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raining money!
어느 대중가요의 제목처럼 만약 돈이 비처럼 쏟아진다면? 만화영화 속에서나 상상할 이런 일이 곧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난리다. 그리고 그 첫 주자는 아마도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런 전망은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전임 의장이 지난 7월 11일 일본은행을 깜작 방문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부터 가시화되고 있다.
물론 일본은행은 이런 분석에 대해 논의되지 않았던 대화 주제였다고 밝히면서 섣부른 예측을 경계했다. 워낙 파괴력이 큰 ‘헬리콥터 머니’를 직접적으로 공론화하기엔 부담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분석가들은 참의원 선거 직후 벌어진 벤 버냉키의 일본은행 방문과 아베 총리와의 면담이 잘 짜인 각본이라고 지적한다. 아베 정권은 본격적인 평화헌법 개정 국면을 주도하기 앞서 새로운 아베노믹스 제2탄이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에 ‘헬리콥터 머니’를 새로운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는 버냉키의 목소리가 아베 내각의 경기 부양책에 큰 힘을 실어 줄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런데 새삼 이렇게 미국 연준 전임 의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얼마 전 4월 11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만성적인 수요 부족에도 통화 정책이 말을 듣지 않고, 정치권의 반대로 재정 정책도 쓰기 힘들 때 헬리콥터 머니는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비단 이런 주장은 버냉키만이 아니다. 전 영국 금융감독청장은 “각국 정부는 더 이상 빚을 내 재정 정책을 쓰기 어렵다”며 “국채 발행 대신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하는 헬리콥터 머니가 현재 가장 적절한 수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최대 헤지펀드 창업자인 레이 달리오는 “양적 완화로 중앙은행이 막대한 양의 통화를 금융권에 투입했지만 은행 대출과 기업 투자가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며 “소비를 직접 일으키는 헬리콥터 머니를 결국 중앙은행이 받아들일 것”이라고도 했다.
이젠 그 요란했던 양적 완화마저 구시대적인 유물이 된 느낌이다. 이렇게 통화 정책의 외피를 쓴 재정 정책은 올해 초 마이너스 금리 소동을 겪으면서 이미 세계적으로 확산된 바 있다. 중앙은행 예치금에 붙는 마이너스 금리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은 국채 금리인데, 일본과 유럽에선 단기 국채는 물론이거니와 10년짜리 장기 국채마저도 마이너스 금리로 내려간 상황이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정부가 빚을 낼수록 빚이 줄어드는 셈이다. 그리고 아예 중앙은행이 직접적인 돈을 살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자는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헬리콥터 머니’가 노리는 것은?
혜성처럼 등장한 헬리콥터 머니의 개념이 뭔지 짚어 보자. 현재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중앙은행이 취하고 있는 양적 완화는 금융 시장에서 채권이나 주식을 매입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중앙은행은 매입 대금으로 돈을 찍어 금융 시장에 공급하게 된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었던 미국은 1차 양적 완화를 통해 부도난 파생 금융 상품을 대거 사들여 빈사 상태에 빠졌던 금융 시장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차, 3차 양적 완화를 통해 MBS(주택담보증권)와 장기 국채를 대거 매입하여 시중 실질 금리를 마이너스까지 떨어뜨렸다. 이것이 경기 부양을 자극할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2008년 금융 위기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졌던 부동산 시장을 회복시키는 데 일조했다. 심지어 유럽과 일본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런 양적 완화에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더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직접 공급하는 본원 통화보다 훨씬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시중 은행들로부터 대출을 받아 만들어지는 신용 통화이다. 지금까지 중앙은행의 경기 부양 목표는 바로 이 신용 통화가 안정적으로 계속 늘어나도록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헬리콥터 머니를 강조하고 있는 유명인들의 말처럼 기대했던 효과를 보진 못했다. 주식과 부동산과 같은 자산 시장에만 돈이 몰려들었을 뿐, 대중의 호주머니 속으론 전혀 돈이 돌고 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돈이 줄어드는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라고 난리다.
그래서 중간 다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대중에게 돈을 살포할 수 있는 방법인 ‘헬리콥터 머니’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중앙은행이 바로 인수하고 정부에 돈을 건네는 것이다. 정부는 이 돈을 재정 사업에 투하한다. 중앙은행에 내야 할 정부의 국채 이자는 다시 정부로 되돌아온다. 모든 중앙은행은 자신의 필요한 행정 경비를 제외한 이자 수입을 정부 재정에 충당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국채 만기가 되돌아오면, 다시 국채를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이를 매입한다. 아예 처음부터 만기가 없는 영구채를 발행해 만기를 없애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 볼 것이 있다. 기존의 양적 완화도 중간에 금융 시장을 징검다리로 하고 있지만, 국채 발행을 원활하게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마이너스 국채 금리를 겪고 있는 일본과 유럽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도 역대 가장 낮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이미 재정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헬리콥터 머니는 이와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일까? 단순히 중간 단계를 생략했다는 점만이 다를까? 이에 대해 버냉키는 헬리콥터 머니에 대한 중요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 돈이 ‘공짜 돈’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돈은 미래 세대가 언젠가 갚아야만 하는 빚이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 부채로 조달된 자금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늘에서 뿌려지는 ‘공짜 돈’이라는 것이다.
왜 버냉키는 이 황당한 개념을 헬리콥터 머니의 중요한 요체로 설정했을까? 바로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자극하기 위함이다. 인플레이션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계속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이다. 어느 한 순간만 물가가 오르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계속 오를 것이라 기대해야만 지금과 같은 디플레이션 압력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헬리콥터 머니로 뿌려지는 돈이 장롱 속으로 들어가면 곤란하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돈이 계속 이렇게 뿌려질 테니 저축하지 말고 쓰라고 유도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우리에겐 다소 의아해 보이지만, 디플레이션 압력이 큰 일본에선 남아 있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은 이 거대한 재정 통화 정책의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지인 셈이다. 그리고 전 세계 중앙은행 관료들은 일본에서 벌어질지도 모를 이 실험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재정 통화 정책의 진화
그렇다면 일본은 이 정책을 어디까지 받아들일까? 현재까지 반응은 신중 모드이다. 그런데 일본은 1930년대 대공황 탈출을 위해 이미 이런 정책을 사용한 전례가 있다. 당시 일본은 대공황에서 가장 빨리 탈출한 국가였다. 이것은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수 산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재정을 헬리콥터 머니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을 추진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당시 23년간 일본의 대장상(경제부총리)을 역임하면서, 일본 경제 체제를 디자인한 인물이었는데, 버냉키는 2003년 연준 연설에서 고레키요의 국채 직매입을 “중앙은행 역사상 매우 성공적인 통화 정책”으로 평가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같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헬리콥터 머니도 80여 년 전 일본이 취했던 공황 탈출 전략을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80여 년 동안 달라진 경제 체제는 이것이 동일한 결과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을 낳는다. 그래서 버냉키가 단순하게 국채 직매입에만 머물면 안 되며,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정말 미친 척하고 미친 모습을 보여 줘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앙은행만의 역할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중앙은행과 정부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중앙은행 독립성”과 같은 구시대적인 마인드는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계속 한 발짝씩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실험을 집행하고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변모를 목도하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위기 이후 새로운 우파적 관리 체제의 토대가 될지, 아니면 난장판으로 귀결될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세계가 또 다른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과연 일본이 그 첫 테이프를 끊을 수 있을까? 1936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발호와 2016년 아베의 헌법 개정과 재무장이 이상하게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