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큰 애정과 이해심을 가지고 서로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시각을 흑인 인구 전체에 확대하려 합니다. 또한 민중에게, 전 세계의 억압받는 민중에게도요. 우리는 다른 집단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이유지만 우리는 다른 대부분의 집단들보다 이 체제를 더 잘 이해하거든요. 이런 깨달음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공동체 내에 강한 정치적 기반을 만들려고 합니다. 자유를 얻지 못하면 파괴적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그 힘으로 말입니다.”
데드 프레즈의 2000년 곡 ‘Propaganda’에 등장하는 이 연설의 주인공은 급진적 흑인 운동 단체 블랙팬서당의 지도자 휴이 뉴턴이다. 연설을 인용한 이 혁명적 힙합 듀오는 “31년 전이었다면 난 블랙팬서였겠지. 그들은 휴이를 죽였어. 그가 답을 가졌다는 걸 알았으니까”라는 가사로 뉴턴에게 존경심을 표현했다. 실제 뉴턴을 살해한 범인은 따로 있었지만 어쨌든 이들은 미국 정부가 프로파간다를 퍼트려 뉴턴이 주장하는 진실을 없애려 했다고 봤다. 미국의 미디어에서 블랙팬서당과 뉴턴은 늘 폭력과 극단주의 같은 부정적 이미지와 결부돼 묘사됐지만 자신들의 음악을 혁명의 도구로 본 데드 프레즈에게 뉴턴은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미국의 힙합 음악계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뉴턴은 1942년 루이지애나 주 먼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곧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로 이주했고 그는 그곳에서 학업보다는 범죄와 가까이 지내며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글을 모를 정도였던 그는 뒤늦게 독서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을 다니면서는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프란츠 파농, 맬컴 엑스, 마오쩌둥, 체 게바라 등의 사상에 매료됐다.
시민권 운동이 블랙 파워 운동으로 급진화되던 시대의 흐름에 동참해 그는 1966년 바비 실과 함께 오클랜드에서 블랙팬서당을 결성했다.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흑인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총을 들고 오클랜드의 거리를 순찰하는 당원들의 모습은 모든 미국인들에겐 충격이었다.
그러나 블랙팬서당과 뉴턴에게 평온한 순간은 거의 없었다. 1967년 뉴턴은 경찰과의 총격전에 연루돼 총상을 입은 채 경관 살해 혐의로 체포됐다. 이 사건을 정치적 탄압으로 본 당원들은 백인과 아시아인 급진주의자들과 연합해 대대적인 뉴턴 석방 캠페인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당은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1970년 뉴턴이 석방됐을 때는 미국 각지뿐 아니라 외국에도 지부를 둘 정도로 크게 발전해 있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아니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주역으로 본 이들의 이론은 대단히 특이해 보였지만 적어도 미국 도시의 가난한 흑인 공동체에서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다.
그러나 당 지도부에 복귀한 뉴턴은 이전보다 온건한 노선을 추구했다. 그에게서 혁명적 지도력을 기대하던 이들은 당혹스러워했다. 노선 차이는 미 연방수사국 (FBI)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공작에 힘입어 지속적인 갈등으로 표현됐다. 곧 뉴턴은 망명 상태에서 외국 지부를 이끌던 엘드리지 클리버를 비롯한 과격파를 차례로 쫓아냈고, 이전의 흑인 민족주의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대신 혁명적 상호공동체주의 (intercommunalism)를 주장하며 국내 흑인 공동체 조직 활동에 집중했다.
세력이 약해진 이후에도 뉴턴은 계속해서 당을 이끌었지만 그다지 좋은 일은 없었다. 그는 1971년 중국을 방문해 큰 환대를 받았고 총리 저우언라이와 북한 대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중국은 미국과 외교관계를 개선했고 자연스럽게 블랙팬서당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974년 십대 성매매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자 뉴턴은 쿠바로 망명해 1977년까지 머물렀고 미국으로 돌아온 뒤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외에도 뉴턴과 그의 당에는 살인, 폭행, 횡령 등 각종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사건들의 진위를 일일이 따지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수사당국이 진행한 공작의 산물과 당이나 지도부인 뉴턴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결국 블랙팬서당은 1982년 해산했고 뉴턴은 1989년 오클랜드의 거리에서 흑인 마약 판매원의 총격으로 살해됐다.
뉴턴은 미국의 흑인 힙합 음악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특히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는 래퍼들의 가사에서는 누구보다도 자주 뉴턴의 이름이 등장한다. 블랙팬서당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이미지와 결부돼 있는 예술인 힙합에 종사하는 음악인들은 뉴턴과 그의 당에 대한 비난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신 그가 보여준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정신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와 직접 인연을 맺은 음악인들도 있었다. 어린 시절 블랙팬서당의 무료 급식과 교육 프로그램을 경험한 바 있는 래퍼 척 디는 명백히 블랙팬서당을 계승하고자 하는 그룹인 퍼블릭 에너미를 출범시키면서 뉴턴에게 조언을 받았다. 뉴턴은 오클랜드에서 열린 퍼블릭 에너미의 공연 무대에 올랐고 사망하던 해까지도 척 디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힙합계에서 투팍만큼 뉴턴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은 없다. 블랙팬서 당원의 아들인 그는 시와 가사로 끊임없이 당과 뉴턴에 대한 존경심을 표해 왔다. 사실 그의 어머니나 대부는 뉴턴과 대립한 후 축출된 과격파에 속했지만 투팍은 그런 차이보다는 블랙팬서의 대의에 더욱 공감했다. 사실 투팍의 삶 자체가 여러 모로 뉴턴을 닮았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래퍼인 그는 블랙팬서당이 탄생한 오클랜드의 힙합 그룹 디지털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고 그곳의 경찰과 불화하며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뉴턴처럼 투팍도 활동 내내 백인 사회와 미디어의 비난에 시달렸고 총격 사건과 수감 생활을 경험 했으며 결국 흑인의 총에 살해됐다. 무엇보다도 뉴턴과 투팍은 많은 흑인 대중들에게 사랑받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투팍을 존경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서부의 대표 래퍼 켄드릭 라마가 자신의 음악에서 블랙 팬서당과 뉴턴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직 힙합 음악인들이 많이 주목하지 않은 뉴턴의 사상이 있다. 힙합이 그를 사랑하는 한 언젠가는 이 주장도 주목받는 날이 올 것이다. 뉴턴이 1970년 남긴 글 중 일부다.
“여러분이 동성애와 여성에 대해 가진 개인적 의견이나 불편함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들을 혁명의 흐름 안에서 통합하려고 노력해야만 합니다. (…)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 동성애자가 혁명가가 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아마 동성애자는 가장 혁명적인 이들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패것(faggot)’이나 ‘펑크(punk)’ 같은 단어들은 우리의 어휘에서 삭제돼야 마땅합니다. (…) 우리는 게이와 여성 해방 집단들과 같이하는 연합을 형성해야만 합니다.”[워커스 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