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
나는 요리가 취미인 사람이었다. 그땐 음식을 만들어 혼자 먹기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을 더 자주 했다. 맛있게 먹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온종일 마음이 환해졌다. 가장 많이 나눠 먹었던 음식은 ‘딸기코코넛밀크 푸딩’이다. 딸기와 코코넛 밀크가 푸딩에 함께 들어가면 멋진 맛이 난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는 기회만 생기면 그걸 만들었다.
그래서 그날도 딸기코코넛밀크 푸딩을 디저트로 준비했다. 점심 도시락을 싸서 애인의 직장에 찾아갔던 날이었다. 그 사람은 만족스러운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공개된 푸딩의 자태에 완전히 감격해 버렸다. 그렇게 급하게 사진을 찍어대다가 실수로 다른 앨범을 열어 버리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앨범에 잠금 설정도 없이 그런 걸 넣어두다니, 철저한 성격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결국 푸딩을 마저 먹고 일어났었는지, 그냥 버렸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던 모습은 아직도 꽤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푸딩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지금은 요리에 별 흥미가 없다. 푸딩이 먹고 싶어지면 아쉬운 대로 사다 먹는다. 현실은 사이다처럼 속 시원하게 전개되지도 않아서, 나는 그 사람과 1년이나 더 만나다가 헤어졌다.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아무리 쌓는다고 해도 불법촬영과 같은 종류의 일은 도저히 용서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는 데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다. 그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충격적인 감각도 이제 무뎌지고, 건조하게 푸딩의 행방을 고민해 볼 수 있게 됐다. 어차피 그건 처음 겪는 성폭력 피해 경험도 아니었고, 마지막으로 겪은 불법촬영 피해 경험도 아니었다. 웬만하면 다 거기서 거기인 느낌이 될 때까지 견디며 살아가는 게 이번 생이라면, 이미 지나간 일들을 어쩔 것인가. 성평등 사회 이룩해서 성폭력 없는 미래를 만드는 것 외에 별다른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나는 활동가로 살면서 좋았다. 도저히 움직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세상이 조금이라도 몸을 뒤척이는 기색을 보일 때,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나왔던 날처럼 쿵, 하고 무거운 발소리가 날 때, 그 미래에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세상과 내가 함께 변했다. 나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공유할 수밖에 없게 된 비겁함과 지겨움을 좀 더 잘 참을 수 있게 됐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이 궁금하지 않았는데,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질문하게 됐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타인의 삶에 뛰어들면서 겪게 되는 몇몇 일들은 예상 밖의 방식으로 나를 살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런 일도 있었다. 지난해 5월, 한사성은 스튜디오 촬영 성폭력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내 고발해주신 분에게 힘이 되기 위해 온 신경을 쏟는 중이었다. 한동안 휴일이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한 사람의 촬영물을 찾아보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 혼자 부당한 비난과 모욕을 감당하게 된 것이 너무 초조하고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으므로,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스튜디오 실장의 유포 정황이 포착되고 모집책 등 촬영물 생산자와 해외 불법포르노 사이트, 모 디지털 장의사의 연결고리가 드러난 후에도 피해경험자를 향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게 더는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사이버성범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법원 앞에서 인터뷰하던 모습 때문일까? 그 사람은 고통을 이겨내고 당당히 맞선 사람의 얼굴이 되었더라. 그건 그 사람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는 뜻도 아니고, 언제나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뜻도 아니지만, 그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치며 내 안에서 뜻밖의 변화가 생겼다. 촬영물 유포 이후에도 살아있는 내 모습을 처음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나는 촬영물이 유포된 다음에도 살아있는 내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생각해 봤을 때, 사이버성폭력 근절을 위해 활동하는 여자의 촬영물이 어떻게 소비될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이 그걸 괜찮게 만들었다. 나와 그는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서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일 수도 있었을 텐데, 단지 그 사람이 살아서 말하는 세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살아지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겠다는 얘기다. 나의 삶은 점점 더 이런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고, 별로 그만둘 생각이 없다. 그냥 계속해서 시끄럽게 말하고, 글을 쓰고, 거리로 나가고, 절망적인 순간이 길어지면 만 번의 패배 중에서 한 번 승리한 그 순간을, 살아남았던 일을 곱씹으며 버티다가 끝에 가서는 성폭력 없는 미래 세상에서 살아가는 할머니가 될 거다.
여성을 비켜가는 국가와 법, 정의
5월 15일, 버닝썬 게이트 수사 결과 발표가 이루어졌다. 경찰은 버닝썬과 경찰 간 유착이 의심되는 정황을 찾지 못했다며 ‘혐의 없음’으로 수사를 종결했다. 정준영 카톡방에서 그들의 뒤를 봐주는 인물로 언급된 ‘경찰총장’ 윤 모 경찰총경은 죄가 될 만큼의 금품을 받지는 않았고, 접대를 받기는 했지만 친분을 쌓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괜찮다고 했다. 다만 윤 총경이 유리홀딩스의 라운지바 단속 관련 내용을 유인석에게 알려준 적이 있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는 기소가 됐다는데, 어쨌든 클럽 등의 유흥산업과 경찰의 구조적 유착관계는 드러나지 않았다는 결론이었다.
유리홀딩스의 공동대표 승리, 유인석, 버닝썬 대표 이문호, 마약공급책으로 지목된 MD애나 등은 모두 구속수사 영장이 기각돼 길거리를 활보하게 됐다. 12차례나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를 받고 있는 승리는 영장 기각 당일 여유롭게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일상을 누렸다. 그가 대표로 있는 동안 클럽에서 약물강간을 당한 여성들, 그 여성을 불법촬영하고 공유한 남성들과 ‘X 같은 한국 법, 이래서 사랑한다’던 그의 카톡 내용이 동시에 떠올랐다.
한편 5월 16일에는 검찰이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피의자 김성수에게 사형을 구형했다는 기사가 났다. 검찰의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사형 구형과 버닝썬 수사 결과는 1대 1로 대응 가능한 건이 아님을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사형 구형 자체에 크게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소식은 버닝썬 수사결과를 규탄하는 입장문과 기자회견을 쓰고 있는 나의 존재를 조금 구차하게 만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업로드 한 기자회견문에는 버닝썬 직원의 “ㅋㅋㅋㅋㅋㅋㅋㅋ”라는 댓글이 달렸다.
이 원고를 쓰는 오늘도 장자연 사건에 외압이 있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어떤 증거가 얼마나 증발했는지, 이번 수사가 왜 말도 안 되는 것인지 짚어주는 좋은 글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재수사는 없다고 한다. 김학의 사건 수사는 어떻게 돼가고 있을까? 간간히 성매매 업소를 운영했다는 남경찰에 대한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국가나 법, 정의 같은 큰 단어들이 여성을 비껴가고 있다. 이 풍경 속에서 나는 혹시 투명해졌을까? 어딘가에 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괜히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안녕하세요. 나는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입니다. 요리가 취미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성평등 사회 이룩해서 성폭력 없는 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활동가로 사는 게 좋습니다. 뭐든지 간에 별로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둘러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를 확인하고 싶다. 이번 달에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집회를 열어야겠다.[워커스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