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의료가 위협받기 시작한 건 오래됐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에 그 책임을 떠넘기지만 사실 김대중 정부 말기에 나온
〈경제자유구역법(경제자유구역의지정및운영에관한법률)〉이 의료를 산업화하겠다는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의료 선진화 정책도 그 궤를 이어받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의료 민영화나 의료 영리화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체는 다르지 않다. 공공 의료를 포기하고 국민 건강을 민간 자본에 맡기는 것. 반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의료 영리화를 주도하고 있는 이가 있다. 삼성이다. 이 기획에선 삼성이 의료 영리화의 시대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그 대비를 위해 어떤 작업을 해 왔는지, 삼성의 의료 영리화 로드맵은 얼마나 완성됐는지 살펴본다.
① 이재용의 삼성, 이번에는 HT 산업이다 (8호)
② 삼성서울병원은 왜 성균관대 부속 병원이 아닌가 (8호)
③ 분위기 조성에서 노골적 추진까지,
의료 영리화 연대기 (9호)
④의료 영리화의 미래? 미국과 칠레를 보라
미국에서 취업할 경우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어떤 보험을 선택하겠느냐는 것이다. 구직자들이 회사를 선택하기 전에 꼼꼼히 따지는 것 역시 회사의 의료 보험 혜택이다. 이처럼 미국 회사에서 의료 보험은 가장 중요한 복지 혜택이다. 보장의 정도가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료 보험 제도는 크게 세 갈래다.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건강 관리 기관)는 보험사가 지정한 의사 중 자신의 ‘지정 의사(Primary doctor, 주치의)’를 정한다. 일단 그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보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전문의(Specialist)를 만나려면 주치의를 통해 HMO 네트워크 안의 의사만 찾아갈 수 있다. 주치의의 진단서로 주치의가 소개해 준 의사와 병원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비용도 주치의와 전문의 모두에 지급해야 한다.
PPO(Preferred Provider Organization, 진료 계약 기관)는 굳이 주치의를 선택할 필요가 없으며, 주치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문의에게 가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오바마가 공약으로 내세운 이른바 ‘오바마 케어’가 있다. 오바마 케어가 처음 나왔을 당시 의료 제도의 개혁 목표는 명료했다. 건강 보험이 없는 사람을 새로 가입시키고 가입자들을 보험사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의료비 지출 증가율을 낮추는 것이다. 기업과 개인의 건강 보험 ‘의무 가입’과 소득에 따라 적정 수준의 보험료 부담만 지우는 ‘보조금 지급’도 있다. 당시 미국 인구의 약 14%에 달하는 4400만 명은 건강 보험이 없었다. 오바마 케어는 의무 가입과 보조금을 통해 건강 보험 미가입자 일부를 민영 보험과 기존 공공 보험에 가입시킨다.
직장에 들어가 의료 보험 지원을 받는 경우 미국 의료 보험 체계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오바마 케어가 추진될 당시 반대하는 이들이 상당했던 것 역시 회사 내에서 이미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특별히 아픈 데가 없어도 1년에 한두 번씩은 주치의를 만나서 진찰을 받고 충분한 상담을 받는다. 지역의 차이는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과 의사들이 있고 그 서비스를 본인이 받게 된다는 생각에 만족도가 높은 것이다. 미국 의료 보험 제도의 문제점은 직장을 통해 ‘의료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할 경우 드러난다. 개인이 건강 보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은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 줄 의료 보험도 잃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건강 보험이 없어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기사도 종종 나온다. 아이를 낳는 게 얼마나 비싸겠냐 하지만 뉴욕에 사는 사람이 병원에서 자연 출산을 할 경우 병원 지급 비용이 3만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한화로 따지면 3천만 원이 훨씬 넘는 액수다. 지금은 오바마 케어를 통해 기업과 개인 모두 ‘의무 가입’이 필수이지만, 이마저도 오바마 케어를 받아 주는 병원이 많지 않다는 문제점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미국 의료 보험 제도는 민간 보험을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민간 보험은 병원의 영리화와 병원비를 올리는 데 이바지한다.
왜 미국을 봐야 하는가
미국의 민간 보험과 영리 병원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상황과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의료 영리화를 추진하며 정부는 건강 보험의 비효율성과 재정 적자, 병의원의 경영난을 강조하고 시장의 합리성으로 의료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동시에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의료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다. 지역마다 의료 허브, 의료 관광 도시를 강조하고 영리 병원 도입을 요구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한국에서 의료를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주장하는 것은 한심한 생각”이라며 “정부는 미국이 우리의 미래인 것처럼 끊임없이 병원을 ‘영리화’시켜서 민영 보험이 더 많이 차지하게 하려 하지만 미국 의료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고 서민의 피해가 크다”라고 강조한다.
미국인들의 의료비 지출 규모는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2014년 기준 미국 전체 GDP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17.5%다. OECD 평균 8.9%를 훨씬 웃도는 수치다. 의료 영리화 즉 영리 병원과 민간 의료 보험 중심 체계가 높은 의료비 부담의 한 원인이다. 의료 비용은 많이 들지만 극심한 의료 불평등을 겪고 있으며, 국민의 건강 수준은 세계 30위 정도에 그친다.
한국 정부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대로 영리 병원이 도입되면, 의료의 기반이 흔들리고 건강 보험 당연 지정제(어떤 병원에서든 국민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와 전 국민 의료 보험 의무 가입제의 토대가 흔들린다. 미국의 사례는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겪게 될 변화의 많은 부분을 암시한다. 물론 피해는 서민에게 몰려 있다.
그런데도 영리 병원에 대한 정부의 계획은 차근차근 실행되고 있다. 2012년 이명박 정부는 <경제자유구역내 외국의료기관의개설허가절차를담은시행규칙>을 제정·공포하며 영리 병원을 우회적으로 허가했다. 영리 병원 도입을 위한 제도적 절차를 완성한 이 변화가 가져올 결과는 이미 많이 알려진 미국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2014년 내부 고발자들의 폭로로 알려진 ‘헬스 매니지먼트 어소시에이츠(HMA)’의 경우다. 당시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영리 병원인 HMA는 의사들을 평가하는 잣대로 방문 환자의 입원율을 적용했다. 입원을 많이 시킬수록 병원 수익이 늘어나므로 이것을 의사 평가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환자들을 가급적 많이 입원시키라는 병원 내부 목표를 달성하는 의사에겐 녹색, 목표치에 근접한 의사에겐 노란색, 목표 달성에 실패한 의사에겐 빨간색을 부여하며 의사들을 압박했다. 의료의 공공성이나 병원이 지닌 최소한의 공공성마저 포기한 사례다.
여러 사례와 수치에도 정부는 의료 영리화의 위험성을 웃어넘긴다. 2014년 박근혜 정부는 <유망 서비스업 투자 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투자 개방형 병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투자 개방형 의료 기관은 대규모 자본 투자를 받아 병원을 설립·운영하는 이른바 ‘영리 병원’이다. 정부 발표 후 한 방송에 출연한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영리 병원이 생겨도 99.9%는 기존 건보 체계를 그대로 적용받는다. 의료 민영화 우려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말했다. 미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의료 영리화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이 담긴 답이다.
의료 영리화의 교과서 ‘칠레’
의료 영리화의 ‘선진국’으로 꼽히는 칠레 역시 주목할 만하다. 칠레의 의료 보험은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겪은 제도 중 하나다. 이는 칠레가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정치 변동의 맥락과 흐름을 같이한다. 칠레는 근현대사를 통해 자유주의부터 사회주의 그리고 군부 독재까지 다양한 정치적 실험들을 겪었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후 교과서적으로 적용한 나라로 분류되기도 한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칠레의 의사 파업과 보건 의료 개혁의 좌절>에서, 피노체트 정권의 장기간에 걸친 군사 독재와 민주주의 체제 복귀 이후에도 그로 인한 대립이 지속하고 있는 칠레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 많이 닮았다고 설명했다. 1979년 피노체트 정권은 민영 보험을 도입하기 전 기존 공영 보험 제도를 통합해 국가의료기금(FONASA)을 설립한다. 그리고 1981년 헌법을 개정해 민영 보험을 도입하고, 공영 보험과 민영 보험이 서로 경쟁하는 의료 보험 체계를 수립했다. 동시에 공공 의료비 지출을 대폭 감축했는데, 통계에 따르면 1973년부터 1987년 사이 칠레의 공공 의료비 지출은 40%나 감소했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칠레의 민주 정부는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부 지원을 강화했지만 공영 보험과 민영 보험의 경쟁 구도는 그대로 유지됐다.
칠레는 공영 보험(FONASA)과 사기업이 운영하는 민영 보험(ISAPRE)이 공존한다. 칠레 국민들은 2011년 기준 공영 보험 포나사에 76.2%, 민영 보험 이사프레에 16.9% 가입돼 있다. 대부분의 칠레 국민이 이 두 가지 의료 보험 중 하나의 혜택을 받고 있지만, 두 의료 보험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인구도 존재한다. 이들은 군인 의료 시스템과 같은 다른 공공 시스템에 속해 있거나 의료 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인구다. 피고용자는 임금의 7%를 보험료로 내고 의무적으로 포나사에 가입해 기본적으로 공공 의료 기관을 통해 서비스를 받는다. 본인이 원하면 이사프레에 가입해 민간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이사프레 가입자는 나이와 성별, 보험이 적용되는 병원 및 범위에 따라 다양한 보험료를 내야 하는데 임금의 7%가 넘는 차액은 가입자가 부담한다.
의료 보험 제도와 마찬가지로 칠레의 의료 서비스 제공 시스템 또한 이원화돼 있다. 공공 의료 서비스 시스템은 전체 27개 주에 존재하는 28개의 지역 의료 서비스로 구성된다. 이들 기관은 2차, 3차 의료 서비스를 담당한다. 1차 의료를 담당하는 보건소는 시 정부에서 관리한다.
공영 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사람과 의료 보험이 없는 사람, 극빈층은 주로 공공 의료 서비스 시스템을 이용한다. 그 결과 공공 의료 서비스 시스템에 의료 수요가 몰린다. 민영 보험 가입자들은 민간 의료 기관을 통해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 필요에 따라서 공영 보험과 협약을 맺은 공공 서비스 기관을 사용할 수 있다.
포장은 화려하지만 속은 불평등
칠레 의료 개혁의 결과는 뚜렷하다. 겉으로는 기대 수명과 예방 접종률, 의료 지수와 의료 서비스의 수준이 높아졌다. 하지만 의료비는 증가했고 의료 불평등은 심각해졌다. 2011년 기준으로 칠레 사람들은 가계 지출의 4.6%를 의료비에 사용한다. 이는 OECD 회원국의 평균 2.9%의 1.5배를 넘는 수준이며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의료 불평등도 확인할 수 있다. 칠레의 영아 사망률(1,000명당)은 2011년 기준으로 7.4이다. 같은 시기 OECD 회원국 평균 4.1보다는 높지만, 비회원국들이 평균 10을 넘고 미국이 6.1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다. 문제는 교육 수준이 낮은 이들의 영아 사망률이다. 초등 교육을 받은 여성의 영아가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할 확률은 중등 교육 이상을 받은 여성의 영아보다 14.3배나 높다. 성별 간의 불평등도 있다. 칠레의 의료 불평등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두드러진다. 치아가 없는 여성이 전체 여성 인구의 7.2%인 데 반해 남성은 3.2%에 불과하다. 고혈압 환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나 많다. 관절염 환자의 경우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의 세 배에 이른다. 남녀 간의 경제적 불평등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의료 보험 민영화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박윤주, 《이베로아메리카》 제13권 1호, 2011년 6월) 보고서에 따르면, 칠레 의료 보험의 민영화는 칠레 여성의 몸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공공 의료 보험의 보험료는 가입자의 소득 수준에 따라서 결정되지만, 민간 의료 보험의 보험료는 민간 의료 보험이 정한 그룹별 보험료율에 의해 결정된다. 이들은 가입자들을 성별, 나이, 가족 수 등의 기준으로 분류하여 보험료를 차등적으로 적용한다. 각 가입자 개인의 ‘위험 요인’을 고려해 보험료를 추징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민간 보험 회사들은 언제나 ‘경제 상황’이나 환자의 ‘위험 요인’에 따라 보험료를 변경하거나 보험 가입을 거부할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위험 요인’을 계산하며 무엇이 ‘위험 요인’으로 규정되느냐는 것이다.
민간 의료 보험은 가임 연령대의 여성을 모두 ‘고위험군’으로 분류했다. 이 때문에 2004년까지 민간 의료 보험은 가임 연령의 여성들에게 같은 연령의 남성보다 많게는 여섯 배의 의료 보험료를 징수했다.
보험료가 비싸니 가입을 피할 수밖에 없다. 보고서는 “보험료의 인상으로 인해 여성들이 민간 의료 보험을 기피하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의 확대를 통한 여성 건강의 증진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미국과 칠레는 의료 영리화 사례에서 손꼽히는 국가다. 신자유주의를 고스란히 의료 체계에 도입한 칠레는 의료 불평등을 입증했다. 지역과 계층, 성별에 따라 의료 불평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 준다. 한국이 모범 사례로 꼽는 미국은 영리 병원, 민간 보험의 위험성을 사회적 문제로 품고 있는 나라다. 의료의 공공성에 자본이 자리 잡을 때의 결과다. 이들 사례에서 정부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의료 영리화로 더 좋은 의료 서비스와 의료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할 것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미국과 칠레를 다시 돌아볼 일이다.
(워커스10호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