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 나선 사람을 쫓는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시대의 상흔으로 길거리에 내 쫓긴 사람을 담는다. IMF 이후 길 위에 머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이 잃은 건 돈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를 잃어버린 실직 노숙인부터 수용시설에 갇혀 사는 장애인, 도로와 지하철에서 움직일 발을 달라며 이동권 쟁취에 나선 장애인, 진실을 규명하라며 광장에 모여든 세월호 유가족까지. 박종필 감독은 강제로 길 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을 꿋꿋하게 쫓는다. 현실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기록하는 사람, 류미례 감독이 박종필 감독을 만났다.
류미례(류) 박종필 감독은 주로 빈민, 가난, 노숙, 장애와 관련된 작업을 하다 세월호 영상까지 이어왔다. 작품세계를 이야기할 수 있는 키워드가 있을까.
박종필(박) 장애와 빈곤이다. 처음엔 장애보다 빈곤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노숙인 작업도 했고. 소외된 노동관련 작업을 하려다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고 세월호 작업까지 왔다.
류 미술을 하다 다큐멘터리를 시작했다. 다른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극영화나 다른 예술 같은.
박 다큐멘터리가 내게 맞는 거라 생각했다. 생생한 이야기, 직접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다큐멘터리가 최적이었다.
류 빈곤문제를 다룬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실직 노숙자>로 국제 영화제도 갔고 상도 받았다. 그런데 계속 빈곤문제를 다루지 않고 장애인 문제를 담아낸 건 의외였다.
박 노숙인 작업을 하고나서 빈곤과 관련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노숙인을 제대로 다룬 영상보고서가 없어 배급도 잘 되고 국내영화제도 가고, 국제영화제도 가고 그랬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부채감이 컸다. 작품에 등장한 (노숙인)형들이 다 객사했다. 다 돌아가셨다. 연락이 전혀 안 되는 분도 있었다. 영화를 가지고 세상을 바꿔보려 했는데, 나만 뜨고 내 주인공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자괴감과 부채감이 커서 힘들었다. 그러다 2001년도에 ‘노숙인 복지와 인권을 실천하는 사람들'(지금의 홈리스행동)을 알게 되고 관계를 맺으며 <거리에서> 작업을 했다. 객사한 형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스스로에 대한 활동을 다짐하는 다큐였다. 빈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않았지만 그 단체에서 계속 무언가를 해나갔다고 생각하기에 장애와 빈곤을 같이했다고 생각한다.
류 박 감독만큼 죽음과 가까운 작업을 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고 김관홍 잠수사 작업도 그렇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힘들다. 영매처럼 자기 작업이 몸속에 녹아들면서, 굉장히 죽음과 가까이 있다. 그런 경험을 할 때 어떤가.
박 그냥 힘들다. 많이 힘들다. 관홍이는 정말 힘들었다.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였다. 당시 그 친구가 트라우마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다. 어려운 조건에서 인양작업을 함께 했고 그 기억에 괴로워했다. 언젠가 한번 활동가로 살아야겠다는 말을 하더라. 김관홍 잠수사 별명이 거북이다. 활동가들이 애칭이 있는데, 그때 거북이 활동가를 줄여 거활로 부르면 좋겠다는 얘기도 나눴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다 힘드니까 앞으로 내가 많이 챙겨야 겠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냥 많이 힘들다. 많이 힘들었다.
류 우리는 박 감독을 독립영화계의 ‘다큐 본좌’라고 부른다. 진심이 담긴 별명이다.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면 작품을 하고 나서 상실감이 커서 작업을 계속 이어가지 못한 경우들이 있다. 등장인물의 고통이 전이 되서 힘들어하고 싸움의 패배 때문에 아파서 작업을 이어가기 힘들어 하기도 하고. 박 감독은 어떤 편인가.
박 꼭 다큐멘터리가 아니더라도 영상을 계속 만들어왔다. 교육물도 있고. 물론 영화감독을 하려면 나처럼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영상작업에 대해 손을 놓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제에 출품하는 작품이 아니더라도 방송, 집회 상영, 문화제 영상들을 계속 만들었다. 시민방송(RTV)에서 ‘나는 장애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고.
류 내 경우는 나의 작업 세계가 있는데 현실에서 4.16미디어(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 같이 바로 해야 하는 작업이 있으면 고민이 된다. 내 작품세계와 내가 개입하려는 현실세계와 충돌하고 있으니까.
박 미룰 수 있는 건 미루고 급한 건 하는 게 맞는 거 같다. 나는 그렇게 작업 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내가 하려던 작품이 있는데, 현실적인 문제,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있으면 그 영상을 먼저 작업하는 식이다.
류 박 감독의 원칙은 가장 현실적으로 시급한 걸 먼저 하는 건가?
박 그렇다. 홈리스나 장애 문제도 늘 다뤄왔고 관심이 있지만 이미 이쪽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나. ‘다큐인’ 안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어서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류 4.16연대 미디어 활동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박 집에 텔레비전이 없다. 4.16 참사가 있던 날 인터넷을 하다 점심쯤에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배가 침몰 했구나’ 정도였다. 당시에 개인적으로 더 큰 충격은 다음날인 17일, 시설에서 1급이었는데 시설을 나오면서 3급으로 떨어진 장애인의 죽음이었다. 그 분이 화재로 돌아가셨다. 그게 되게 충격적이었다. 화재로 장애인이 죽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어서. 당시 그 충격으로 장애인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갔는데, 4.16참사 역시 사회의 모순을 담고 있는 큰 참사라는 걸 알게 됐다. 이후 세월호 집회 때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카메라 없이 가는 게 허전해 카메라를 들고 집회에 가고 그랬다. 그러다 류미례 감독을 집회에서 만났고 촬영을 좀 해달라고 해서 얼떨결에 촬영을 하고, 그런 우연으로 2기 위원장까지 맡았다. 4.16 참사는 정리하기 쉽지 않은 복합적인 문제이고 복합적인 고통, 아픔이다.
류 이후에도 박 감독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4.17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속상해하면서.
류 4.16연대 미디어 위원회를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박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 희생자, 생존자, 미수습자 등 피해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잘 알려질 수 있도록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가 만들어졌다. 인권운동의 흐름과 함께 할 수 있는 미디어활동가들의 참여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현장에서 미디어활동을 했던 미디어활동가들,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알음알음 모여서 이러한 운동에 함께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현재 미디어활동가, 독립다큐멘터리감독과 배급전문가가 모여 있다.
류 4.16연대 미디어 위원회 3기가 새롭게 시작한다. 2기 때와 달라진 점이 있을까.
박 지난해 8월 위원장을 맡고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준비하면서 미디어 위원회가 주도적(?)으로 하려 했다. 1주기 때와 2주기의 상황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1주기는 격렬했지만 2주기는 1주기만큼 격렬하지 못할 거 같아서 4.16참사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영상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 주류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는 지루한 소재가 됐다. 지금 4.16운동이 힘든 상황이다. 헌법 개정은 밀렸고, 세월호 특별법 개정은 안됐고, 단원고 ‘기억교실’은 이전됐다.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을 밝힐 수 있는 세월호 선체는 많이 훼손됐다.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야당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는 다시 법제정에 나서려하는데, 여러 가지 고민을 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대선전에 세월호(4.16참사)를 정리하고 진실규명이 안 되는 방향으로 끝 내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미디어 위원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기본적으로 필요한 영상, 사람들에게 아직 참사가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영상을 잘 기획해서 만들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가 304명의 희생자, 유가족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희생자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어떻게 대선까지 4.16운동을 영화적으로 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다. 3주기 아이템은 아직 논의 중인데, 단원고 형제자매와 일반인 생존자, 고 김관홍 잠수사와 같은 민간인 잠수사 이야기 등 4.16 투쟁사를 짚어주려 한다.
류 많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등장인물의 감정에 이입되지 않나. 공감하지 않으면 작업할 수 없으니까. 박감독은 다큐멘터리 속 인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
박 평생 두 개의 영역(빈곤, 장애)에서 작업이든 활동이든 함께하며 살아가겠다고 생각했다. 초기에 노들야학에서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싸우는 모습을 찍을 때, 장애인 당사자들이 ‘또 찍고 떠날 사람’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게 너무 싫었다. 영상 하는 사람들 잠깐 왔다 간다고 선을 긋는 게 참 싫더라. 결국 떠나지 않았다. 현실운동에서 그들과 내가 다른 관계가 아니라 동지라고 생각한다. 계속 패배하고 누군가 죽고 그래도 계속 나가지 않나. 그 와중에 나만 슬쩍 빠져 나오기 좀 그렇다. 원래 거리가 있던 관계가 아니니까. 활동가이긴 하지만 동료, 동지로 만나는 거고 나와 그들이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풀어나가는 게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같이 아파하고 같이 트라우마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그 아픔을 극복해 나가는 것. 한 울타리 안에 같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관계를 추구했기 때문에 죽음과 관련된 힘든 일들이 있어도 잘 극복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류 함께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 건가.
박 트라우마를 풀고 힘든 것을 풀어내는 거 아닐까. 힘들지만 함께.
류 올해 다큐멘터리 시작한지 20년인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고 보나.
박 세상은 잘 모르겠는데 홈리스운동과 장애인운동은 좀 나아지고 있지 않나 싶다. 홈리스운동이 조금 정체되고 있지만, 장애인운동은 그래도 처음보다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001년도 장애인 이동권 투쟁할 때는 작은 단체들 몇 개 중심으로 했는데, 지금은 전국조직까지 있으니 조금 나아졌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질이나 규모면에서 성공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내 삶속에서 다큐멘터리 제작 초기와 비교하면 성장했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나…. 그것 역시 나아지고 있다고 본다.
류 박 감독은 미술에서 다큐멘터리로 장르를 전환했다. 20년간 작업을 이어오면서 장르를 바꾼 것을 후회한 적은 없나.
박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류 지금시기 다큐멘터리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 감독에게 다큐멘터리는 어떤 의미인가.
박 다큐멘터리가 필요하지 않다면 삶의 후회가 많지 않았을까 싶다. 여전히 내 삶속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다. 세월호와 관련된 영상 작업도 그렇다. 2주기 영상이 완성도에 있어서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4.16을 남기고 그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우리가 우리의 할 일을 한 거다.
인터뷰 류미례 감독 / 정리 신나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