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평에 갇혀 사는 화물차 기사들을 뭉치게 한 한 방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집행위원.
“지난 급수 부족 사태로 야간 화물 차량 운전자분들께 불편을 끼쳐 드려 대단히 죄송하며, 이번 일을 거울삼아 운전자분들께 쾌적한 휴식 공간 제공을 위하여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2002년 8월 2일.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에 ‘화물차 운전자분들께 드리는 사과문’이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8월 9일에는 운송하역노조에 ‘덕유산 휴게소 이용 차별 대우 해결에 관한 건에 대한 회신’이라는 공문이 도착했다. 휴게소는 “화물차 운전기사 여러분께 거듭 심심한 사과를 드리오며”, 버스 전용 야간 주차장을 자유롭게 활용하라고 했다.
사건은 이랬다. 당시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화물 기사를 위한 휴게실이나 샤워실이 없었다. 먼 길 화물을 실어 나르는 기사들은 휴게소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양치를 했다. 화물차 기사들은 휴게소에 주차하는 것도 눈치를 봐야 했다. 대형차가 주차할 공간이 부족해 소형차 자리에 주차하려고 하면, 주유소 직원들이 차를 대지 못하게 했다. 승객들을 40명씩 싣고 오는 고속버스나 관광버스는 기사 식당을 따로 마련해 1등 손님 대우를 하면서, 대형차를 몰고 혼자 오는 화물 기사들은 천덕꾸러기 취급했다.
여름 휴가가 절정인 8월 1일, 한 화물 기사가 덕유산 휴게소에 들어서자 휴게소 직원은 주차할 곳이 없다며 화물차를 막았다. 화장실에서 씻지도 못하게 했다. 화물차 기사는 당시 운송하역노조가 기사들을 조직하기 위해 만든 ‘화물 노동자 공동 연대 준비위’에 가입한 노동자였다. 그는 주파수공용통신(TRS) 장치를 통해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덕유산 휴게소로 모이라고 했다. 주차장 마당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화물차들로 가득 찼다. 버스가 못 들어오게 되자 난리가 났다. 휴게소 책임자는 곧바로 사과하고 하루 만에 현수막을 붙였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화물차 기사들에게 퍼졌고, 이후 옥천, 옥산 휴게소로 확산했다. 이름하여 ‘휴게소 투쟁’. 0.5평 운전석에 갇혀 사는 화물 기사들을 세상으로 나오게 만든 한 방이었다.
뭉치면 달라진다
한국의 화물차 기사는 42만 명. 2001년까지 이들은 지입차주라는 이름의 ‘사장님’이었다. 지입차주란 운수 회사에 개인 소유 차량을 등록해 일감을 받아 일한 후 보수를 지급받는 기사다. 심심찮게 대동맥을 멈춰 세우는 유럽의 화물 노조와 달리 한국의 화물 기사들은 어떤 단체행동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이 노조로 뭉치게 된 사연이 있다.
2001년까지 화물 기사들은 ‘맛대가리’ 없고 비싸기만 한 휴게소 식당을 이용하지 않았다. 고속도로 인근 간이 정류장에 화물차를 세워 놓고 민간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데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도로공사 소속이었던 휴게소를 민간에 팔았다. 도로공사는 민간 휴게소를 위해 간이 정류장을 폐쇄했다. 게다가 기름값이 치솟았다. ‘뚜껑’이 열린 기사들은 무전기로 연락해 항의 표시로 서행 운전을 하기로 했다. 화물차들이 시속 40킬로미터로 운행하자 고속도로가 꽉 막혔다. 경찰이 출동해 화물 기사들을 잡아갔고, 두 명이 구속됐다. 연행되지 않은 기사들이 민주노총 운송하역노조를 찾아갔다. 화물 노조를 만들기로 하고 9명이 발기인이 됐다. 기사들은 무전기로 동료들을 하나둘 모아 나갔다. 화물 기사들이 뭉치면 달라진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고속도로 휴게소 투쟁 이후 조직은 급물살을 탔다. 2002년 10월 27일 부산대에는 예상을 깨고 1500명 이상의 화물 기사들이 모여 화물연대를 출범시켰다.
다섯 번의 총파업
제조업 노동자들에게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면 화물 노동자에게는 2003년 5월 총파업이 있었다. 3월 22일 포항 집회에 2500명이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3월 31일 과천정부종합청사 3500명, 4월 13일 부산 집회 4700명, 5월 1일 노동절 집회에는 무려 1만 명의 조합원이 참가했다. 모인 분노는 폭발했다. 5월 2일 포항지부에서 시작한 연쇄 파업은 14일 동안 이어졌다. 2003년 5월 총파업에 놀란 정부는 화물연대의 요구안을 수용하겠다며 12개항에 이르는 5.15 노정 합의를 맺었다. 그해 8월 총파업 패배로 1만 명이 화물연대를 탈퇴하며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지만 화물 노동자들은 다시 일어섰다. 2006년 3월 총파업에서는 삼성이라는 거대 화주 업체와 싸웠고, 2006년 12월 총파업을 통해 ‘표준요율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기도 했다. 광우병 쇠고기를 실어 나르지 않겠다고 선언해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2008년과 201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총파업으로 화물연대는 명실상부한 42만 화물 노동자들의 대표 조직이 됐다.
화물운송 집단 거부는 태풍, 전산 마비, 전력 마비, 전염병 등과 함께 정부의 ‘위기 관리 대응 매뉴얼’ 최상위 6개 조항 가운데 하나다. 화물연대가 파업을 하면 국토부 고용노동부 기획재정부는 물론 국방부까지 15개 부처가 함께 대응한다. 민간은 물론 군사물자 수송까지 중단되기 때문이다. 부산항, 인천항을 비롯한 전국 주요 항만과 국가산업단지에서 격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총자본과의 투쟁, 14년 동안 100명이 구속되는 희생을 치렀지만 조합원 1만 4천 명의 화물연대는 42만 화물 노동자의 구심이 됐다. 나아가 숨죽이던 덤프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워 1만 5천 명의 덤프연대를 결성하게 만들었다.
출발은 작은 노력이었다
화물연대를 조직한 활동가들은 화물차 기사가 노동자인지 아닌지, 노조로 조직할 것인지 자영업자 단체로 조직할 것인지 치열하게 논쟁했다. 노동자성을 거세당한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의 핵심 특수 고용 노동자. 이들에게 노동자성을 회복시키는 싸움이었다. 특수 고용이라는 조건을 고려해 노조 설립 신고 필증을 얻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정부와 자본을 교섭에 끌어내 노조로서의 실질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한 사업주를 상대로 한 일시적인 싸움 대신 법과 제도를 바꾸는 큰 싸움을 만들었다. 화물연대를 잉태시킨 조직 운송하역노조. 2002년 운송하역노조는 항만에서 물건을 하역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된, 5천 명 규모의 작은 노조였다. 운송하역노조 활동가들은 화물 기사들을 조직하기 위해 전국의 휴게소와 터미널을 돌아다녔다. 휴게소가 화물 기사들을 업신여길 때 활동가들은 그들에게 냉커피를 타 주고, 선전물을 나눠 주며 노동자성을 일깨웠다. 정부와 재벌이 두려워하는 조직, 태풍보다 무서운 화물연대도 노동운동가들의 작은 노력에서 출발했다.(워커스 8호 2016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