회생을 위한 노사정위원회’가 발족돼, 비슷한 개악안을 ‘역사적 개악 대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직권조인하게 된다.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위기의 원인을 정경유착, 관치경제, 부정부패, 중소기업의 희생 등을 초래한 과거 권위주의 정부와 재벌에서 찾음으로써 금융 및 기업 구조 조정, 그리고 민영화 같은 구조개혁을 정당화했다. 이는 일부 시민단체의 경제민주화운동 방향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를 주물러 온, “국가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강경식을 비롯한 경제 관료들의 이해와도 일치했다. 실제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는 알려진 바와는 달리, 캉드쉬의 반대와 함께 미국과 IMF가 처음부터 강력히 요구한 것이기보다는 한국의 경제 관료들의 주도로 ‘IMF 플러스’ 프로그램에 포함된 것이었다.(4) 그런 점에서 1기 노사정 합의는 의제적 기획일 뿐,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권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이후 ‘자유로운 고용을 위한 자유로운 해고’와 기업연금제를 추진하고자 했던 노무현 정권의 노사정위원회도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 1998년 첫 노사정합의 전후에서부터 이 시기까지 노동조합운동 내부를 압박하는 사례 소개와 담론들이 넘쳐났다.
경사노위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와 자본 간 계급투쟁의 장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20세기 초중반 1·2차 세계대전까지 ‘혁명운동’이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유럽 전반을 흔들었다. 이렇듯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정치적 힘에 놀란 자본과 정부는 그들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타협정책으로서, 즉 노자 간 계급 적대성의 극복과정이 아닌 갈등을 완화하고 제도화시키는 과정으로 ‘사회적 합의’의 형태를 채택한다. 이는 노동자와 자본 사이의 일종의 생산성연합이자 경제잉여의 분배라는 사상에 기초한다. 그리고 전후 사회주의권의 존재를 배경으로 더욱 강력해진 조직노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기구의 타협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케인즈주의 자본 축적체제와 함께 했으며 국가에 따라 그 유형도 다양하다. 그럼에도 자본이 압도적으로 힘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이미 철지난 자본축적체제를 지탱하는 기둥으로서의 사회적 합의에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정권들이 거론하던 스웨덴, 네덜란드를 거쳐 문재인 정권이 사례로 들먹이는 덴마크의 상황을 살펴보자. 덴마크는 높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토대로 노조가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해 실업급여 등 사회보장을 확보하고 있다. 최근까지도 전체노동자의 60% 이상이 조직돼 있으며 그나마 2008년 세계공황 이후 실업기금 등 사회안전망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교하기 어렵다.(5)
문재인 정권의 등장은 화려했다. ‘소득주도성장론’을 내걸고 복지지출을 늘려 가계소득을 보조하고, 소비를 확대함으로써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것이었다. 무상급식에서 시작된 실험을 전면 확대한다는 것이었고 이전 정권들의 낙수론이나 4대강 사업 등과는 달리 공황 시기를 경기부양수단으로 대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과는 달리 복지를 강화한 예산을 편성하고 아울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상승, 노동시간 단축도 내걸었다. 그러나 자본에는 어떠한 강제도 없었다. 재벌개혁의 선두주자라고 하는 이를 공정거래위원장에 앉혔지만 초기 약속했던 상법개정 등 낮은 수준의 재벌개혁조차 없이 뒷골목 통닭집만 때려잡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재벌개혁운동본부 박상인 교수조차 “박근혜·최순실·이재용 게이트가 터지면서 변화에 대한 국민 욕구가 굉장히 높아졌고, 정부는 이러한 모멘텀을 가지고 개혁할 수 있었다”며 “그런데 정부 의지가 약했고, 나아가 친재벌적이었다”고 비판할 정도다.(6) 그리고 자본의 힘과 공격은 갈수록 강해지는데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노자 합의를 촉구한다. 노동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과 다름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나아가 탄력근로제를 도입해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무력화하는 한편 기존의 노동권 자체를 전면 해체하려고 한다. 노동권 보장을 위해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은 다시 경사노위를 통해 노동법 개악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처벌조항 삭제, 노조 부당노동행위 개념 신설, 파업 시 대체근로 전면 허용,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파업 찬반투표 유효기간 신설, 단체협약 유효기간 확대 등 과거 김영삼 정권부터 거론되던 악법까지 다 긁어모아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처리하려고 한다.(7)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며 산화한 전태일에게는 법조문의 한문을 읽어줄 대학생 친구가 없었던 것이 한이었지만, 김대중 정권 이래 지금까지 노동자에겐 그 어떤 정부도 바로 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친구가 돼주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의 경사노위 위원장을 비롯한 역대 노사정위 위원장들, 그리고 지금의 민주당 원내총무, 초기부터 민주노조운동의 선봉에 서왔다던 그들은 현재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 아래 ‘노동법 개악’의 선봉에 서있다.
지난 2016년 겨울 거리에서의 투쟁만으로는 부족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이 땅의 자유주의정권, 그들은 한국의 신자유주의 자본축적체제를 도입하고 안착시키고 진전시키는 세력일 뿐 노동자를 대리하는 친구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노동자가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나설 때만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이다. [워커스 54호]
1 〈 노동전선〉 31호, 전국노련
2 〈 한국의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지주형
3 〈 민주화 이행 이후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전환과 시기구분, 1987-2006〉, 권영숙
4 〈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지주형
5 “‘유연이 안정화’된 덴마크, 낮은 실업률은 ‘쉬운 해고’가 아니라 ‘경기 호황’ 때문이었다.” <변혁정치> 83호, 정은희
6 “정부, 재벌개혁 약속 지키지 않아” <한국경제 길을 묻다> 2019.03.17
7 노조활동 금지법, 노조파괴법. 문재인정부의 목적은 노조 말살인가. <변혁정치> 82호, 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