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주, 윤지연, 정은희 기자
▲ 지난 5월 1일 네오나치 시위에 맞서 DW 몰수를 지지하는 이들이 “조용히 하고 사회화하라”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출처: @dwenteig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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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후 가장 큰 정치적 격변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독일 일간 <슈피겔>은 4월 6일 초국적 거대 부동산기업 ‘도이체 보넨(Deutsche Wohnen AG, DW)’ 몰수를 위한 주민투표 청원 운동을 보도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이날, 베를린에서만 4만 명이 DW 몰수와 사회화를 위해 시위를 벌였다. 슈피겔의 표현만큼, 현재 독일에선 DW 몰수와 사회화 운동이 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독이 자본주의 서독에 흡수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독일 국민들은 다시금 사회주의 정책에 눈을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운동을 지지하는 세입자들은 주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부동산 대기업을 사회화하는 길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3000채 이상 소유 부동산기업 몰수
‘DW 몰수’라는 연대모임이 주도하는 이 운동은 3000채 이상을 소유한 부동산기업을 몰수해 공공기관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원이 성사될 경우 모두 20만 채가 몰수된다. DW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 기업이 전국적으로 소유한 부동산은 주택 16만3천 채와 상업용 부동산 2천600채로, 이 중 11만1500채 이상이 베를린에 있다. 베를린에 있는 부동산 열 채 중 한 개꼴이다.
DW는 베를린에서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가장 큰 미움을 사는 부동산기업이기도 하다. 곰팡이와 단전, 단수 문제 등, DW가 소유한 주택을 둘러싸고 매번 잡음이 흘러나오는 까닭이다. 세입자들은 DW가 주거 문제 해결에 능력이 없거나 관심이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동안 DW는 부동산이라는 ‘상품’으로 다양한 투기를 벌여왔다. 대표적인 방법은 ‘리모델링’을 통한 임대료 인상이다. 베를린 공공정책은 임대료 인상에 인색하지만, 리모델링을 할 경우에는 인상률의 폭이 넓어진다. 세입자 회전률 또한 높일 수 있다. 때문에 DW는 큰 비용을 들여 리모델링을 하고, 더 많은 돈을 세입자에게 청구해왔다.
부동산을 사재기하거나, 각종 중소 부동산기업을 인수하는 것도 DW의 투기 방법이다. 이외에도 DW는 로비에도 큰돈을 들였다. 스타 변호사들을 고용해 베를린 공시지가가 자사에 유리하게 책정되도록 손을 썼다. DW는 이런 투기 전략으로 2018년에만 50억 유로의 순수익을 냈다. 2010년과 비교해 수익이 두 배가 뛰었다. 거주용 주택 임대 수익은 2012년 1억9400만 유로에서 2018년 6억5600만 유로로 약 3배가 뛰었다.
주택은 공공재
이 같은 임대료 상승분은 주주 배당금으로 돌아갔다. 대부분은 초국적 금융투기회사들의 차지였다. DW의 최대 주주는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자산운용회사 블랙록(BlackRock)으로, 10.2%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미국 금융회사 MFS가 9.94%, 국영펀드로 투기를 해온 노르웨이중앙은행(NB)이 6.93%의 지분을 갖고 있다.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지난해에만 319억 원을 챙겼다.
반면 수십만 명의 가난한 시민들은 주거공간에서 밀려나고 있다. 임대료 상승으로 저소득층 거주자를 위한 주택이 계속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DW 베를린 주택의 평균 집세는 지난 10년간 2배 이상 치솟았다. 그 결과 베를린 평균 주택비 부담률도 35%까지 올랐다. 임금이 계속 정체돼 온 것도 주택비 부담을 끌어올린 요인이 됐다.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임대료가 소득의 30%를 넘으면 임대료 부담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DW가 이렇게 많은 주택을 소유하게 된 건 베를린 정부 탓이 크다. 처음에는 통독 뒤 기민당-사민당 대연정이, 그리고 이후에는 사민당-좌파당 적적정부가 민영화를 추진하며 DW에 공공주택회사를 헐값에 매각했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에게 좌우파 모두 인기가 없는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다.
결국 더 이상 내몰릴 곳이 없어진 세입자들은 DW 몰수 운동에 나섰다. 그전에도 세입자들은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 모아비트 등에서 DW에 맞서 투쟁해왔다. 크로이츠베르크에선 ‘앞으로 리모델링을 추진할 경우 세입자 등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는 법 조항을 이끌어냈다. 2014년에 세입자들이 지역 개발 정책을 뒤바꿔 놓은 사례도 있다. 당시 베를린 지역정부는 폐쇄된 템펠호프 공항 주변 지역을 개발할 예정이었는데, 주민투표로 이를 좌초시켰다. 2015년에는 주민투표로 베를린 시로부터 주택 5000채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다수의 시민들은 주택이 민간자본 손에 있는 한, 임대료나 부동산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다고 보고 있다. 지난해 말에도 베를린 법정이 DW의 부동산 사재기를 제한했지만, 보란 듯이 다른 지역에서 다시 사재기해 공공정책을 무력화시킨 바 있다. 때문에 세입자들은 주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부동산 대자본 몰수와 사회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DW 몰수 운동의 전략은 3가지다. 우선 세금과 규제를 통해 사영 주택시장을 억제하고, 공공 소유로 주택으로 이전한 뒤 공공주택회사를 통해 민주성을 보장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일부 정치인이나 정부가 아닌 아래로부터 관철돼야 한다는 게 이들이 강조하는 대목이다.
▲ “지불가능한 주거공간은 기본권”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출처: www.dwenteigne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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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사회화
DW 몰수 운동 전략은 이를 주도해온 독일 극좌파 연합 단체 인터벤치오니스티셰링케(Interventionistische linke) 그룹이 2017년부터 베를린 등의 도시에서 다양한 사회운동과 ‘사회주의 도시를 위한 전략’에 대해 토론해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주택시장의 사회화, 즉 민영 주택을 공공 소유로 이전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격상승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안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실제로 베를린에서 4만 명 규모의 부동산기업 몰수 시위가 열린 지 한 달 만에 함부르크에서도 6천 명 규모의 유사한 시위가 일어났다. 5월 4일 이 시위를 주최한 ‘미텐무브(Mietenmove)’라는 연대단체에는 로테플로라라는 아나키 센터부터 독일 통합서비스노동조합 ‘베르디’, 그리고 ‘세입자들의 도시권(Recht auf Stadt)’이라는 모임까지 다양한 단체가 참가하고 있다.
DW 몰수 운동은 헌법을 근거로 공익이 우선할 경우 재산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DW나 우익 세력은 사유재산권을 우선하며 “몰수될 수도 몰수당하지도 않겠다”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이제 DW 몰수 운동은 이를 주민투표로 가리자며 6월을 목표로 주민투표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정당은 좌파당이 유일하다. 녹색당은 마지막 수단으로 검토해볼 만하다고 밝혔다. 반면 우익 기민당이나 자민당은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
DW 몰수 운동은 청원 시작 3주 만에 이미 10만 서명을 모았다. 운동을 주도한 활동가 로우츠베 타헤리(Rouzbeh Taheri)는 “우리 목표는 원래 6만 명이었지만 훨씬 능가했다”라며 “얼마나 많은 세입자들이 부동산 대기업 사회화를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도는 사실상 이미 베를린을 넘어 뻗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과연 이 시도가 여기, 한반도 부동산 왕국에도 도착할 수 있을까?
* 도이체 보넨(Deutsche Wohnen AG, DW)
DW는 1998년 도이체방크가 개설했다. 초기 자금은 1998년 연기금 회흐스트(Hoechst)와 라인라트팔츠 주가 구입해 둔 부동산주식자산으로 구성됐다. 도이체방크는 DW를 1999년 11월 상장한 뒤 2006년 민영화해 사기업으로 전환했다. 이어 2007년 7월 DW는 2008년 공영주택회사 GEHAG를 미국 투자회사로부터 사들였다. GEHAG는 1924년 설립된 공영주택회사로 주로 동독에 위치한 주택을 관리했으나 1998년 서독에 흡수된 뒤, 부분 민영화된 후 2005년 미국 투자회사가 주식 85%를 사들였다가 DW에 매각된 곳이다. 2012년 DW는 영국 바클리즈 투자회사와 독일주택관리회사 Baubecon에 부동산 2만3500채를 매각했다. 2013년에는 베를린 민영화 정책에 따라 서독에 소재한 공영주택회사 GSW의 주식도 인수해 베를린 최대 부동산기업이 됐다. 물론 최대 주주는 초국적 자본이다.
미국에서 아일랜드까지, “미친 임대료” 시위
“Oh the rent, Oh the rent, Oh, the rent is too damn high…”
“오 임대료, 오 임대료, 오 임대료가 너무 높다”5월 14일 뉴욕. 알바니 주의회 앞에서 열린 ‘세입자 집회’(Tenant Action)에서 2천 명에 달하는 시민이 이 같은 구호를 외쳤다. 미국 좌파 매체 ‘피플스월드’에 따르면 이들은 주 의회의 계단과 홀을 점거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동시에 의회 공무원들에게 30일간 ‘퇴거’를 명했다. 세입자들이 숱하게 당하는 ‘퇴거 압박’을 되돌려주자는 차원의 운동이었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는 세입자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세입자들은 ‘모두를 위한 정의로운 주거(Housing Justice for All)’라는 연대체로 행동을 확장하고 있다. 연대체에는 세입자뿐 아니라 노동조합, 사회단체, 좌파 정치단체 등 다양한 주체들이 모였다. 시민권 운동을 하는 한인들도 일부 참여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세입자은 약 50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의 RIR(월 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은 30%를 웃돈다. 심지어 세입자의 약 30%는 월 소득의 절반을 임대료에 쏟는다. 한국 일반 가구의 RIR이 15%인 것과 비교했을 때, 뉴욕 임대료는 세입자를 ‘고사’하는 수준이다.
이들이 주의회를 장악한 것은 법 제도 마련을 요구하기 위해서다. 특히 6월 15일은 세입자 보호법 만기일이다. 그동안 세입자들은 이 보호법 아래 정당한 이유 없이 강제 퇴거당하는 일만은 피할 수 있었다. 세입자들은 이 집회에서 보호법 확대뿐 아니라 주 정부 차원의 ‘임대료 통제법(Rent Control Law)’ 제정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 매체 ‘더뉴퍼블릭’은 세입자 권리 운동이 뉴욕 전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서는 지난해부터 빈집 점거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Take Back the City(도시를 탈환하라)’라는 캠페인이 만들어져 주거 활동가뿐 아니라, 노조, 학생 등이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8월부터 빈집을 점거해 정부에 주택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자산이 아닌 집(Build Homes not Profits)’을 지으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점거 성명을 통해 “모든 빈 땅과 주택은 공공의 소유 아래 있어야 한다”며 부동산의 공공재를 주장했다. 따라서 공공이 소유한 빈 주거용 건물을 6개월 이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캠페인에 따르면, 아일랜드엔 약 1만 명이 임시 거처에 거주하고 있으며, 18년 동안 공공 임대 주택을 기다리는 사람만 14만4000명에 달한다. 청년 주거난도 심각하다. 아일랜드의 한 국립대학의 경우 기숙사 임대료를 한 학기 만에 18%를 올려 학생회가 소송을 제기한 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