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 광장, 세월호 농성장 북쪽에 50여 개의 텐트가 설치됐다. 밤이면 영하로 훅 떨어지는 기온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나눠 가지려는 듯, 텐트들은 촘촘히 붙어있다. 광화문에 캠핑촌을 세우자는 제안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충격을 받은 예술인들이 먼저 했다. 청와대가 지난해 5월 진보적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려 보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인들을 중심으로 대응이 시작됐다. 문화예술계 시국선언이 이어졌고, 지난달 5일 광화문에 기습적으로 텐트를 설치해 캠핑촌을 만들었다. 캠핑촌을 제안한 송경동 시인은 적극적인 점거 운동을 고민하던 중 떠오른 아이디어였다고 말했다. 송경동 시인은 “1,100만 비정규직 사회에 대한 비참함이 있고, 가계부채 1,300조와 함께 쌓인 불만이 있다. 청년으로부터 흙수저, 자살 공화국, 헬조선 등 사회적 분노가 터져 나오지 않았나. 그런 분노를 급진적 방식으로 의제화하고 광장과 거리의 정치를 집단화하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 나부터 광장으로 뛰어들자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처음엔 경찰과 충돌도 있었다. 11월 4일, 경찰은 텐트 수십 개를 강탈했다. 문화연대,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문화예술인들이 준비한 텐트였다. 30명 넘는 예술인과 노동자는 격렬히 저항했고, 텐트 없이 밤샘 노숙을 시작했다. 계속된 저항에 경찰도 점거 농성을 막을 수 없게 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광장을 아고라로 만들겠다’며 여러 단체를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경찰이 광화문 광장 캠핑촌을 더 어쩌지 못하는 이유가 됐다.
한국 사회의 자화상들이 모인 곳
문화예술인의 제안으로 시작됐지만, 캠핑촌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 복직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 등과 함께 했다. 10년을 싸운 기륭 노동자, 콜트콜텍 노동자가 있고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쌍용차 해고자 노동자 등이 광화문 광장에 자리를 마련했다. 초겨울의 날씨가 성큼 다가왔지만, 5번의 주말 촛불 집회를 거치며 광장의 분노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이들이 광장에 모인 것은 단순 점거 농성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들은 광장에 모여 시민만이 권력의 주권이 될 수 있다는 정언명령과 이를 실현할 새로운 광장 정치를 모색하고 있다. 기습적으로 캠핑촌을 만든 데엔, 광장의 주도권을 시민이 직접 가져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광화문 광장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건 2009년으로 채 10년이 되지 않았다. 차량 중심에서 보행 중심으로 중심 가치는 이동했지만 여전히 물음은 남았다. 신유아 문화연대 활동가는 “광장을 이용하려면 서울시에 사용신청서를 제출해야 했고 심의를 거쳐 사용 여부가 확정된다. 광장은 시민의 것인데 굳이 허락을 받고 들어와야 할까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광장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된다
광장을 공론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도 계속됐다. 11월 30일 오후 2시, 광화문 광장에서 광장 토론이 열렸다. 바람막이도 없는 광장 가운데 책상 몇 개가 놓였고 발제자들과 토론을 들으려는 시민들이 마주 앉았다. 주제는 ‘광장은 무엇을 원하는가’였다. 발제자들은 광장에서 인권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 현재 집회 시위의 양식, 시민이 새로운 정치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지 광장의 쟁점에 대한 의견을 냈고, 퇴진 이후의 한국 사회가 갈 방향을 고민했다. 오고가는 100여 명의 시민이 2시간 가까이 이어진 토론을 지켜봤다.
광장에서 나온 정권 퇴진 이후의 고민은 차곡차곡 모아져 ‘광장신문’에 담긴다. 광장신문은 시민적 상상으로 만들어낸 풍자 신문으로 현재 2호까지 발행됐다. 시민에게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재벌 구속 수사, 선거연령 하향, 부정축재 재산 몰수 등 시민들이 바라는 소식들이 가상으로 구성돼 담겨있다. 광장신문 발행위원회는 “반 박자 빠르게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시민이 주체가 되서 사회를 재구성하는데 의미가 있다”며 “1호 2만부, 2호 5만부를 찍어 집회 현장에서 배포했는데 더 많은 읽을거리가 나오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캠핑촌엔 나름의 규율도 있는데, 오전 9시 ‘촌민회의’를 통해 하루 일정과 애로사항을 공유한다. 12시엔 ‘새마음애국퇴근혜자율청소봉사단’이란 이름으로 청와대 가는 길을 청소한다. 촌민들은 시민 의식을 발휘한 봉사일 뿐이지 절대 시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밖에 콘서트, 밴드 공연, 굿, 작품 전시, 퍼포먼스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힘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시민과 접점을 넓히고 있다. 특히 ‘하야하롹(Rock)’은 11월 18일 처음 광화문 광장에서 공연을 선보인 후 전국 9개 도시에서 열리는 공연으로 규모가 커졌다. 궁극의 라인업으로 매주 기대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무대에 서길 원하는 예술인들도 많다. 작은 무대기 때문에 관객과의 소통이 가능하고, 광장의 취지에 공감하는 뮤지션들이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캠핑촌에서 난 많이 변했어”
57호 텐트의 입주민을 만났다. 길정순(63) 씨는 KT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1인 시위자였다. 근처 KT빌딩에서 매일 농성을 하고 아예 짐까지 싸서 노숙 농성까지 하던 참에 광화문 캠핑촌이 생겼고, 그 길로 함께 들어와 살고 있다. 그녀는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캠핑촌에 입성하고 처음 접했다고 했다. “노동자 현실을 많이 알게 됐어요. 내가 모르는 세계를 이 나이에 알게 된 거 아니겠어요? 유성기업이나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얘기를 듣는데 비정규직 이거는 빨리 없어져야 할 제도인 거예요.”
그녀의 목표도 바뀌었다. 내 문제만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박근혜 퇴진’과 함께 나가겠다는 것. 들어올 땐 맘대로 들어왔지만 나갈 땐 마음대로 못 나가게 됐다며 웃음 지었다. 지하철이 지나가면 땅이 울리고, 지나가는 자동차들은 참기 힘든 소음을 내지만 이런 불편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길 씨는 지난해엔 말기 암 판정을 받아 수술까지 했다. 캠핑촌 입주민들이 그 사실을 알고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튼튼한 텐트를 만들었다. 두꺼운 스티로폼으로 지붕까지 덮었고 무거운 스티로폼 때문에 내려앉으려는 지붕은 기둥을 세워 무너지지 못하게 작업했다. 길 씨는 “몸은 좀 고달픈데 캠핑촌에 있으면 손주들을 위해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힐링이 돼요”라며 건강을 염려하는 목소리에 밝게 화답한다. 본격적인 광장의 정치가 시작된 게 아닐까. 기존 질서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질주하는 목소리들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