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희 기자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당수가 지방 선거에서 당 내외 우파의 공세를 돌파하는 한편, 런던 시장 선거에선 최초로 무슬림 후보가 당선되며 8년간의 보수당 지배가 종식됐다.
지난 5일 치러진 영국 지방 선거에선 런던 시장 등 잉글랜드 소속 시장 4명과 스코틀랜드 의회, 웨일스 의회, 북아일랜드 의회 등의 의원들이 선출됐다. 이번 선거는 좌파 지도부를 이끄는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에 대한 시험대로 간주됐다. 코빈은 지난해 9월 기성 정치에 실망한 유권자들, 특히 청년층 지지에 힘입어 당 대표로 선출됐다. 보수 언론과 우파는 코빈의 좌파적 견해를 문제 삼으며 노동당이 이번 선거에서 대패할 것이라고 예측해 왔다. 결과적으로 노동당은 의석을 약간 잃었으나 주요 지역에서 선전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이번 선거는 보수당 정부에서 6년째 지속된 긴축 정책과 철강 산업 구조조정, 수련의 5만 명이 참여한 파업, 어린이 3만 명의 학업 성취도 평가 거부 선언,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가족의 파나마 페이퍼스 연루 등 경제 위기와 사회적 정의 등과 관련된 다양한 논란 속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가디언>이 2일 지적한 것처럼 이번 선거는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Brexit)’ 국민 투표를 앞두고 치러져 특별한 쟁점이 형성되지 않았다.
한편, 노동당 내 우파는 코빈에 대해 유대인을 배척한다는 반유대주의 공세를 퍼부으며 긴축 반대 전선을 흐려 놓았다. 또 노동당이 집권한 지방 정부의 긴축 정책 때문에 해당 지역에서 코빈의 긴축 반대 메시지가 힘을 얻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노동당 풀뿌리 지지 그룹인 모멘텀(Momentum) 등 코빈 지지층의 노력은 코빈의 좌파 정치에 힘을 실으며 버팀목이 됐다. 모멘텀은 코빈이 당수로 선출된 지 몇 주 만에 조직된 풀뿌리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는 코빈과 함께 민주주의와 복지·일자리 확대, 시리아 공습 반대, 기후 변화 등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대중 운동”을 벌여 왔다. 초기 6만 명으로 시작해 영국 전역에서 100개 이상의 조직이 결성됐다. 다른 정치 단체와 공식 관계는 없으나 다양한 정치 단체 좌파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좌파 지도 체제 방어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의 전체 의석 수는 소폭 감소했다. 그러나 애초 예견된 대패는 아니라는 점에서 코빈 중심의 지도 체제 방어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우선 노동당은 사디크 칸 런던 시장을 비롯해 잉글랜드 4개 주요 도시 시장 선거를 석권했다. 런던 시장 선거는 최악의 인종주의 선거라고 불렸지만, 노동자 계층 출신의 칸 후보는 평등한 런던을 강조하며 보수당의 잭 골드스미스와 대립 구도를 만들어 성공할 수 있었다. 또 칸을 이슬람 근본주의자로 악마화한 골드스미스의 전략은 오히려 역풍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보수당 의원들까지 선거 직전 칸 지지 입장을 발표할 만큼 보수당 후보에게 이 전술은 패착이 됐다.
노동당은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선 크게 패했지만, 이는 지역 노동당의 책임이 크다. 집권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긴축 정책을 지역 노동당도 지지했다. 결국 SNP나 노동당 모두 노동자 밀집지에서 득표율이 내려갔다. 이들은 영국 중앙 정부의 사회 복지비 삭감에 발맞춰 지역 차원의 긴축을 계속했다. 반면 스코틀랜드 녹색당은 부유세 도입 등을 공약하며 4석이 늘어난 6석을 확보했다. 유럽연합 탈퇴를 선언한 지역 보수당은 지지율이 10%포인트 이상 올라가며 제2당으로 부상했다.
노동당은 잉글랜드 의회 선거에선 의석을 잃었으나 예상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노동당은 잉글랜드 의회 선거에서 11석이 준 데 비해 보수당은 49석이나 잃었다. 대신 자유당과 영국독립당이 각각 30석, 24석 늘었다. 웨일스 의회 선거에서 노동당은 과반인 30석에서 1석을 잃어 단독 집권에 실패했다. 반면 의석이 없었던 극우 영국독립당(UKIP)이 7석을 얻으며 크게 부상했다. 노동당은 이 지역에서 지난 10년간 긴축을 실시해 왔다.
선거가 끝나자 노동당 우파는 지역적 승리에 대해 코빈과 관계없다거나 덜 좌파적이었기 때문에 크게 잃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한편, 노동당에 비판적인 좌파 동맹 ‘노동조합과사회주의연맹(TUSC)’은 이번 선거에서 의석을 얻진 못했으나 일부 지역에서 선전하며 주목을 끌었다. TUSC 후보로 리버풀 시장 선거에 나선 로저 배니스터는 득표율 5.1%로 4위를 했다. 이는 보수당 후보 보다 약 1.5%포인트 높은 득표율이다. TUSC는 지난 2010년 영국 총선을 앞두고 철도해운운수노조연맹(RMT), 사회당(SP)과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주도해 결성된 선거 연합이다.
서구의 ‘종북주의’ 같은 반유대주의 공세
제레미 코빈은 지방 선거를 앞두고 무엇보다 시온주의 단체와 당내 우파, 보수당과 언론이 연합한 반유대주의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논란은 노동당 내 좌파 나츠 샤 의원이 2014년 페이스북에 게재한 이미지에 대해 우파 블로거가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샤 의원은 노동당 의원으로 선출되기 전이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무차별 폭격했던 2014년 7월, 미국이 후원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정책을 비판하는 이미지를 공유했다. 이 이미지는 이스라엘을 미국의 일부로 상정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법은 이스라엘을 미국으로 이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정책을 히틀러에 비교하기도 했다. 우파 블로거가 이를 문제 삼자 영국 내 시온주의 그룹과 보수당이 합세해 노동당에 반유대주의 경향이 있다고 공격했고 당내 우파는 코빈을 공격했다. 사디크 칸 런던 시장 후보도 코빈을 비판했다. 샤 의원이 노동당에 제소돼 4월 27일 임시 제명되면서 당내 논란은 더 확산했고, 런던 시장을 지낸 켄 리빙스턴 의원을 포함해 시 의원 3명이 추가로 임시 제명됐다. 리빙스턴은 샤의 게시물에 대해 “완전히 과장됐고 조야하다”고 말하면서도 반유대주의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의 편에 섰다. 리빙스턴은 또 “이스라엘 로비스트들이 이스라엘 정책을 비난하면 반유대주의로 몰아붙이고 있다”며 우파가 시온주의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재갈을 물리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아돌프 히틀러는 6백만 명을 살해하기 전 시온주의를 지지했다”고도 했다. 리빙스턴은 제명된 뒤 “히틀러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유감이지만 진실을 말한 것에 대해선 사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노동당 내 반유대주의 논리는 세계적으로도 이슈가 됐다. 식민주의 반대 포털 일렉트로닉 인티파다(EI)는 4월 28일 한 기고를 통해 노동당 우파가 좌파와 인종주의 반대 활동가들을 상대로 의도적인 반유대주의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빈도 리빙스턴처럼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연대에 적극적이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수출 중단을 지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시온주의 그룹은 코빈을 더욱 문제시하고 있다. 반유대주의 논란은 선거 뒤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보수 언론과 보수당 외 노동당 내 우파들은 좌파의 입을 막으려고 이 기회를 활용하고 있다. 이안 맥니콜 노동당 사무총장은 반유대주의 문제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모든 의원의 제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브렉시트, 노동당은 반대 vs 소수 좌파는 지지
지방 선거가 마무리되면서 영국 정치권은 오는 6월 23일 시행되는 브렉시트 국민 투표 토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반대 측에서,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이 찬성 측에서 찬반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영국 보수당 의원들은 절반 가까이, 보수당 당원 다수도 브렉시트에 찬성한다. 코빈을 비롯해 노동당과 주요 노총은 반대 입장이다. 이들은 영국 신자유주의는 EU가 아니라 보수당에 책임이 있다며 EU 개혁이 필요하지만 영국 내부에서 싸워야 한다고 본다. 코빈은 1975년 당시 다수의 노동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EU의 모태였던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반대했고, 그 후로도 EU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 4월 중순 브렉시트 찬반 운동이 시작되자 처음으로 “EU가 투자, 일자리, 노동자와 환경 보호에 기여한다. 나는 여전히 (영국이 EU의) 구성원으로 남을 필요가 있다는 걸 확신한다. 유럽의 개혁 및 진보적 변화를 위한 강력한 사회주의적 근거가 있듯, EU에 남는 것에도 강력한 사회주의적 근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는 반대로 TUSC를 중심으로 소수 좌파는 EU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그리스의 교훈처럼 EU가 ‘사회적 유럽’이라는 외피를 쓴 신자유주의 기구라며 탈퇴가 노동자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호소했다. 이른바 ‘좌파적 탈퇴’를 주장한다. 또 EU 탈퇴는 보수당 캐머런 총리가 이끄는 정부에도 타격이 될 것이라고 본다.
여론 조사 업체 유고브(YouGov)가 지난 7~8일 벌인 조사 결과를 보도한 일간 <더타임스>에 따르면, 브렉시트 반대가 42%로 찬성(40%)보다 2%포인트 높았다.
(워커스10호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