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세계 경제 위기의 실험실…“새로운 시대 올 것”
김정윤 객원기자
아스팔트 위에서 밀과 보리가 탁탁 타들어 간다. 한쪽에선 흰 우유가 콸콸 쏟아진다. 불볕더위보다 그리스 농민의 가슴을 타들어 가게 한 건 유럽연합의 쇠사슬에 꼼짝없이 묶인 그리스 정부였다.
그리스 농민들은 올해 내내 의회 앞과 거리에서 아스팔트 농사를 지었다. 지난 1월 말에는 농민 3만 명이 농업박람회가 열리는 테살로니키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1,500대의 트랙터가 꼬리를 물고 행진하는 바람에 테살로니키가 마비됐다. 2월 초에는 전국 주요 도로 68곳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기도 했다. 철길도 농민 저항에 끊겼고 수도 아테네에서는 대중 시위에 교통이 차단됐다.
농민 시위는 세금 인상과 연금 축소, 부채만 쌓이는 농산물 가격 정책 때문이었다. 그리스 정부는 지난 2월 농축산업자에 대해 세금은 2배, 사회복지비 납입금은 3배로 인상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어부들도 농민과 함께 시위에 합류했다. “어부 일에 자부심이 있어요. 고기잡이를 보며 커왔고, 또 평생 뱃일만 했죠. 그럭저럭 아이도 셋을 낳아 키우고 있어요. 하지만 이 법안이 통과되면 더는 바다에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도대체 우리가 무얼 먹고 살 수 있을까요?” 41세의 어부, 스타브로스 칼라키노스가 지난 1월 현장을 취재한 〈슈피겔〉에 말했다.
농민이나 어부만이 아니다. 그리스에선 올해만 두 번째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양대 노총이 공동으로 파업해 전국을 마비시켰다. 긴축 반대를 약속했지만, 더 가혹한 긴축을 고수하는 좌파 정부. 이들도 시위대에 최루탄과 진압봉을 들었다.
3차 구제금융의 단 1유로도 예산으로 쓰지 못해
지난해 9월 20일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재선에 성공한 뒤 만 1년이 다 됐다. 그 해 1월 의석수에 비하면 4석이 모자란 다소 초라한 승리였다. 앞서 7월 5일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61% 이상은 채권단이 제출한 구제금융안에 반대했다. 그리스 정부가 낸 구제금융안을 채권단이 거절하고 마지막 분할금 지급을 보류한 채 추가 긴축을 요구하자 실시된 선거였다. 그러나 치프라스 총리는 유럽연합의 ‘부채 쿠데타’에 여지없이 무릎을 꿇었다. 유럽 채권단은 향후 3년 동안 860억 유로를 지급한다는 세 번째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합의했고 열흘도 되지 않아 그리스에 첫 분할금을 지급했다. 이 대가로 치프라스 정부는 연금 추가 삭감, 세금 추가 인상, 공공 자산 민영화 가속화 등의 조치를 약속했다. 그제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그리스의 상황은 낙관적이며 독일과 유럽연합 모두 ‘윈윈’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리스 유권자는 3차 구제금융에서 단 1유로도 받지 못했다. 영국 시민운동 부채탕감 캠페인(Jubilee Debt Campaign)이 낸 지난 2월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재정안정화기금(ESM)에서 받는 860억 유로뿐 아니라 그리스 민영화 수익금 예상치 60억 유로와 정부 예산 20억 유로까지 모두 940억 유로를 채권단이나 은행에 그대로 내야 할 뿐이다. 540억 유로는 그리스 정부의 부채 지급에, 150억 유로는 그리스가 2015년 IMF에 지급하지 못한 부채와 그리스 외환보유고 지원에, 나머지 250억 유로는 그리스 은행 구제금융에 사용할 예정이다. 이미 8월 말 받은 230억 유로 중 130억 유로는 부채가 만기 된 유럽중앙은행으로 고스란히 들어갔고, 100억 유로는 그리스 은행을 살리는 데 쓰였다.
지난 1, 2차 구제금융도 큰 차이가 없었다. 2010년에서 2014년 사이, 채권단이 그리스에 빌려준 액수의 92%는 부채 지급과 은행 구제금융에 사용됐다. 그리스 정부 예산으로 쓸 수 있던 액수는 10%도 되지 않았다. 수혜자는 독일 등 유럽 일부 국가와 미국 금융권, 헤지펀드와 벌처펀드 같은 투기 자본이었다. 이자만해도 상당하다. ESM 대출 금리는 1.5%, IMF는 3.6%인데, 그리스가 2016년에서 2020년 사이 내야할 부채와 이자 총액은 550억 유로이며, 이중 100억 유로(약 13조 1,870억 원)가 이자 납부에만 쓰인다.
지난 5월에도 채권단은 3차 구제금융 세 번째 분할금 지급을 앞두고 다시 연금 삭감과 세금 인상 등의 긴축과 구조 개혁을 관철했다. 뿐만 아니라 재정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예산이 삭감되는 의무가 부과됐다. 그 사이 그리스 부채 탕감을 제안해 왔던 IMF는 유럽 채권단과 합의해 그리스가 양해각서에 수록된 긴축조치를 성실히 이행할 때에만, 구제금융 시점 3년 뒤부터 구제금융 일부 탕감과 유예 조치를 시행하기로 했다.
민주주의의 유린, 긴축과 민영화
유럽 채권단은 그리스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긴축을 강요하면서, 경제 위기 아래 노동을 유연화하고, 예산을 삭감해 복지를 줄여야 경제가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긴축에 대한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됐다.
그리스 경제는 2010년을 기준으로 현재 25%까지 추락했고 실업률은 위기 전 8%에서 27%까지 올라갔다. 5명 중 1명은 빈곤 속에 있다. 전체 일자리 중 정규직 비율은 27%로 줄어들었고, 비정규직은 56%로 증가했다. 최저임금은 2012년 이래 22% 포인트 줄어들었다. 2007년 그리스 부채는 GDP 대비 약 100%였지만 현재는 180%가 넘는다. 정부 지출도 2010년 140억 유로에서 95억 유로로 줄어들었다. 심지어 전체 임금노동자의 3분의 2가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민영화 감독청을 설치하고 국가가 소유한 섬, 해변, 호텔, 골프장, 경기장, 유적지 등 자산을 매각하고 있다. 채권단의 요구로 설립된 이 기관은 1990년대 구동독 정부 자산 민영화를 감독했던 서독 정부 기관인 트로이한트안할트(Treuhandanstalt)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미 2014년 그리스 공영 정보통신 회사 헬레닉 텔레콤이 독일 텔레콤에 매각됐고, 지역 공항도 독일 회사에 팔렸다. 7월 초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피레우스 항구가 중국의 운송회사 코스코에 팔렸다. 이번 가을에도 채권단이 다시 그리스를 방문할 계획이다.
28일 치프라스 총리는 연거푸 독일 정부에 채무 탕감과 독일 전쟁 배상금 지급을 요구했지만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그는 “각국 총선과 국민투표가 다가오고 있다”며 “남유럽에 대한 유럽연합의 긴축 도그마가 지속된다면, 유럽연합은 전 유럽에 걸쳐 매우 심각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집권 여당 시리자 지지율은 현재 제1 야권 신민주당보다 8% 포인트 뒤진다. 신민주당은 시리자의 정책은 실패했다며 조기 총선을 으르대고 있다.
경제위기 뒤 신자유주의 실험실…새로운 가능성도
그리스의 현실은 암울하다. 이 현실은 이제 유럽의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스 경제학자 엘리아스 아이오아키모글로우(Elias Ioakimoglou)는 최근 미국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에 “그리스의 경제 위기는 우연이나 잘못된 정책 또는 실수의 소산이 아니라 꼼꼼하게 고안된 전략의 결과입니다. 노동에서 자본으로 소득을 재분배한 이 정책은 그리스를 부흥시키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GDP와 고용에 파괴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스에서 실험한 이 전략은 이제 패러다임이 되고 있죠. 프랑스 노동법 반대 시위 탄압은 2011~12년 그리스에서 일어난 거대하고 지속적인 시위에서 시험 된 바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반면 지난 7년 동안 계속된 위기 속에서 성장한 새로운 가능성도 주목된다. 아이오아키모글로우는 “그리스 경제위기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로 착근됐습니다. 이는 결국 지배계급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고, 급진적 변화의 기회도 열고 있죠. 지금 그리스에는 긴축을 반대하는 강력한 사회 집단이 형성돼 있고 지난 6년 동안의 투쟁을 통해 귀중한 정치적 노하우를 습득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를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이나 조직은 형성되지 않은 상황입니다”라고 지적했다.
시리자 전 의원으로 원내 대변인을 맡았던 초에 콘스탄토포우로루(Zoe Konstantopoulou)도 비슷한 의견이다. 그는 올 초 영국 좌파 언론 〈레드페퍼〉에 “사람들이 나서고 있어요. 사회 운동이나 정치 단체와 함께 스스로 지킬 수단을 찾고 있죠. 나는 우리 사회 운동이 다시 건설되는 결정적 순간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대가 올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여름 시리자가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을 강행하자 시리자와 결별했다. 그 뒤 시리자 당내 좌파 플랫폼이 결성한 ‘민중연합’에 참여하다 지난 4월 ‘자유의 진로’라는 새 정당을 창당해 당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지금 의회에 긴축 반대 세력은 없고 이 목소리는 사회운동이나 시위에서만 나와요. 하지만 우리는 이 제도를 다시 정복할 겁니다”라고 말했다.[워커스 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