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만(참세상연구소)
대선, 너목보
절대음감을 가진 실력자가 아닌 음치를 집어내는 TV쇼가 있다. <너의 목소리가 보여>는 출연한 가수가 여러 명의 후보 중에 음치를 가려내 차례로 탈락시켜 최후의 1명을 뽑는다. 후보들은 자신이 음치가 아니라 실력자라며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검증할 시간을 갖는다. 즉, 경연을 통한 실력자 찾기가 아니라 ‘탈락자’ 감별하기다.
촛불혁명 이후 치러지는 대선은 애석하게도 국민들이 원하는 대통령을 세우고 가장 일을 잘 할 사람을 찾기보다는, 기성 정치권 후보 중에서 탈락자를 먼저 골라내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너목보>식 대선이다. 특히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후 보수진영의 책임 때문에 보수후보들은 이미 음치로 찍혀 기를 못 펴고 있다. 반짝 나타난 반기문도 채 한 달이 못돼 실력이 확인되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쳐 중도포기했다. 문재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안희정을 거쳐 안철수 쏠림현상을 보이고 있다.
용도 폐기된 보수재편 무기, ‘대선 전 개헌’
이런 탈락자 감별법 중 하나가 바로 ‘개헌’이다. 촛불 정국에서 개헌 얘기를 먼저 꺼내는 사람들, 특히 ‘대선 전 개헌’은 탈락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이유는 이번 개헌 논의가 박근혜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개헌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박근혜는 최순실 문제가 공론화하자 돌연 입장을 바꿔 개헌 추진 방침을 전격 밝혔다. 정국 반전 카드로 개헌을 꺼내들어 최순실 문제를 덮고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하지만 같은 날 저녁 JTBC에서 ‘최순실 태블릿PC’ 보도가 나오고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 하면서 국민적 의혹과 분노는 폭발했고 박근혜 발 개헌은 그렇게 묻혀 사라졌다.
개헌 불씨를 다시 이은 것은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진영이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들은 일사분란하게 대통령 2선 후퇴, 거국내각 구성과 함께 ‘대선 전 개헌’을 들고 나왔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며 대통령은 외교와 국방을 맡고 국회 다수당에서 나온 총리가 행정수반으로 책임을 지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의 질서 있는 퇴진과 함께 대선 전 개헌을 축으로 보수신당 창당을 통한 보수재편을 완성하려 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버티기가 계속 됐고, 반기문 전 총장이 하차하면서 중심을 잃었다. 무엇보다 촛불정국에서–비록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기대면서 시민혁명을 통한 직접적인 퇴진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촛불이 제도권으로 완전히 순치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타오르면서 이런 보수재편 기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조기대선이 가시화되면서 3월 중순 한국당, 바른정당, 국민의당이 3당 공동 개헌안(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까지 마련했지만 대선 전 개헌 시도는 중단됐다.
대선 직후 개헌정국의 도래
개헌은 촛불과 탄핵정국에서 보수진영의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했지만, 30년 묵은 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대선에서 다시 중요한 의제로 등장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4월 12일 주요 5개 정당의 대선후보들을 초청해 개헌에 관한 입장을 들었다. 모든 후보가 2018년 6월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으로 입장을 모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헌이 이뤄질지, 또한 어떻게 이뤄질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당시 집권여당이던 국민회의와 자민련에서 ‘내각제 개헌’이 추진된 바 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4년 중임제의 원 포인트 개헌을 임기 1년을 남기고 제안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 3년차에, 박근혜 정부도 임기 1년 정도 남겨 놓았던 지난해 10월 개헌을 들고 나왔다.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됐다.
게다가, 87년 개헌(9차 개헌)의 목표 중 하나는, 그동안 대통령이 자기 입맛에 맞게 헌법을 계속 바꿔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개헌을 어렵게 만들자는 데 있었다(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과반수가 개헌안을 발의하고,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 동의로 개헌안이 통과되면, 국민투표에 붙여 과반수가 찬성해야 개헌이 된다). 이 때문에 48년 헌법제정 이후 87년까지 30년 동안 9번이나 바뀌었던 헌법이 87년 이후 부터는 개헌은커녕 개헌안조차 발의되지 못했다. 정치권 전반의 정치적 합의를 보지 못하면 사실상 개헌이 불가능한 구조로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대선 후보자들의 개헌 의지는 확인된다. 문재인 후보는 취임 직후 개헌특위와 산하 국민 참여 개헌 논의기구 구성을 공약했다. 안철수 후보는 개헌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9월 정기국회 개원 전에 대통령의 개헌 의견을 완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누가 당선되든, 대선 직후부터 개헌 기구가 구성되고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다. 개헌 논의 진행과 합의 여하에 따라 내년 초에 개헌안이 완성될 것으로도 보인다.
권력나누기 식 개헌과 촛불혁명
현재까지 개헌의 핵심 내용은 권력구조, 지방분권, 국회의원 선거제도 등 정치제도다. 정치권도 정치제도와 관련해 큰 이견은 없다. 대통령 4년 중임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반대 의견이 없고, 대통령의 권한 축소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서도 모두 찬성한다. 다만 분권의 방향과 내용을 놓고 총리와 어떻게 나눌지, 지방정부와는 또 어떤 방식으로 권한을 나눌 것인지 등 세부 문제에서는 다소 차이가 난다. 또한,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데도 공감대가 있다. 의원정수의 축소냐 확대냐를 놓고 대립할 가능성이 높지만, 비례연동형 국회의원 선거제도로 개편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별 이견이 없다. 결국 권력구조, 정치제도를 놓고 각 정당이 세부문제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의 큰 이견은 없어 합의 가능성은 크다.
하지만 문제는 개헌 그 자체의 명분이다. 이번 조기대선은 1,700만 명이 참여한 촛불혁명 이후 박근혜의 대통령 파면으로 치러진 선거다. 때문에 단순히 권력구조 개편으로 개헌을 마무리 할 수는 없다. 특히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한다면서 대통령만큼이나 신뢰가 가지 않는 국회와 권력을 나누는 식의 개헌은 촛불혁명에도 반한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후보들이 국민 참여 개헌을 이야기하고, 개헌기구 구성에 국민 참여를 보장하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권 등 직접민주주의 제도도 확대할 의사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각 후보들이 입을 모아 개헌은 국민 뜻에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 대부분 입으로만 ‘국민 참여’를 외칠 뿐, 대선 정책에 반영되지도 않았고, 기존 입장을 재탕 삼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촛불이 요구했던 적폐청산은 입에서도 사라진지 오래다. 원인은 적극성과 한계라는 촛불혁명의 양면성에 있다. 촛불이 계속 돼, 결국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는 점에서 적극성을 갖는다. 반면 촛불이 온전히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국회와 헌법재판소 같은 기성 정치 제도권에 탄핵을 의탁했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지금 상황으로는 87년의 어정쩡함과 같이, 2018년 개헌으로 마무리될 헌법체제에 또 다른 어정쩡함이 내포돼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87년 체제의 극복과 촛불의 완성
개헌은 독재와 민주세력간의 애매한 타협으로 형성된 ‘87년 (헌법)체제’를 시대에 맞게 완성하자는 데서 출발했다. 그런데 도대체 87년 체제가 무엇인지는 얘기하는 사람마다 내용이 다르다. 그렇다보니 강조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87년 체제는 ‘타협’이라는 지체된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를 일컫는 것만은 아니다. 87년 체제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의 출발이다. 국가체제의 하위에 있던 재벌 및 시장자유주의가 자신의 독립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도 바로 87년 헌법을 통해서다. 헌법의 핵심 경제조항인 119조 2항은 국가의 역할로 ‘경제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자로 규정했다. 동시에 1항에서는 헌법제정 이후 최초로 경제주체로 ‘기업’이 추가됐다. 국민 개인 뿐 아니라 기업이 경제질서의 주체로 최초 등장한 것이다. 이는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의 시장자유를 추구하는 근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규제철폐와 각종 재벌 지원 정책의 헌법적 근거가 됐다.
87년 체제는 대통령 직선제와 일부 기본권 신장을 제외하고 사회, 경제적 질서는 전두환 군사독재 하에 이뤄진 8차 개헌의 연장선이다. 또한 한국사회가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되는 헌법적 근거가 됐다. 따라서 87년 체제를 극복하고 촛불혁명을 완수하는 개헌은 몇몇 조항을 바꾸고 일부 참정권과 기본권을 추가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박근혜 파면으로 치달은 권력구조의 재편, 재벌체제 종식, 촛불혁명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확대 등 중요한 헌법질서를 새로 짜야 한다(그런 점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가 제헌헌법에 들어 있던 노동자의 이익균점권을 다시 부활시키고, 헌법 전문에 노동존중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나마 현재 대선 후보 중에서 가장 적극적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번 개헌은 3차와 5차 개헌처럼 ‘제헌 수준의 개헌’을 이뤄야 한다. 권력구조의 민주적 재편을 포함해 국·공유 및 사회화 중심의 경제질서, 노동·복지사회체제, 협치 중심의 행정구조 개편, 국민 참정권 확대, 노동·여성·소수자의 기본권 확대 보장 등 주요 헌법질서를 새로 써야 한다. 그렇지 않고 87년 개헌과 같이 정부주도의 개헌기구에서 다시 어정쩡한 타협이 이뤄진다면,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우리의 불행한 삶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로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할 이유다.[워커스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