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은 새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하미강 대위와 함께 가상 현실 속 평양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평양을 지키고 있는 김정은을 만난다.
인물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담당자로 부임한 해병 장교.
김형태 국정원 요원, 김정은의 행동 분석과 예측을 위해 그를 전문적으로 연기하던 인물. ‘김 주사’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음.
침묵의 도시에 밤을 알리는 장막이 내려앉았다. 붉은 장막의 끝자락은 저택을 둘러싼 방호물에 걸려 찢긴 채로 창문을 건너 접견실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미강은 잠시 시간 감각에 혼란을 느꼈지만 지민은 별 동요 없이 두 사람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지민은 김 주사에게 질문했다.
“집 밖으로 나가 본 지 얼마나 됐어요?”
“모르겠소. 어제 일도 잘 기억 안 나는군.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 있던 기분이오.”
“바람 좀 쐬러 나가요.”
저택 출입문을 지나려다 기둥에 쓰인 ‘학살자’라는 낙서를 본 김 주사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볼 뿐이었다. 글씨는 낮에 봤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고 살아 있는 것에서 갓 빠져나온 피처럼 생생했다. 지민은 그것이 정말로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져 김 주사가 걸음을 멈추고 저택 밖으로 나가기를 망설이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것들은 지워도 지워도 계속 나타나고 있소.”
“에이도스, 정말로 이곳에 우리뿐이야?”
지민은 몇 번이나 에이도스를 호출했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뿐이었다. 지민은 미강을 돌아보았다.
“대위님, 무장하고 있나요?”
미강은 해병대 정복 차림의 자신을 보라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이 옷은 주머니에 손톱깎이 하나 넣어도 티 나거든요.”
“손에 들고 있는 것은요?”
지민의 말에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권총을 본 미강은 탄창을 뽑아 안에 들어 있는 탄약을 확인한 뒤 넋 나간 표정으로 지민을 바라보았다. 지민은 투덜거렸다.
“에이도스, 무슨 장난을 치는 거야….”
권총을 쥔 미강은 김 주사 옆에 붙어 그를 경호하듯 움직였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훈련을 받았던 이가 자신에게 밀착해 경호하는 모양새가 적잖이 어색했는지 김 주사의 발걸음은 더뎠다.
셋은 저택을 중심으로 하는 통제 구역을 벗어나 광장으로 길을 잡았다. 사방이 열려 있는 공간으로 인도하는 지민에게 김 주사와 미강이 잠시 투덜거렸지만 지민은 귓등으로 흘려듣는 눈치였다. 대동강변 바람이 광장으로 밀려들었다가 다시 어디론가 길을 떠났다. 강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린 지민은 김 주사에게 물었다.
“저게 원래 저런 모양이었어요? 사진으로 보던 거랑 다른데요?”
지민이 가리킨 곳에는 주체사상탑이 서 있었다. 첨탑은 흡사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손이 동강 낸 듯 위태롭게 서 있었다. 손짓이 서툴렀는지 첨탑은 완전히 잘려 나가지 못하고 꺾여서 상단 부분이 바닥에 닿아 있었다. 강변의 붉은 빛은 이내 추적해 온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화강암으로 바닥을 다진 광장 역시 빛을 잃어 가면서 곳곳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진?”
지민의 중얼거림에 김 주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소.”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지요.”
미강은 권총을 허리춤에 밀어 넣고는 김 주사의 팔을 붙잡았다.
“차라리 광장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지민은 흔들거리는 조선력사박물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셋은 몸을 낮추고 지축의 흔들림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흡사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난파선의 선원들처럼 파도에 몸을 맡긴 그들은 잠시 후 광장의 한쪽을 빠르게 달리는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역시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어!”
지민은 미강이 말리기도 전에 달려 나갔다. 출렁거리는 광장 바닥을 위태롭게 밟으며 달리는 지민의 눈에 그림자 숫자는 가까이 갈수록 늘어났다. 멀리서 볼 때는 쥐떼처럼 보였지만 형체를 알아볼 만한 거리에 이르자 지민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얘들아, 잠깐만!”
지민의 부름에도 아이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광장을 벗어나 다리가 보이는 강변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뒤쫓아 오는 지민이 길을 잃지 않게 안내하듯이 아이들은 노래를 불렀다. 지민은 노랫소리의 끝자락을 힘겹게 잡으며 달렸다.
지민의 추적은 옥류교를 지나 능라도가 보이는 거리까지 이어졌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상 현실에서조차 달릴 때 숨이 차오르는 쓸데없는 디테일 때문에 에이도스를 향해 욕설을 퍼부을 뿐이었다. 바닥은 파도처럼 출렁였지만 아이들은 능숙한 서퍼처럼 그것을 타고 넘으며 길 왼쪽에 늘어선 건물을 기어올랐다. 말 그대로 기어 올라갔다.
“에이도스, 저건 죽어도 못 해!”
디딜 돌출부도 없는 유리벽을 손과 발로만 빠르게 기어 올라간 아이들은 이내 창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지민은 건물 출입구를 찾은 다음에야 건물 이름을 알 수 있었다.
‘평양아동백화점’.
건물 안에 들어선 지민은 어둠 속에서 눈이 적응하기를 기다리며 잠시 서 있었다. 퀴퀴한 먼지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함께 밀려왔다. 습관적으로 코와 입을 손으로 막았다. 하지만 에이도스가 그녀의 신경에 직접 보내고 있는 신호임을 새삼 깨닫고 나니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에 손을 내렸다. 그럼에도 숨 쉬는 것은 여전히 거북했다. 지민은 머리로 알고 있는 것보다 신경의 본능이 먼저 작동해 다시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건물 내부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지민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중앙 계단을 통해 위층에서 들리는 노랫소리로 방향을 가늠한 그는 2층으로 올라섰다. 창문을 통해 박명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는 지민에게 노랫소리가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제야 미강과 김 주사를 광장에 두고 온 것을 후회한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망설였지만 자신이 왜 이곳으로 왔는지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데이터 정합성 위반3…. 에이도스, 그냥 말로 설명해 줘도 되잖아?”
빅프로즌에 입력되는 데이터를 검증하고 상호 모순이 없는지 밝혀내는 것은 그의 업무다. 그것은 단순히 데이터에 누락되거나 결함이 있는 부분을 밝혀내는 것을 떠나 데이터가 상호 모순을 일으키는지 여부도 예측해야 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애초에 북한을 거대한 구멍으로 놔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어. 세계 전체를 공기가 가득한 풍선이라고 본다면, 이곳은 풍선에 뚫린 작은 구멍 같은 곳이야. 처음에는 빠져나가는 공기가 미약해서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면 풍선의 표면은 주름이 지기 시작하고 풍선은….”
“쭈그러들겠죠.”
다시 에이도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지민은 화들짝 놀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건물 천정이 있어야 할 곳은 어둠으로 물든 밤하늘이 되었다. 별들이 뜨고 노래 소리가 피어올랐다.
꽃이면 아예 지지 말래요, 나비면 날아가지 말래요, 가지 말래요.
(계속)
Wood Kid. 2013.
김승길·함기찬, <우리는 꽃송이 우린 꽃나비>. 하나의 데이터, 혹은 데이터베이스가 다른 데이터와 상호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
(워커스 10호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