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 운동은 아직도 논쟁 중
새마을 운동은 현재형이다. 새마을을 한자로 하면 신촌(新村), 영어로 하면 뉴 빌리지(new village)다. 이것의 도시 버전이 바로 뉴타운(new town).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들어서자마자 서울을 필두로 전국에 뉴타운 사업 광풍이 불며 곳곳마다 아파트 건설에 몰두했다. 뉴타운의 힘으로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 성공 신화를 다시 쓰겠다며 나섰던 서울시장 출신 이명박 후보는 2007년 대선에서 더블 스코어로 정동영 후보에 승리한다.
2016년 5월 제66차 유엔 비정부 기구(NGO) 경주 콘퍼런스에서는 새마을 운동이 논란의 한가운데에 섰다. 주최 측이 당초 공개한 콘퍼런스 선언문 초안엔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에 수십 년간의 국가 성장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으며,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강력히 기여했다. 새마을 운동을 빈곤 퇴치와 개발의 모델로 제안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국내 인권 사회 단체는 “독재 정권 유지와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논쟁적 사안인데도 유엔의 문서에 이처럼 편향된 평가를 반영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새마을 운동은 아직 논쟁 중이다. 모양과 색깔을 바꿔 등장하는 새마을 운동은 무엇이기에 45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 것인가? 새마을 운동의 성공 신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시멘트의 힘, 새마을 운동의 힘
새마을 운동은 농촌 환경 개선, 농가 소득 증진, 정신 개조가 목표다. 정부 예산이 들어가고,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백만 명이 강제 동원되어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앴으니, 농촌 환경이 개선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농가 소득 증진과 정신 개조에 대해서 여전히 논쟁 중인 것에 비하면 그나마 환경 개선에는 큰 이견이 없다. 그만큼 많은 돈과 사람들이 동원됐기 때문이다.
새마을 운동의 첫 삽은 농로 확장 사업, 즉 마을 길 넓히기다. 1970년 박정희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제안하는데, 이 사업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1970년 여름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 의원(쌍용시멘트 대표)은 박 대통령에게 시멘트의 과잉 재고로 인한 시멘트 업계의 자금난을 호소하고 특별 융자를 요청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시멘트를 매입해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투입하기로 하고, 그해 10월 전국의 농어촌에 350부대에서 600부대씩 무료로 배급했다. 이렇게 남아도는 시멘트를 국가가 매입해서 농촌에 무료로 나눠 주면서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처음에 이 시멘트를 어디다 써야 할지 몰랐던 사람들은 마을 회관을 만들거나 주로 마을 길을 확장하고 포장하는 데 사용했다. 이런 농로 개설 사업은 정부 예산과 주민 부담이 일대일로 이루어졌다.
한편, 초가집을 없앤 지붕 개량 사업은 1972년부터 시작했다. 지붕 개량 사업은 일종의 전시 행정 성격이 강했다. 주민 의사나 형편을 고려한 사업이라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이고 실적을 쌓기 위해 공무원들이 강제로 진행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공무원들이 농가를 돌아다니면서 초가지붕을 강제로 벗기고 다니는 바람에 농민들은 억지로 지붕 개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속도로 주변 등 사람들 눈에 잘 띄는 마을이나 농가들이 그 첫 표적”이 되었다(박진도·한도현, 〈새마을 운동과 유신 체제: 박정희 정권의 농촌 새마을 운동을 중심으로〉, 《역사 비평》 제47권, 1999).
지붕 개량에 따른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볏짚을 갈 필요가 없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했는데, 초가집보다 열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얇은 슬레이트 지붕 탓에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던 것이다. 게다가 20년쯤 지난 뒤에 슬레이트에 함유된 석면이 1급 발암 물질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슬레이트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처럼 주택 개량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하던 농민을 대상으로 박정희 정부는 반강제적인 주택 개량 사업을 추진했다. 초기에 많은 불만이 있었지만, 초가집이 슬레이트집으로 바뀌는 과시 효과와 매스컴의 홍보 때문에 ‘지어 놓고 나니 보기 좋았다’는 의견이 많아지게 되었다(이기우 외, 〈새마을 운동 사례 연구〉, 중앙공무원교육원, 2013).
하지만 이 같은 변화가 단순한 전시 효과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번듯하게 된 것에 대한 강력한 향수를 갖고 있고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경험은 바로 시멘트에 있다. 김성곤의 쌍용시멘트 재고 처리 목적이 컸지만 정부가 각 가정마다 4부대씩 무상으로 시멘트를 제공했다. 선거 때 후보자들에게 받는 금품을 제외하고 정치인이나 국가로부터 무엇 하나 받아 본 적이 없었던 농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상황이었다. 빼앗기만 했던 국가로부터 직접 무상으로 지원받은 최초의 집단적 경험이었다.
새마을 운동과 관계없는 농가 소득
1960년대 후반 쌀 생산이 불안정해지면서 식량 자급이 경제 개발 전반에 중요한 문제로 부각됐다. 1970년을 전후해 수입 양곡 비용은 매년 10억 달러를 넘나들었다. 쌀 사 먹느라 귀한 달러를 다 써 버릴 판이었다. 결국 식량 자급을 위해 식량 증산에 나서게 됐고 이를 위해 높은 쌀 수매 가격(고미가)을 유지하게 됐다. 1968년 애초 7%로 책정되었던 추곡 수매가 인상률이 17%로 높아졌고 이듬해에는 22.26%까지 올라감으로써 본격적인 고미가 정책이 실시된다. 그러나 수출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저곡가 유지가 불가피했기에 이런 고미가 정책은 이중 곡가제가 됐다. 즉, 높은 가격에 사서 낮은 가격에 파는 이중 곡가제가 유지됐다. 무엇보다 1970년대 식량 자급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신품종(통일벼) 보급에 기인한다. 통일벼로 상징되는 다수확 신품종 보급이 결합되었다. 미질은 형편없었지만 소출량이 많았던 통일벼를 정부가 고가로 매입함으로써 농가 경제는 상당히 개선될 수 있었다. 이에 1970년대 중반 일시적으로 농가 소득이 도시 가구 소득을 추월하는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벼로 상징되는 녹색 혁명은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드는 농법이었다. 종자를 구입해야 했으며 보온 못자리용 비닐도 사야 되고 병충해에 약해 농약도 많이 쳐야 했다. 게다가 비료도 더 많이 줘야 했다. 1961년 30만 톤의 비료 생산이 1977년 100만 톤까지 늘었다. 농약 사용량도 다섯 배 증가했는데, 1961년에서 1978년 사이 5,557톤에서 2만 7,320톤으로 증가한다.
비료도 더 많이, 농약도 더 많이. 이제 돈이 없으면 농사짓는 것이 불가능했다. 농사를 지으려면 종자와 함께 종잣돈도 필요하게 됐다. 농촌의 돈 문제는 농협을 통했다. 농협은 비료와 농약 공급을 담당했고 동시에 농민들에게 필요한 자금을 대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농가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농협의 부채 비중도 커졌다. 1970년대 초반 농가 부채 중 농협의 비중은 30% 남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0년도에는 48.7%로 절반에 육박하더니 1990년에는 80%를 넘어섰다. 새마을 운동이 농가 소득을 증대시켰다는 증거는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새마을 운동이 벌어질 시기에 국가 차원의 식량 자급을 위한 경제 계획이 강력히 진행되었고, 통일벼 도입으로 생산량도 증대하고 이중 곡가제로 농가 소득을 지지해 준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이 우연히(!) 새마을 운동 시기와 일치하는 것뿐이다. 식량 자급 계획 이외에 농가 소득 증대와 굶주림을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담수 어종을 다양화하기 시작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황소개구리, 베스, 블루길 같은 어종을 도입했지만 식용으로도 배척되고 토종 어류가 싹쓸이 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이 시기 농가 소득은 허울뿐이었다. 이중 곡가제는 국가의 지속적 재정 부담을 불러왔다. 고가로 수매해 저가로 방출하는 데 따른 적자, 즉 ‘양특 적자(양곡 관리 특별 회계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1980년도에는 누적 적자가 1조 원을 넘었다. 1970년대 말 경제 상황 악화로 인해 이중 곡가제를 유지하지 못할 상황이 되자 농가의 여건은 더 나빠졌다. 또한 이러한 쌀 생산 증대에 필요한 자금은 농협이나 정부 대출로 농가가 부채를 짊어지는 방식으로 충당됐다. 결국 1970~1980년 사이 농가 호당 소득은 10.5배 증가했지만 농가 부채는 21배나 증가했다.
겉보기에 농가 소득도 늘어나고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어졌는데 농촌을 등진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의 성수기는 이촌 향도의 성수기이기도 했다. 서울 인구는 1970년대 10년간 무려 300만 명이 증가했다. 새마을 운동 기간 내내 수많은 농민이 도시로 떠났다. 1970년 농가 인구는 1422만 2,000명으로 전체 인구(3088만 8,000명) 중 46.7%를 차지했으나, 1980년에는 전체 인구(3743만 8,000명) 중 28.9%인 1082만 7,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농가 소득이 부채에 기반해 있다는 점과 여전히 공업화를 위한 내수 진작 수단으로써 농가 소득 증진을 사고한 데 따른 결과다.
정신 개조와 유신 체제
새마을 운동의 마지막 목표는 바로 ‘하면 된다’고 하는 정신 개조에 있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의 탄생과 유신 체제 성립은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새마을 운동이 유신 체제를 홍보하고 안정화시키기 위한 농촌 조직화 운동이라는 비판이 항상 따라다닌다. 새마을 운동의 교육 교재에도 유신 이념과 국가 원수에 대한 예절 등이 수록되어 있다. 유신 체제와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는 새마을 운동의 기본 교육 내용이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가 비상 계엄을 선포하고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대통령에 집중시키며, 영구 집권을 가능토록 한 유신 체제가 수립됐다. 국민의 반발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이를 억압하기 위해 각종 법·제도, 교육 등을 매개로 일상생활을 통해서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 법·제도인 〈국가보안법〉과 긴급 조치 등은 대중을 직접적으로 탄압하고 통제했다. 또한 유신을 받아들이며 복종시키기 위한 정신 개조 작업이 전국적인 수준에서 전개됐다. 도시민을 대상으로 장발 및 미니스커트 단속, 대중가요 금지곡 지정 등 사회적 장치로 대중의 일상을 통제했다. 학교에서의 국기에 대한 맹세, 국민 교육 헌장 암송, 웅변 대회, 반상회, 애향단 활동, 애국 조회 등이 벌어졌다. 농촌에서는 바로 새마을 운동이 진행되었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 = 박정희의 추진력 = 위대한 지도자
이처럼 새마을 운동에서 환경 개선 사업은 결국 돈이 문제이고, 농가 소득 증진과 새마을 운동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다 보니 남는 것이 바로 ‘하면 된다’고 하는 새마을 정신이다. 이제 와서 유신 체제의 정당성을 홍보할 필요는 없으니 더욱더 ‘하면 된다’를 중심으로 새마을 운동을 홍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가’ 하면 된다는 것인가? 2015년 11월 24일 열린 ‘2015 지구촌 새마을 지도자 대회’에서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은 발제를 하며 “(새마을 운동 성공의) 첫 번째 요인은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전략적 지원’이다. 정부는 획일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원보다는 성과 있는 마을에 보다 많은 지원을 함으로써 경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마을 주민들이 더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단합하기 시작하면서 농촌 근대화의 큰 물결을 일으키게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새마을 운동의 상당 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머릿속에 있었다. 새마을 운동 노래까지 직접 작사·작곡하실 정도로. 여러 메모에서도 그런 열정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누가 주도적으로 새마을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묻기도 했다(“‘하면 된다’, 박정희 찬양 대회로 끝난 지구촌 새마을 지도자 대회”, 〈뉴스민〉, 2015.11.30).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새마을 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는데, 정부의 의지는 곧 박정희의 의지라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 = 박정희의 강력한 추진 = 위대한 지도자”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하면 된다’고 하는 성공 신화가 곧 박정희 신화인 이유이기도 하다.
‘하면 된다’에서 ‘Can Do’로
새마을 운동은 크게 3개의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절 관 주도의 새마을 운동이다. 둘째, 전두환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새마을 운동은 민간 주도로 재편된다. 이때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이 바로 전두환의 친형 전경환이다. 새마을 운동은 민간화되었지만 여전히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았고 하는 일도 없이 돈을 많이 받으니 온갖 비리의 온상이 됐다. 전두환 정권 이후 전경환은 새마을 비리로 구속되고 새마을 운동은 사실상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새마을 운동이 다시 소환되기 시작했다. 경상북도의 각 군에서는 자기가 이 운동의 시초라는 논쟁도 벌어지고, 유엔에 2013년 기록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유엔 차원에서 제3세계 빈곤 타파의 모범 사례로 새마을 운동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반기문도 거들고 나섰다. 이른바 새마을 운동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2016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은 우간다를 방문해 새마을 운동을 한껏 자랑하고 왔다. 우간다는 몽골, 콩고, 네팔에 이어 전 세계 네 번째로 현지에 새마을 중앙회를 설립했다. 현재까지 우간다인 150여 명이 한국을 방문, 새마을 연수를 받았고 새마을 연수 수료생들이 중심이 돼 전국 15개 군 50개 마을에서 새마을 운동을 실시 중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한국 정부의 엄청난 지원이 함께 따라갔다.
새마을 운동의 세계화에서도 똑같이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은 새마을 정신인 ‘하면 된다’이다.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도 박근혜 대통령 방문 시에 “새마을 정신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행했다는 데 한국의 위대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했더니 됐다는 것이다. 다만 새마을 운동이 세계화하면서 바뀐 것은 오직 하나, ‘하면 된다’에서 ‘Can Do’가 된 것이다.
홍석만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