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그리드 네트워크 따라 확산하는 세계의 저항
박다솔 기자, 김정윤 객원기자
미국 워싱턴 D.C.에 사는 크리스 터너 씨. 그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48세의 변호사, 터너 씨가 가는 곳은 정원에 있는 캠핑카다. 집 앞 캠핑카에서 생활한 지는 벌써 수개월째. 이른바 스마트 계량기, 지능형 전력 계량기 때문이다. 스마트 계량기는 터너 씨의 에너지 소비량을 하나하나 계량한다. 그가 언제 집에 있고, 어떤 가전제품을 사용하는지 모두 이 기계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감시받는다고 느낀다.
뿐만이 아니다. 스마트 계량기가 설치된 후로는 건강도 부쩍 나빠졌다. 터너 씨는 두통과 이명,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스마트 계량기가 배출하는 전자파 방사선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터너 씨는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거나 가끔은 정원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그러다 결국 캠핑카를 샀다. 캠핑카는 전자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알루미늄 포일로 감싸 마치 은색의 UFO처럼 정원 잔디밭을 차지하고 있다. 터너 씨는 이 행위를 자신의 운동이라고 믿는다. 그는 개인 블로그에서 지역 전력회사 펩코(Pepco)에 문제를 제기하고 전단지를 나눠주며 활동가들을 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터너 씨는 원래 집 외벽에 설치된 스마트 계량기를 뜯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워싱턴 D.C.에선 불법이다. 그의 집 스마트 계량기는 한 달 간의 긴 휴가로 집을 비웠을 때 설치됐다. “그리곤 전기요금은 올라갔죠. 드문 일이었어요.” 그는 바로 전력회사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들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대신 인터넷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 호주에서 스마트 계량기를 설치한 뒤 요금 인상과 화재, 특히 건강 문제를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일 일간지 <슈피겔>이 2년 전에 미국의 사례를 우려하며 보도한 내용이다. 크리스 터너 씨는 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다.
미국, 스마트그리드 네트워크 따라 반대 운동도 확산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미국과 유럽연합, 중국, 일본, 브라질, 멕시코 등 세계 여러 나라가 동시다발로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2003년 ‘그리드 2030’을 채택한 이래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후 2007년 말 에너지 독립 및 안보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했고, 오바마 정부가 2009년 경기부양법을 채택한 뒤 45억 달러(약 5조2,000억 원)를 투입하면서 확산했다. 미국 에디슨재단의 전자기술혁신연구소가 2014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스마트 계량기 설치 비중은 2012년 중반 33%에서 2014년 중반 43%까지 올라가 모두 5,000만 개가 설치됐다. 이러한 스마트그리드 사업 뒤에선 IBM, 시스코 등 초국적 정보통신 기업의 로비스트들이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매년 수조 달러가 고스란히 이들 기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스마트 계량기 반대 운동도 스마트 계량기 네트워크만큼이나 빠르게 성장했다. 요금 인상, 에너지 불평등, 정보인권, 건강, 화재 등에 대한 논란이 증가하면서 확산 속도도 빨라졌다. <전력을 장악하라(take your power)>라는 관련 영화도 나왔다. 이 영화로 미국 독립영화 인권상을 받은 조쉬 델 솔 감독은 북미에서만 100만 명이 반대운동에 참가하고 있고, 40개국 이상에 활동가 그룹이 있다고 전했다. 특히 몇몇 지역에서 이 운동은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선 180만 가구 중 20만 가구가 스마트 계량기 설치를 거부했다.
스마트그리드 반대 운동 덕분에 미국 메릴랜드 주 주민들은 스마트 계량기 설치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는 이미 2012년 56개 시티와 카운티, 1개 원주민 자치정부가 스마트 계량기 도입이 반대했다. 이 중 14개 지방자치단체는 스마트 계량기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싸움이 녹록치 않다. 워싱턴 D.C.에서는 펩코(Pepco)가 전력공급을 독점하는데 이 회사에 맞서는 정치인은 별로 없다. 에너지 기업에 맞서는 소수 정치인 중 한 명인 아커네타 앤더슨 민주당 전 지역의원이 펩코를 만나고자 전력을 기울였지만 회사는 끝내 이를 거부했다. 앤더슨 전 의원에 따르면, 펩코는 전력소비자들에게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1주일 남기고 “직원이 스마트 계량기를 설치하러 가택에 들어오는 것을 방해할 경우 전력을 차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유럽연합…독일은 일제 도입 반대, 네덜란드에서는 도입 중단
유럽연합 가입국은 2009년 ‘제3 에너지패키지’라는 협정을 체결하고 2020년까지 스마트 미터로 계량기를 80%까지 대체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유럽에서도 스마트 계량기에 맞선 저항이 벌어지고 있다. 이탈리아와 스웨덴 같은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설치했지만 이에 맞선 시위도 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도입을 중단했다. 개인 정보 보호 정책에 위배됐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현재까지 파일럿 프로젝트만 진행하고 있다. 독일 연방정부가 연구기관 ‘에른스트앤영’에 위탁하여 비용편익분석을 수행했는데 경제적 수익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일제 도입 대신 부문 시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국 정부는 2020년까지 가정과 기업에 5,300만 개의 스마트 계량기를 설치할 계획이다. 영국에서는 전력과 가스 모두를 계량하는 스마트 계량기가 도입되고 있다. 북아일랜드의 경우 소비자의 이해에 부합하는지 평가 단계에 있다. BBC는 지난 1월 “영국 에너지 기업이 스마트 계량기를 무료로 달아주고 있지만 결국 이 비용은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윤보다 인간과 환경 위한 기술을 원한다”
미국과 유럽연합 일부 나라들은 스마트 계량기로 전력뿐 아니라 가스와 물, 주차요금 등 모든 공공요금을 계산하도록 밀어붙이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2014년 고조된 물 투쟁도 스마트 계량기 도입으로 인해 촉발됐다.
하지만 미국 에디슨재단의 전자기술혁신연구소에 따르면, 미국 내 스마트 계량기 설치 추세도 정체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스코츠밸리의 주민들은 2010년부터 스마트 계량기 반대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스마트그리드 콘퍼런스 등 각종 정부 행사에서 직접 행동을 하는 등 다양한 행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스마트 계량기는 우리 건강과 안전, 지갑과 프라이버시에 심대한 위협이자 무선 기술, 기업의 통제와 기후 재난에 대한 교훈적인 계기”라면서 “우리는 지속 가능하고, 민주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위해, 이윤보다는 인간과 환경을 위한 새로운 스마트 기술을 원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