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소개]
지민 : 인공지능체 에이도스에 저장된 역사의 분기점에 개입하는 시간 여행자
에이도스 : 새로운 행성에 복원할 인류의 문명과 역사를 백업하는 인공지능체
하미강 : 오메가섹터의 격리구역 보안책임자
웬즈데이 : 국제적 해커 연대 고스트라이더의 리더
장명국 : 대만 국가재해 저감 과학기술 센터 소속의 지진학자
[지난 줄거리]
멸망을 앞둔 태양계의 지구 문명을 다른 행성계로 복원하는 오메가 플랜이 진행 중인 가까운 미래. 오메가 플랜의 데이터 분석학자 지민은 복원을 위해 백업 중인 역사 데이터에서 주요 전환점의 사건들에 개입하여 역사를 바꾸는 실험 중이다. 지민과 미강은 실제 역사에 없었던 대지진이 덮친 가상현실 속의 부산으로 가서 지진의 원인을 파악하려 한다.
미강은 피난민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그들의 캠프가 있는 공원 안쪽으로 달려갔다. 지민은 미강이 놓고 간 무전기로 자신들을 데려다준 조 소령의 수색대와 연락하기 위해 무전기로 계속 그들을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지민은 불안한 눈길로 웬즈데이를 보았다. 그는 명국의 옆에 앉아 귓속말하는 중이었다. 응답이 없는 무전기에 대고 혼잣말을 계속하던 지민은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5분도 안 남았다. 오차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3번째 지진은 몇 분 내에 닥칠 것이다.
미강은 캠프 쪽으로 달려가 곧 지진이 닥친다고 경고하며 붕괴할 위험이 있는 구조물로부터 멀어지라고 피난민들에게 소리 질렀다. 무기력하게 누워있던 이들은 미강의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고는 잠시 우왕좌왕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어차피 그들은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가로등과 간판 주변에 자리 잡은 피난민들만 대피시키고 난 다음 미강은 다시 지민에게 달려갔다.
“몇 분 남았지요?”
지민은 시계를 보았다. 30초 전. 진앙이 50km 앞 해저라면 이곳까지 진동이 도달하는데 10초 내외일 것이다. 지민은 시내를 내려다보며 차라리 저곳에 생존자가 남아있지 않기를 바랐다. 이제 곧 바라보는 것 말고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눈을 감고 그것을 외면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처음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몸 전체에 먼저 다가왔다. 지민은 빈혈을 느낄 때처럼 어지러운가 싶더니 몸 전체가 아래로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불쾌한 울렁임으로 시작된 진동은 곧이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지축을 흔들었다. 숲이 일순간 출렁였고 멀리 위태롭게 비틀려있던 광안대교의 현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어야 2분이에요!”
미강은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주저앉은 지민에게 말했다. 지민은 카산드라의 예보가 맞아떨어졌다는 사실보다도 지금 몸을 뒤흔드는 진동에 더 놀랐다. 광안대교가 끝내 끊어지며 둔탁한 굉음이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예상 규모는 8.0. 문제는 진동이 아니라 그다음, 쓰나미였다. 미강은 망원경으로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 해수면과 해안가 주변을 관찰했다. 연락이 두절된 조 소령의 수색대와 다른 민간인 생존자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불과 3분도 안 되어 이미 한바탕 휩쓸렸던 해안가는 다시 검은 흙탕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진동은 끝났지만 부풀어 오른 해수면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대천공원 밑의 로터리까지 바닷물이 차오를 정도였다.
지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선회 중인 헬기가 보였다. 그들이 타고 온 수색대의 헬기였다. 지민은 미강에게 손짓하여 헬기가 내려오고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미강이 말했다.
“수색대가 돌아왔네요. 일단 장 박사와 함께 여길 벗어나야겠어요.”
웬즈데이는 헬기와 장명국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산드라가 정확하다는 게 증명되면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그랬지? 장 박사. 권총 준비해둬.”
헬기는 잠시 산 정상 주변을 선회했다. 공원 주변의 광장 위로 방향을 튼 헬기 때문에 피난민들의 텐트가 날아가고 끌어 모아둔 물자들이 강한 바람에 휘날리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헬기는 완전히 바닥에 착륙하지 못하고 무장한 병사들 세 명과 조 소령이 7m 상공에서 레펠로 내려왔다. 적어도 지민이 해운대 모래사장에 고꾸라질 때와는 다르게 숙련되고 매우 편안한 자세였다.
미강과 지민 일행을 발견한 조 소령은 세 명의 병사들을 향해 걸어왔다.
“총 내리시지요, 하미강 대위!”
“당신들 정체부터 밝히는 게 우선 아닙니까?”
“우린 그 남자만 회수하면 됩니다. 그럼 실험은 다 끝나요.”
조 소령은 명국을 가리켰다. 헬기는 아직 상공을 낮게 선회 중이었기에 대화 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들은 고함을 질러야 했다.
“무슨 실험?! 지금 이게 모두 실험이었단 말이야? 무엇을 위해서?!”
조 소령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헬기 소리 때문에 전달이 힘들 거란 걸 깨닫고는 옆에 선 병사에게 손짓했다. 병사는 팔뚝에 매단 전술 단말기를 조작하여 헬기에 다음 신호까지 물러나 있으라고 지시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잦아들자 조 소령은 손에 든 MP5 기관총의 총구를 내리고 쏘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지민에게 다가갔다.
“서로 총은 내려놓고 말합시다.”
“그럴 거면 애초에 무장 병력과 함께 전술대형으로 다가오지 말았어야지.”
미강의 말에 조 소령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이러지 맙시다. 어차피 여긴 복제된 세계 아닙니까?”
“당신, 마커스 그룹에서 보낸 직원이군.”
“조슈아 레드먼, 콜로라도 섹터. 그쪽 두 분은 평택 섹터에 계신 분들이지요?”
“통성명은 됐고, 죽은 사람까지 살려서 하려고 했던 실험이 뭔지나 들어봅시다.”
미강의 말에 레드먼은 손짓으로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들이 지민과 미강일행을 둘러싸도록 지시했다. 네 개의 총구가 그들을 감쌌다. 4:2였다. 웬즈데이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는 멀리서 선회 중인 헬기를 바라보았다.
“4:2면 좀 불공평한 거 아냐?”
웬즈데이는 멀리 보이는 헬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웬즈데이의 손짓에 따라 헬기는 낚싯줄 걸린 고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귀찮은 듯이 손을 내리자 헬기는 바닷물이 들어차고 있는 달맞이 고개에 추락했다.
레드먼과 병사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건 미강과 지민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네가 웬즈데이구나. 에이도스도 어쩌지 못해 골칫덩어리라던.”
웬즈데이가 답했다.
“서로 아가리에 총구 쑤셔 넣기 싫으면 그거 내려놔. 그리고 묻는 말에 질문해. 그럼 살아서 이곳을 나가게 해줄게. 제아무리 가상의 복제 세계라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신경계가 연결된 이상, 여기서 강한 자극을 주면 실제의 몸이 무사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거든?”
웬즈데이의 말에도 총을 들이댄 채 포위망을 좁히는 레드먼의 병사들을 본 소녀는 입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소녀는 다시 손짓을 했다. 세 명의 병사들은 어떠한 저항도 없이 총을 거꾸로 잡고 총구를 목에 들이댔다.
“자, 질문! 대체 무슨 실험이기에 백만 가까운 사상자가 날 수 있는 지진을 일으킨 거냐?”
“이건 오메가 플랜의 일부다. 너 같은 범죄자가 끼어들 일이….”
“젠장.”
웬즈데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총구를 목에 들이대고 있던 병사 세 명이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웬즈데이!”
지민이 소리를 질렀다.
“자, 이제 1:2다.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레드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해봐, 실험의 목적이 뭐야?”
“젠장, 오메가 플랜의 일부라고 말했잖아.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 대한 시뮬레이션 중이다.”
“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뭔데?”
지민의 질문에 레드먼은 총구를 바닥으로 향하게 한 다음 아예 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어차피 여기는 에이도스가 탐지 못 하는 음영구역이니까. 좋아. 당신들, 오메가 플랜의 마지막 시나리오 기억하지?”
“최후의 단계에 전체 데이터 동결 후 에이도스로 이관. 모든 유전자 샘플 및 표본 자료는 중앙 보존고로 이관하게 되어 있지.”
지민은 자신이 교육받은 대로 자신이 최후의 날에 마쳐야 할 업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그래, 각 섹터들이 해야 할 일이지, 정말로 최후의 날이 온다면 말이야. 태양이 급속도로 팽창했다가 갑자기 수축하는 날. 그런데 말이야….”
레드먼은 지민과 미강에게 번갈아 시선을 마주쳤다.
“그 최후의 날을 인간이 견딜 수 있을까?”
“무슨 소리지?”
레드먼이 입을 닫고 설명할 단어를 고르는 사이에 웬즈데이가 끼어들었다.
“자살방법을 연습 중인 건가? 전 인류적인 자살.”
“ 맞아.”
레드먼이 말했다.
“에이도스가 말한 대로 태양계의 종말은 갑자기 다가올 거야. 우주적인 규모에서는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라도 지구의 시간으로는 최소 한 달에 걸쳐 진행된단 말이지. 그사이에 태양은 자기력을 상실하고 식어버리면서 부분적으로 급속도로 식어 버리면서 붕괴할 테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행성들은 중심부 질량이 소실되면서 궤도를 이탈하고 지구는 거의 화성 궤도 밖까지 밀려나게 될 거야. 그것도 달이랑 충돌하지 않으면… 빙하기는 한여름처럼 느껴질 혹독한 추위와 지각의 변동이 찾아올 거야. 인류는 그 30일 동안 아무런 희망도 없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테고. 생각해봐. 다시 태어날 거라고 해도 그 고통스러운 죽음의 과정을 모든 인류가 겪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에이도스에 최종 데이터 백업을 모두 마친 다음 지구상의 인류 모두가 다 같이 죽는 방법을 연구 중이란 말이야?”
“거칠게 요약하면 그렇지. 그게 오메가 플랜의 최종 단계가 되어야 하고.”
레드먼은 멀리 내려다보이는 해변을 가리켰다.
“시나리오 몇 가지가 논의되었지. 전 세계의 모든 핵미사일을 사이좋게 골고루 터트리면 어떨까. 강력하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살포할까. 어떻게 해야 30일간 진행될 70억 인류의 고통을 최소화시킬 수 있을까? 그게 우리 부서가 연구하는 일이야. 강력한 지진을 위해서 이전부터 운영하던 카산드라 시스템의 분석이 필요했어. 강력한 지진 예측 시스템을 역으로 되돌리면 가장 강력한 최악의 지진을 일으키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일종의 리버스 엔지니어링② 과정이야. 하지만 설계자인 저 양반이 이미 죽은 터라 데이터에 의존해서 이렇게라도 되살려야 어느 정도 분석이 가능했거든. 저 양반은 회수해 가야해. 그냥 놔두면 웬즈데이 같은 통제 불능의 데이터가 되거든. 사실 저 양반뿐 아니라 저 꼬맹이도 데려가야 하긴 마찬가지지만….”
“꿈도 꾸지 마.”
웬즈데이는 명국을 돌아보았다.
“즉, 어느 지점에 지진을 일으켜야 파괴력이 더 커지고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오는지 실험하기 위해서 저 사람이 필요했다는 거야?”
“응, 핵심은 아니지만 꽤 중요했거든.”
“좋아, 그럼 마지막 날에 우린 다 어떻게 죽는 거지?”
“아직은 결정이 안 됐어. 지진의 경우는 사실 1차 피해보다 2차 피해 사망자가 더 많은 법이라서 정말로 지구를 두세 조각으로 부수지 않는 한 생존자들의 고통이 길어지게 될 테고, 그때 가면 모든 재난 구조 시스템이 작동을 안 할 테니, 이런 방법은 확실히 부정적이라는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군.”
“70억이 한 번에 자살하는 방법이라….”
“응, 그게 우리 섹터 업무야.”
허탈한 표정의 지민은 총구를 내리고 검은 흙탕물에 휩쓸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탁이 있어요.”
“말해 봐요. 가능하면 들어주죠.”
“기왕이면 모두가 가장 존엄한 방식으로 마칠 방법을 찾아 주세요.”
레드먼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노력해보죠.”
<끝>
① Johnny Cash. 2002.
② reverse engineering 역공학(逆工學)은 장치 또는 시스템의 기술적인 원리를 그 구조분석을 통해 발견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종종 대상(기계 장치, 전자 부품,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등)을 조각내서 분석하는 것을 포함
이재만
작가.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