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해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과 미강은 원래의 역사에서는 없었을, 홀로 고공 투쟁 중인 여성의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
[인물 소개]
지민: 인공 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 지능체.
하미강: 오메가 섹터의 격리 구역 보안 책임자.
기혜영: 삼용나노텍 노동자, 정리 해고자 복직을 위해 고공 농성 중.
새벽 4시가 되자 잠깐 눈을 붙였던 이들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옥상에 올랐다. 미강의 지휘에 따라 수송기는 건물 옥상에서, 호위기는 다른 지점에서 이륙하는 계획이다. 루프트 바페 클랜이 동원한 네 대의 호위기는 각각 로그 원부터 로그 포까지 호출 부호를 받았고 수송기는 레드 원을 호출 부호로 받았다. 미강과 예거K는 드론 조종 신호의 중계기 역할을 할 AP②를 설치하기 위해 동이 트지 않은 단지 주변 옥상이나 개활지를 골라 돌아다녔다. AP 간 거리가 멀 경우 신호를 잃을 위험이 크기에 중간 지점마다 맥주 캔을 펼쳐 만든 신호 증폭기도 설치했다. 아침이 되면 경찰에 발각될 위험이 크지만 그들이 목표한 비행시간은 어차피 15분 내외였다. 미강은 세심하게 중계기 간격을 조정하고 도주로를 확보하기 위해 두 대의 차량을 빌렸다. 차량에는 드론의 조종 신호를 중계하기 위한 장비가 실렸고, 이를 암호화하기 위한 서버도 각각 다섯 대씩 부착했다. 루프트 바페 클랜은 종종 비인가 시합을 벌이는 경우가 많아 이쪽에 특화된 기술을 갖고 있었다. 장비의 이동과 설치가 쉽도록 라즈베리 파이③나 갈리레오 보드④로 제작한 소형 서버를 주로 이용했다.
지민은 레드 원에 실릴 보급품을 담당했다. 머스탱 샐리의 추락에서 배운 교훈처럼 수송기에 실릴 짐은 최대한 부피와 중량을 줄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혜영이 최소 두 달을 버틸 만한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는 고단백질 비상식량과 태양열 집열판이 달린 충전기를 포함해 구호용 담요, 응급 처치용 약품들, 해열제, 진통제들을 빽빽하게 비닐 팩 안에 담았다. 최종 점검 직전에야 지민은 지원 물품에서 생리대가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호 물품 목록을 작성했던 남자들에게 가벼운 비난의 시선을 날렸다. 구호 물품은 한계 중량으로 설정한 10킬로그램보다 5그램 더 가벼웠다.
호위를 맡을 레드 편대의 드론들을 이동시키기 위해 미강이 차에 짐을 싣는 동안 지민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 옆에 서 있었다. 미강이 말했다.
“우리가 지금 몇 개의 법을 어기고 있는지, 그것 때문에 걱정하는 건가요?”
“항공 관련법, 무선 통신 및 보안에 관련된 법률, 심지어 약사법까지 위반하고 있죠.”
미강은 차 안에 실은 짐을 둘러보고는 손을 털었다.
“우리가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죠? 안 그래요? 진짜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을 텐데.”
지민의 침묵에 미강은 동이 터 오를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저는 늘 단순하게 생각해요. 훈련이나 작전에 나갈 때도. 저곳을 폭파하면 된다. 저자를 죽이면 된다. 그리고 대원들과 함께 무사히 돌아오자. 그리고 지금은….”
미강은 공장이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곳에 몇 달째 비상식량과 칼로리 바만으로 버티고 있는 여자가 있다. 고열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그에게 먹을 것과 약을 가져다주자. 끝.”
미강의 차에 타기로 한 클랜 멤버 2명이 장비를 모두 실었다고 알리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미래에 영향을 미쳐요.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그 결과까지 통제할 수 없죠. 신이 아니니까요. 그건 현실에서도,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신이 아니니까, 인간의 일을 합시다.”
배치가 완료된 뒤 미강이 무전기를 잡았다.
“현재 시각 6시 17분, 정확히 5분 뒤 출격합니다. 출격 이후 이 무선 채널은 폐쇄됩니다. 모두 암호화된 통신망을 사용하시고, 접속 아이디 확인 바랍니다. 최종 도착지 코드는 라푼젤, 레드 원과 로그 편대는 웨이 포인트(Way Point) 알파에서 합류한 뒤 그대로 편대 비행, 웨이 포인트 탱고까지 이동합니다. 웨이 포인트 알파까지 ETA⑤는 6시 26분. 모든 파일럿 수신 보고.”
곧이어 레드 원부터 로그 포까지 파일럿들이 수신했다는 짤막한 보고를 보내왔다. 레드 원을 비롯해 호위기들은 각각 이륙 지점을 분산하기로 했지만 웨이 포인트로 설정된 재개발 예정 지구 상공에서 편대 대형을 이루기로 했다. 수송기인 레드 원이 이륙할 건물 옥상에서 지민은 노땅, 예거K와 함께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박명의 연약한 빛들은 삼용나노텍 공장의 골격과 산업 단지들로부터 어둠을 얇게 벗겨내고 있었다. 솜씨 좋은 목수의 대패질처럼 한 겹씩 어둠의 껍질이 벗겨지고 있을 때 미강이 맞춰 놓은 시계의 알람이 울렸다.
“팀 라푼젤. 테이크 오프(take off)! 라디오 스위치, 라디오 오프!”
곧이어 지민이 귀에 꽂은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 암호망으로 전달된 각 파일럿들의 이륙 신호가 들어왔다. 지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송기인 레드 원도 수직으로 날아오른 다음 고도를 낮추기 위하여 떨어지듯이 아래로 내려갔다.
“레드 원, 고도 20미터 유지”
“로그 원, 로그 투 간격이 너무 좁다. 적외선 거리계 참조하여 20미터 대형을 유지하라.”
지민의 손에 든 아이패드 화면에는 5개의 점으로 표시된 드론들이 지도 위에 표시됐다. 각 드론은 적외선 센서를 달고 있었고 이것은 다른 드론과의 거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예거K와 미강은 최초 작전 계획을 세울 때 편대의 각 드론 간 간격 유지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여러분 모두 개개인이 훌륭한 파일럿이라 할지라도, 조직화한 적을 상대할 때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1명의 뛰어난 전사가 능력은 평범하지만 잘 조직되고 규격을 맞춰 움직이는 보통 병사 5명을 한 번에 상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경찰의 드론 파일럿들은 수적으로 우세할 뿐 아니라 평소 조직화된 훈련을 해 오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과 같은 클랜에 몸담았던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형의 유지, 호위기와 수송기 간의 간격, 그리고 수송기의 비행 반경 10미터 이내에 그 어떤 드론도 접근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거리입니다. 적과 나와의 거리. 그뿐입니다.”
웨이 포인트 알파에서 합류한 레드 원과 로그 편대는 즉시 레드 원을 중심으로 대형을 갖췄다. 수송기인 레드 원을 중심으로 네 대의 호위 드론은 20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개활지를 가로질러 공장 쪽으로 향했다. 편대는 웨이 포인트 알파에서 대형을 만들고 공장의 동쪽인 웨이 포인트 브라보까지 이동한 다음 그곳에서부터 공장으로 직진할 계획이었다. 대기 중인 경찰 드론 편대와 거리가 가깝지만 일출 시각을 고려해 해를 등지고 비행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이 정확했는지는 웨이 포인트 브라보를 지나 봐야 알 일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편대는 별다른 비행 없이 공장 동쪽 500미터 지점까지 수월하게 이동했다.
지휘 채널을 넘겨받은 예거K가 말했다.
“웨이 포인트 브라보, 오케이. 이제 라푼젤까지 직진입니다. 항속 70, 고도 50, 침로 2-7-0. 행운을 빕니다.”
그 순간 멀리서도 희미하게 들을 수 있는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비행을 중지하라는 녹음된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고 순식간에 벌떼처럼 경찰 차량에서 드론들이 올라왔다. 망원 렌즈로 현장 영상을 촬영 중이던 덴샤로부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가 저렇게 많아? 여덟 대뿐이라면서요?”
미강도 당황한 목소리였다.
“경찰 쪽 드론 통신 채널은 모두 여덟 개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떡해?”
“저게 모두 몇 대야… 둘, 넷, 여섯, 여덟, 열, 열둘… 열여섯?”
냉각 탑 쪽을 바라보던 와타시도 렌즈를 돌려 동쪽 상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처럼 편대를 둘러싼 드론은 열여섯 대였다. 예거K가 소리쳤다.
“염병, 채널 이중화! 한 채널로 두 대씩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당황한 로그 원의 목소리와는 달리 느긋한 로그 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선 위험 때문에 삼중화는 안 했을 테니 적어도 스물네 대는 아니겠네요. 양호하네. 1 대 4로 맡으면.”
“로그 쓰리! 고도 유지해! 로그 포! 좀 더 안쪽으로 붙어!”
“아냐, 아냐! 레드 원! 고도를 좀 더 올려!”
편대장과 미강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교차하면서 이어폰을 울리고 있었다.
① Exposé, 1987.
② Access Point, 무선 신호 중계기.
③ Raspberry Pi, 영국 라즈베리 파이 재단에서 만든
교육 목적으로 만든 초소형, 초저가 PC.
④ Intel Galileo, 라즈베리 파이와 유사한 오픈 소스
기반의 하드웨어. 다양한 분야에서 산업용, 테스트용
장비를 개발할 수 있다.
⑤ Estimated Time of Arrival, 도착 예정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