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억압받는 이들의 혁명가 서거하다
[워커스 27호]세계 가난한 이들의 투사,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선구자, 냉철한 반제국주의자
“서둘러, 서두르라!” 1959년 미국 CIA 서반구 담당관 J.C. 킹. 그는 자신의 부하 앨런 덜레스 팀장에게 쿠바 망명군 설립을 재촉했다. 쿠바 새 정권이 은행과 주요 산업을 국유화할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쿠바 망명군은 미국 마이애미로 도망쳐 온,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부리던 군인과 관료로 구성될 참이었다. 쿠바의 새 정권을 초기에 제압하지 않는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타날 것이라고 미국은 전전긍긍했다.
이 새 정권은 1959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을 일으켜 세운 쿠바공화국이다. 미국 상원의 조사위원회가 1975년 공개한 문서에서 CIA의 킹은 “무력만이 카스트로를 막을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무력뿐 아니라 60년간 지속한 경제 봉쇄도 카스트로를 막지 못했다.
“사회주의와 함께할 것인가, 아닌가”
쿠바 혁명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국가평의회 의장. 그가 90세의 일기로 11월 25일(현지시각) 타계했다. 20세기 혁명의 마지막 지도자이자 전략가인 카스트로의 죽음에 세계 곳곳에서 애도의 물결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에서 150km도 떨어지지 않은 작은 섬나라 쿠바에서 미 제국주의와 독재에 맞서 혁명을 일궈낸 카스트로. 그는 혁명에 성공한 뒤 곧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에서 성장하던 탈식민 반제국주의 운동을 고무했고 상호 연대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런 카스트로의 이상과 쿠바 혁명은 미국의 앞마당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쿠바 민중의 존엄을 보장했고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 모두를 감명시켰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스페인 이민자 출신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성장할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쿠바 북동부 올긴 주는 19세기 말 미국이 점령한 관타나모 해군기지 인근에 있어, 카스트로는 미 제국주의와 친미 독재의 부조리를 경험하며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결국 1959년 미국이 후원하는 바티스타 독재를 물리친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뿐 아니라 국제주의적 전략 속에서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등 잇따른 제3 세계 혁명 승리에 기여했다.
카스트로는 1959년 집권해 2008년 건강상의 문제로 사임하기 전까지 48년 동안, 보건과 문맹률 포함한 주요 사회 척도를 역사적인 발전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혁명 당시 쿠바는 외국 자본과 소수 기득권 세력이 자본과 자원을 독점하면서 서구 식민지 중에도 가장 비참한 생활 수준을 보였다. 카스트로는 이런 쿠바 경제구조를 갈아엎었다. 모든 노동자에 대한 일자리와 무상의료 등 사회보장 혜택과 더불어 모든 기업 국유화, 주식시장 폐쇄, 외국 재단과 대지주가 소유한 토지 국유화와 분배 등의 정책을 실현하면서 그동안 고통 받았던 대다수 무산계급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결과적으로 혁명 당시 1천 명당 약 79명이었던 영아 사망률은 현재 4명으로 내려갔다. 영아 사망률 7명인 미국보다 훨씬 진보한 수준이다. 평균 수명도 79세,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0.2%다. 쿠바 아이들에게 접종되는 13종류의 예방백신 가운데 12종류는 국내산이다. 현재 쿠바는 100개 이상의 개발도상국에 의료 지원도 하고 있다.
또한, 카스트로의 지도로 쿠바의 국제주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의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와 같은 해방 운동을 넘어 세계로 확산해 갔다. 그는 1978년 쿠바를 방문한 카터 미 행정부의 외교단에 “(지구상에는) 두 개의 법이 있는 것 같다. 두 개의 규칙 그리고 두 개의 논리가 있다. 하나는 미국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나라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미국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1998년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대통령 당선을 시작으로 에콰도르, 볼리비아, 니카라과에서 좌파 정부가 들어서고 브라질,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서도 중도좌파 정부가 등장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스트로는 이미 1993년에 아바나에 모인 라틴아메리카 좌파 세력에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와 함께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쿠바혁명에서 제3 세계 혁명으로
이러한 쿠바혁명은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노선에 가시와 같았다. 쿠바와 미국 양국 관계는 15세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쿠바는 콜럼버스 탐험대가 1492년 지금의 엘살바도르에 도착한 뒤 이어서 발견한 땅이다. 이때부터 쿠바는 서방세계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콜럼버스에 이어 유럽의 수많은 탐험가가 쿠바가 있는 카리브 해로 몰려들었다. 쿠바는 아메리카의 관문이 됐고 특히 아메리카 남북을 잇는 교량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쿠바는 서구에 반드시 정복해야 할 요새가 되었다. 16세기부터 스페인은 쿠바를 아메리카 대륙 정복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았고, 17세기 스페인이 쇠락한 뒤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군함이 이 지역을 휘젓고 다녔다. 이어서 서구의 무역상과 군함과 함께 해적이 난립했는데, 20세기 이후에는 냉전기 미국과 소련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곳이기도 했다.
이처럼 쿠바는 한반도와 같이 외세의 영향이 첨예한 지역이어서 쿠바 독립운동의 영웅 호세 마르티를 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독립을 성취하기는 어려웠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 쿠바를 점령했고, 1902년 쿠바가 독립한 뒤에도 1959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쿠바의 민중은 친미 군사 정권 또는 부패한 정권들 아래서 신음했다. 그러던 중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 세력이 당시 쿠데타로 집권한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면서 혁명을 달성했다. 카스트로는 애초 1953년 민중혁명을 일으켰다 실패하고 체포됐는데, 이때 재판에서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기적적으로 카스트로는 2년 후 사면됐지만, 다시 멕시코로 망명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베라와 2년간 2차 혁명을 준비하고 게릴라 대원들과 함께 쿠바로 돌아왔다.
하지만 88명이던 대원 중 대부분은 상륙하자마자 정부군의 기습에 무참히 살해됐고 피델 자신과 동생 라울, 체 게베라를 포함해 10여 명만이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기존 혁명 세력과 연합하며 300여 명의 게릴라 부대로 발전했고 빈민과 서민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전국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결국, 바티스타 정권을 지원하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지원을 중단하고 바티스타가 해외로 탈출하면서 쿠바혁명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미국은 애초 쿠바 혁명정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 초기 양국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1959년 4월 카스트로는 직접 사절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쿠바가 사회주의 경제개혁을 확대해 나가면서 미국 자본의 이해를 침해했고 또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영향을 우려한 나머지 카스트로에 대한 638건의 암살 시도를 비롯해 쿠바 정부 전복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번번이 실패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 시절 미국은 반혁명군을 만들어 쿠바를 침공한, 일명 피그만사 건을 일으켰지만 단 3일 만에 격퇴당했다. 이 사건 뒤 카스트로는 오히려 사회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하지만 소련이 1962년,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세운 것에 반발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핵전쟁의 위기가 왔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모스크바와 거리를 두고 라틴아메리카부터 베트남까지 제3 세계 해방운동 지원에 뛰어들었다. 미사일 위기는 곧 진정됐지만, 쿠바가 열강 사이의 작은 행위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이 시기는 쿠바가 가장 급진적인 단계로 이동한 때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1967년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처참한 죽음은 이 혁명의 분기점이 됐다. 쿠바를 모델로 한 반제국주의 투쟁이 일어났던 페루,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역시 비참한 결과로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카스트로는 잔인한 봉쇄와 경제적 한계 속에서 쿠바의 생존을 염려했고 게릴라 전략으로부터 물러나 국내 정책에 집중한다.
다시 도전에 직면한 쿠바
카스트로를 위시한 혁명가들이 건설한 쿠바 사회주의 체제는 실질적인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1990년대 소련의 붕괴 전부터 일상의 삶은 고단했다. 기본적인 사회복지는 누릴 수 있었지만 소비재는 늘 부족했고, 정부 비판자들은 어떤 형태건 가혹하게 취급받았다. 쿠바 민중은 집단적인 연대와 희생으로 이 시기를 버텨야 했다. 또 국가 주요 조직은 카스트로의 통제 아래 십여 명의 ‘역사적인’ 지도자들에게 독점됐다. 불투명한 관료주의로 국가는 점점 부패해 왔다는 지적도 나온다. 1990년대 이래 추진된 시장 개방 정책에 따라 불평등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쿠바는 이제 다시 미국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최근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추진한 모든 것을 돌려놓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오바마 또한 “미국의 국익에 따를 것”이라고 밝혀 실제 얼마나 관계가 개선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쿠바에 다시 예민한 시기가 도래하고 있음은 기정사실이다.
카스트로의 유해는 그의 뜻에 따라 화장된다. 12월 4일 장례식이 예정돼 있다. 대부분의 쿠바인은 그를 애도하며 존경을 표하고 있다. 특히 쿠바가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앙골라 등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은 카스트로를 ‘아프리카의 아들’로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올 4월 쿠바 공산당대회에서 “나는 곧 다른 모든 이들처럼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쿠바는 누군가 열정과 존엄을 가지고 싸운다면 물질적이며 문화적인 산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그 증거로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29일, 중남미 위성방송 텔레수르는 “피델은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투사,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선구자, 냉철한 반제국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