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인(한국 정치와 사회운동을 연구하면서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며, 한신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 친숙하지 않은 프랑스 사상가 소렐(Georges Sorel)만큼 논쟁적인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혁명적 생디칼리즘(전투적 조합주의)을 체계화한 이론적 지도자였지만, 악시옹 프랑세즈(Action française)의 군주제적 민족주의에 관심을 보였으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지지하는가 하면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보낸 복잡다기한 사상적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념적 스펙트럼이 넓은 그에게 사상적 규정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소렐을 상징하는 핵심 키워드는 ‘폭력’과 ‘혁명’이다. 대표적 저작인 《폭력에 대한 성찰(Réflexions sur la violence)》(1908)은 전복적인 제목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저항 폭력에 대한 성찰’이다. 그의 폭력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한 저항 폭력이며, 이 저항 폭력은 노동자 계급의 총파업 및 직접 행동을 의미한다.
생디칼리스트로서 소렐은 사회주의 건설을 생산 수단의 사회화보다는 총파업에 집중했다. 그는 의회사회주의자인 조레스(J. Jaurès)와 총파업을 영국 노동자들의 환상이라며 부정적으로 인식한 시드니 웹(Sidney Webb)의 입장에 대해서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계급 투쟁을 사회주의의 본질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총파업을 선호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즉, 총파업만이 대안이라는 것이다. 총파업이 현실적으로 타당하고 가능한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총파업이 사회주의 건설의 매개가 될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그들이 가진 가장 숭고하고 가장 심원하며 가장 역동적인 감정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오늘날 부르주아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유의 습속이 몸에 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에게 저항 조직들에서 출현하는 맹아적 구성체들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가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124~125) 총파업이 너무 역동적이라서 일단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지배자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며 따라서 의회의 권력이 무기력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잘 알고 있다.
소렐은 ‘총파업’을 종교의 차원으로 설명했다. “베르그송은 종교가 인간의 심원한 의식의 영역을 점령하고 있는 유일한 힘은 아니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거기에는 혁명적 신화들이 종교와 마찬가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70) 또한 소렐에게 총파업은 ‘현대의 영웅 서사시(das Heldenepos der Moderne)’이다. 비로소 ‘총파업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총파업이란 “사회주의의 모든 것이 담긴 신화, 현대 사회에 맞서서 사회주의가 벌이는 전쟁의 다양한 표현들에 부합하는 모든 감정을 본능적으로 일깨울 수 있는 이미지들의 총화이다.”(181)
이 ‘총파업 신화’가 하나의 이미지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본능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모든 개별적 행위들은 파편화하고 만다. 노동자가 총단결해 일어설 수 있다는 신화 자체가 노동 대중의 관심을 혁명에 집중시킨다는 주장이었다. 신화란 순수한 폭력을 추구하기 위한 최초의 동기이자, 이들의 행위를 정당화, 혹은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다. 신화란 유토피아와 마구 뒤섞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파시즘 행위를 충분히 신화로서 정당화시킬 수 있는 단점이 남는다.
벤야민에게는 소렐이 폭력으로 간주한 ‘총파업’이 법을 유지하거나 법을 제정하는 어떠한 객관적인 관계도 없기 때문에 폭력으로 인정될 수 없다. (벤야민에게서 폭력은 실정법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또 벤야민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자연법적 관점을 따른다면 이는 바로 테러리즘이라고 간주한다.
‘인정 투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소렐이 이미 사회적 투쟁이 상호 인정의 규칙들을 훼손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명확한 틀과 개념 속에서 인정 투쟁 이념을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파편적으로만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렇게 그의 신화 이론은 지적, 실천적 고민의 산물이었으며, 이후 벤야민, 호네트, 네그리 등 다양한 철학적 폭력 이론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다양한 이념적 편력은 역사 유물론, 변증법적 유물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거부하는 데서 연유한다. 당대의 마르크스주의가 혁명 이론으로서 노동자를 동원하는 데 실패했고,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소렐은 《마르크스주의 비판론(Saggi di critics del marxismo)》에서 마르크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과학적으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 해 주거나 심지어 어떤 가설이 다른 가설보다 우월함을 논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필연적이고 혁명적인 변화를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직접적인 행동을 좋아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종교나 신학의 영역으로 몰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망을 현실 속에서 필사적으로 찾고 또 실천으로 옮기려 시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