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완성차 공장에서 연봉 4,000만 원을 받으며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다면? 왠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지금과 같은 취업난에서는 더욱 그렇다.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고 싶은 질 좋은 일자리인 느낌. 한순간 취업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조건. 오래 보지 않아야 매력이 있다. 바로 ‘광주형 일자리’가 그렇다.
하지만 매력은 한 순간. 오래 들여다볼수록 뒷맛이 찝찝해진다. 일례로 광주에는 ‘기아차’라는 대기업 완성차 공장이 있다. 이곳의 생산직 초임은 7천만 원 가량. 평균적으로는 9천만 원 이상의 임금을 받는다. 만약 광주에 만들어진 새 기아차 공장에서 연봉 4천만 원을 받는다면? 기존보다 반 토막 난 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는 꼴이 된다.
‘광주형 일자리’란 ‘일자리 창출’, ‘고용안정’ 등의 대가로 기존의 임금을 양보하는 고용 모델이다. 벌써 준비기간만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아는 사람 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사업이기도 하다. 2년 여 간 별다른 진전 없이 공전만 하던 이 사업이, 최근 들어 꽤 핫한 사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 정부가 ‘광주형 일자리’를 일자리 정책의 핵심 사업으로 꺼내든 탓이다.
기업 투자와 임금 삭감을 맞바꾼 ‘빅딜’
문재인 정부는 대선 전부터 광주형 일자리에 관심이 많았다. 더불어민주당은 대선 공약집에서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대선 기간 문재인캠프 일자리위원회는 광주 기아차 공장에서 ‘광주형 일자리’ 확산 방안을 위한 토론회도 열었다. 그리고 당선 후.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는 취임 후 100일 동안 우선적으로 추진하게 될 ‘일자리 100일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노사상생형 일자리 모델(광주형 모델) 확산 방안’을 마련한다는 야심찬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광주형 일자리는 윤장현 광주 시장이 주도하는 프로젝트다. 노사민정 대타협을 통해 기업은 투자를, 노동계는 노동조건을 양보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의도다. 2015년, 광주시는 산하에 사회통합추진단을 출범하고 광주형 일자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추진단장으로는 박병규 전 기아차 광주지회장을 영입했다. 같은 해 한국노동연구원은 광주형 일자리 창출 모델 구축 연구용역 보고서를 펴냈다. 노동시장 불평등 해소를 통한 일자리 창출이 광주형 일자리의 핵심 목표였다.
“광주형 일자리는 노사민정 태타협을 통해 기업은 투자를, 노동계는 임금을 양보해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애초 광주형 일자리 모델은 현대기아차 같은 국내 완성차 공장을 지역에 유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단, 독립법인 설립, 즉 자회사 형태의 공장 설립이 전제 조건이었다. 단순히 추가 공장을 설립할 경우, 기존 현대기아차의 단체협약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신규 투자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신, 노동자는 기존 완성차 공장 정규직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 소위 사회적 협약을 통해 ‘적정임금’을 산출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연구원은 1차 부품사 신입사원 연봉 수준인 약 4,000만 원을 ‘적정임금’으로 제시했다. 기업은 임금인상 자제와 근로시간 유연화를 전제로 자본 투자와 고용수준 유지를 협약하게 된다.
노조는 임금과 노동시간 유연화, 노동강도 등의 양보교섭을 전제로 고용안정과 경영참여(노동이사제 등) 등을 보장받게 된다. 아울러 적정임금을 통한 기업의 비용절감분은 원하청 불평등 구조 개선에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광주시는 이 같은 계획에 기초해, 자동차 100만대 생산기지 조성을 추진 중이다. 산업단지를 조성해 40만대 규모의 신규 완성차 공장과 부품사를 유치하고, 약 1만 명의 신규고용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광주형 일자리가 겨냥하고 있는 것
광주형 일자리가 벤치마킹한 모델은 독일 볼프스부르크 지역의 Auto5000프로젝트다. 폭스바겐이 독일 볼프스부르크 지역에 신규 공장을 설립하는 조건으로, 독일 금속노조가 대규모 양보 교섭을 진행한 사례다. 노사 협상이 난항을 겪자 독일 수상이 중재에 나서 교섭을 타결시켰고, 이는 대표적인 사회적 협의 모델로 회자됐다. 이 협상에서 노조는 기존 폭스바겐 노동자보다 20% 낮은 임금과 성과급 중심의 임금체계, 유연근무제 등을 받아들였다. 사측은 독립법인을 만들어 5,000명의 실업자를 채용했다. 노사가 임금감소와 고용창출을 맞바꾼 전략적 빅딜이었다. 광주시와 한국노동연구소 등은 이 모델을 ‘혁신적 자동차 공장의 사례’로 내세웠다. 노사 공동의 성공적 프로젝트이자, 노사 불신이 심한 한국에 더욱 필요한 모델이라고도 강조했다.
광주시가 벤치마킹한 또 다른 모델은 독일의 ‘고용보장과 경쟁력 강화 노사협약’이다. 이 역시 노동계의 양보를 담보로, 기업이 정리해고를 일정 기간 미루고 독일 현지 투자를 확대하는 방식의 협약이었다. 노동계에서는 임금피크제 도입, 단시간 근로제 확대, 연장근로시간이 적용되지 않는 토요근무제 도입, 연장수당을 휴가로 대체하는 등의 양보 협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실 ‘사회적 협약’ 일자리로 대표되는 광주형 모델은 노동계, 특히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적정임금’은 현재 완성차 정규직 임금의 ‘비정상’을 근거로 한다. 비정상적 자본을 규제하는 대신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반 토막 난 임금은 ‘적정임금’이라는 이름의 유리천장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실제로 광주형 일자리에서는 임금인상 자제를 위해 직무급 형태의 임금체계 도입이나 임금결정공식 설정 등의 방안도 제기된 바 있다. 이는 향후 기존 완성차 직고용 정규직의 임금을 억제하는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크다. Auto5000에서 벌어진 양보 협약이 결국 기존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로 이어진 사례가 그러하다.
“광주형 모델은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비정상적 자본을 규제하는 대신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는 방식이다”
백 번 양보해 임금비용 절감분을 불평등한 원하청 구조 개선에 활용하자는 제안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광주형 일자리 모델에서 원하청 구조개선, 즉 하청노동자의 고용조건 개선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광주형 혁신 공장에 부품을 납품하는 1, 2차 부품사 노동자들의 고용형태는 정규직인지, 이들 역시 적정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구자도, 광주시도, 투자를 약속한 완성차 회사도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일괄 시행은 어렵다”거나 “기구에서 논의를 해야 한다”, 혹은 “아직 구체적인 얘기는 없다”는 식의 답변뿐이었다.
‘포장지’만 있고 ‘알맹이’는 없다
추진 과정에서의 실무적인 문제들도 상당하다. 도무지 실체를 알 길이 없는 사업이라는 평가도 잇따른다. 광주시의회를 비롯해 지역 노동조합, 과거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연구했던 연구자들마저 ‘실체 없는 사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광주시의회에서는 “꿈같은 미사여구만 보일 뿐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찾기 힘들다”는 지적도 나왔다. 구체적인 연구 과정이나 사업 계획 없이 홍보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판도 있다.
지난해 광주시 산하 사회통합추진단-사회통합지원센터 사이의 내홍도 여기서 비롯됐다. 광주시는 광주형 일자리의 양 날개로 사회통합추진단과 사회통합지원센터를 각각 설립했다. 박병규 단장을 중심으로 하는 추진단은 사업의 총괄 기획을, 김상봉 전남대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센터는 연구 및 사업 추진의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지난해 6월, 김상봉 교수를 비롯한 센터 연구진들은 광주시와 추진단의 사업 방식을 문제 삼으며 집단으로 이탈했다. 당시 센터를 떠난 연구원 A씨는 “광주시는 내용은 만들지 않은 채 센터가 홍보 업무만 하길 원했다”고 밝혔다.
“광주시의회를 비롯해 지역 노동조합, 과거 광주형 일자리 모델을 연구했던 연구자들마저 ‘실체 없는 사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광주형 일자리가 목표로 했던 국내 완성차 공장 유치도 감감 무소식이다. 할 수 없이 해외로 눈을 돌린 광주시는 인도 출장길에 올라 마힌드라 그룹 회장에게 투자 유치를 읍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향후 한국에서 전기차 생산공장 건립 시 광주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는 인사치레만 남겼을 뿐, 지금까지 마힌드라로부터 별다른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광주시는 지난해 3월 중국 완성차 공장으로 알려진 조이롱(구룡) 자동차와 투자의향 협약을 체결했다. 새로 조성될 빛그린산업단지에 연간 10만대 규모의 완성차 생산 공장을 설립하겠다는 협약이었다. 당시 광주시가 밝힌 계획에 따르면, 조이롱 자동차는 올해부터 전기승합차 2000대를 양산해야 한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약 2,500억 원의 투자도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진행상황은 자본금 1억 원짜리 한국 법인이 설립됐다는 것 뿐. 이마저도 중국 조이롱과 관계없는 페이퍼 회사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현재 광주시는 광산구와 전남 함평군 일대에 122만 평 규모의 ‘빛그린산업단지’ 조성을 추진 중이다. 이곳을 광주형 일자리 모델과 연계한 미래형 자동차 산업밸리로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광주형 일자리를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인 ‘더나은일자리위원회’는 반쪽짜리 논의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역 노동계조차 논의기구로 이끌어내지 못한 탓이다. 광주지역 민주노총은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식의 광주형 일자리 논의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재인 정부는 일단 광주형 일자리 확대 드라이브를 걸었다. 오는 8월까지 광주형 일자리 모델 확산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중앙정부까지 발 벗고 나선 이 사업은 과연 일자리 창출의 블루오션일까, 아니면 그저 속 빈 강정으로 남게 될까. 광주형 일자리 추진 주체 및 이해당사자들을 만나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봤다.[워커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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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최애템, ‘광주형 일자리’가 미심쩍다(2) – 광주형 일자리 추진 주체 및 이해당사자들의 이야기